00344 그리고 새해 =========================================================================
에테르 워치 브랜드는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
스위스에서 영입한 시계 장인들은 금세 제조 기술을 익혔고, 소량이지만 일반형 에테르 워치 모델도 나오기 시작했다.
가격이 억대부터 시작하는 일반형 모델은 매장에 진열이 되자마자 금세 팔려 나갔다. 1조 대 가격을 자랑하는 고급형 모델에 대한 선망과 갈증이 일반형 모델로 일제히 쏠린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일반형과 고급형 모델은 구분이 어려웠다.
고급형 모델의 장점은 한서진이 직접 제작했기에 에테르의 진실한 흐름을 보여준다는 것인데, 일반인의 시선으로는 그 진위를 가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에테르 워치는 파텍필립을 제치며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시계 브랜드로 우뚝 섰다.
H그룹은 이제 자타공인 국내 최고 대기업으로 인정받았으며, 진성그룹은 오랜 1위 자리를 내주고 만년 2인자로 물러났다.
특히 진성전자는 SJ인더스트리의 배려로 만년 적자였던 파운더리 사업이 흑자로 돌아섰다. 찍어낼수록 마이너스 마진이었던 것이, 이제는 찍어낼수록 이윤을 남기게 된 것이다.
정계와 언론계는 에테르 반도체를 파운더리 생산하는 유일한 업체라며 두 기업을 칭송했다.
한서진은 마력 칩셋 3의 양산에 성공했다.
이전에는 에테르 흐름을 실시간으로 적용해서,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들어야 했다. 매 순간마다 달라지는 에테르의 흐름을 고려하지 않으면, 마력 칩셋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계 원형과 변수 적용 프로그램을 공개했어도, 다른 이들은 제조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과 한국의 소방서들은 한서진이 만드는 소량의 물량만 목을 빼놓고 기다려야 했다.
최근 온갖 연구와 강연 작업으로 그가 빡빡한 일정을 보냈을 때, 누구보다 마음 졸이며 걱정한 것은 한국과 미국의 소방관들이었다.
박효산 교수도 소식을 듣고 연구소로 달려왔다. 서울 외곽에 새로이 지은 회사 사옥이었다.
“만능소화기 양산 성공했다며?”
칩셋 3는 최고의 소화 물질로, 만능소화기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네, 성공했습니다. 이제는 제가 일일이 매달리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어떻게 했어?”
“타르타로스에 자동화 프로그램 만들어서 입력했죠. 이젠 녀석이 알아서 뚝딱뚝딱 만들어줄 겁니다.”
“1? 2?”
“당연히 2죠. 1은 재해 예측하는 것으로도 허덕이는데요. 성능이 좀 딸려서요.”
한서진은 에테르 흐름의 변수를 실시간 적용할 수 있도록 타르타로스 2를 조율했다. 그리고 연구소 내부에 있는 반도체 공정설비와 연동을 시켜, 완전 자동화 장치로 탈바꿈시켰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만 개도 찍어낼 수 있죠. 그렇게나 많이 필요할 것 같진 않지만.”
“소방관들 이제야 한숨 좀 돌리겠구나. 근데 이러면 소방관 일자리가 줄어드는 거 아니냐?”
“그 사람들 일이 불만 끄는 건 아니잖아요.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어차피 칩셋은 불 끄는 거 밖에 못해요.”
고개를 끄덕이던 박효산이 다시 물었다.
“근데 가격은 어떻게 할 거냐?”
“……글쎄요.”
“잘만 계획을 짜면 떼돈 벌 것 같은데.”
“돈은 지금도 잘 벌고 있습니다만.”
“뭐 어때? 자고로 연구자금과 돈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다. 얼마든지 좋은 설비를 갖추고, 중요한 실험을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지.”
칩셋 3는 설정된 규모의 화재는 순식간에 진압한다. 최고의 소방차라고 할 수 있다.
칩셋 3를 안정적으로 갖추면 소방차 등 소방시설에 대한 비용 투입을 줄일 수 있게 된다. 그걸 생각해서 가격을 책정하면, 상당히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을 테고, 당연히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냥 판매원가에 마진 100달러 정도 더 붙여서 판매할까 합니다.”
“겨우 마진 100달러? 그건 너무 헐값 아니냐?”
박효산은 자신이 손해라도 본 것처럼 펄쩍 뛰었다. 어떤 큰불도 순식간에 꺼버리는 기적의 소화물질인데, 원가에 100달러만 더 붙인다고?
“불 끄는 일이잖아요. 그걸 가지고 돈을 쓸어 담고 싶진 않아서요. 양심도 조금 걸리고.”
“그거야 네 마음이기는 하다만…… 그래도 너무 아깝다. 좀 더 받아도 누가 뭐라고 안 할 텐데.”
“괜찮습니다. 어차피 지금 있는 돈도 다 쓰지도 못합니다.”
선량한 자본가 행세를 하려는 게 아니다.
화재진압. 그런 숭고한 일에까지 폭리를 취하기에는 양심의 가책이 부담스러웠을 뿐이다.
“그나저나 의대 수업은 어때? 할 만 하냐?”
“그럭저럭요.”
“의사 면허는 생각 없다면서?”
“네, 그러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요. 어차피 제가 수술 같은 거 하려고 공부하는 것도 아닌데.”
“에테르를 의학과 융합시키기 위해서지.”
“네, 저는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면허나 학위 같은 건 필요 없어요.”
박효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서진이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말에 세상이 술렁이고 있다. 특히 H-1, 간 재생 치료제를 본 이들은 그가 의학계에 얼마나 큰 족적을 남길지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H-1은 그가 의학을 공부하기 전에 만들었다는 것은 정작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H-1과 H-2를 개발했다고 알고 있다.
‘어쩌면 의학을 공부하는 건 구실인지도 모르지.’
납득할 수 없는 천재성, 그것을 세상에 이해시키기 위해서. 박효산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지난 몇 년 간, 국가 경제지표는 조금 좋아졌다.
특히 진성그룹이 100조 원의 비자금을 사회에 환원하고, H그룹과 더불어 근로 환경을 개선하면서, 일반인들의 삶은 조금 윤택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일자리는 부족했고, 청년실업률은 높았다.
여기에 북한 붕괴 등 온갖 악재가 끼어들면서, 모처럼 생긴 상승효과는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정부, 북한 난민 정착 사업 개시!」
「시민단체, 사회 혼란 불러일으킬 것이라 엄중히 우려.」
그런 와중에 행정부는 북한 난민들을 한국 사회에 흡수하기 위한 작업을 차근차근 시작했다.
언제까지나 임시거주시설에 그들을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국내 경기부양을 노린 계산도 있었다.
다행히 특별 국채로 조달한 막대한 자금이 있어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강원도, 경북, 경남, 충북, 충남 등의 지역에 난민들이 정착할 수 있는 신도시 건설에 들어갔다.
서울, 인천, 부산, 대구 등의 대도시를 피해, 인구 밀도가 낮거나 지역 발전도가 더딘 지역을 우선적으로 선별했다.
정치적인 이유도 있고, 재정적인 이유도 있으며, 행정적인 이유도 있었다. 일단 대도시에 난민들을 정착시킨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처음 난민 수용에 반대했지만, 재정지원 및 기반시설 투자를 약속하자 태도를 뒤집어 환영했다.
특히 북한 난민 1명을 받아들일 때마다 지자체에 따로 향후 10년 간, 매년 1만 원씩 특별 예산 지원을 해준다는 약속이 컸다.
10만 명을 받아들이면 10년 간 매년 10억 원의 특별 비상금이 생긴다. 가난한 지자체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조건이었다.
난민을 수용하는데 드는 비용, 기반시설 투자 및 재정지원과는 별도로, 순수한 보너스 아닌가.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돈이다.
지자체 파산을 앞두고 있는 강원도 같은 경우, 도지사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며, 800만 명 전원을 수용할 수도 있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그렇게 난민들은 각 지역으로 흩어져 정착하게 되었다.
「특별 국채 발행은 신의 한 수였다. 국채로 조달한 자금이 없었으면 이런 대책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 결국 모든 문제는 돈에서 시작하고, 돈으로 해결된다.」
일본, 그리고 해상의 크루즈 선박에서 거주 중인 난민들도 조만간 순차적으로 정착시킬 예정이었다.
난민들이 거주할 신도시를 동시에 여럿 건설하다 보니 일시적으로 경제 부양 효과가 발생했다. 기반시설을 다지고, 아파트를 여럿 지어 올리다 보니 건설경기가 좋아진 것이다.
일반 국민들은 ‘한서진 효과’라며 좋아했지만, 경제 전문가들은 커다란 우려를 숨기지 않았다.
“지금 경기가 좋아진 듯이 보이는 것은 일시적인 착각에 불과합니다. 전국적으로 도로를 깔고, 기반시설을 짓고, 북한 출신 주민들이 거주할 아파트를 동시에 올리고 있으니 당연히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문제는 당장 800만 여 명의 주민들이 정착하고, 또 향후 천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단계적으로 정착할 텐데, 그들의 재사회화 교육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지 못하면 상상도 하지 못한 사회적 문제가 도래할 겁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지금 한국은 당장 800만 여 명의 실업자를 안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수는 더욱 늘어날 테고.
그들이 재사회화 교육을 마치고, 일자리를 구하고, 한국 시스템에 완전히 스며들 때까지, 한국은 보이지 않는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
“당장은 특별 국채로 조달한 돈을 쓰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뿐입니다. 국가 재정이 아닌, 개인의 사재를 털어서 충당하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그 돈은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들여온 외화이기에 더욱 부담이 없습니다.”
“문제는 결국 그 돈도 빚이라는 겁니다. 언젠가는 갚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펑펑 쓰고 있으니,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마이너스 통장이 이래서 위험해요. 은행이 갚으란 말을 하기 전에는 그게 전부 내 돈인 것 같거든요.”
경제전문가들은 행정부가 특별 국채 자금을 신중하고 효율적으로 쓰지 않고 있다고 비난했다.
한 푼이라도 아껴서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써야 할 판에, 선심내기처럼 마구잡이로 탕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1조 5,000억 달러가 넘는 국채의 만기가 도래했을 때, 과연 우리나라가 단 5%라도 상환할 능력을 갖추고 있을까요?”
“현 재정 상태, 그리고 경제 상황으로 볼 때 절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이건 우리나라가 감당할 수 있는 빚이 아닙니다. 그러니 더욱 신중하고 철저하게 아껴 써야 합니다.”
경제전문가들의 그런 무거운 우려는, 들뜬 희망에 부풀어 있는 대중의 마음에 닿지는 못했다.
“맞아. 꼭 빚을 받을 필요는 없지. 그만큼의 부담을 채워두는 거니까.”
송하나와 잔을 부딪치며, 한지혜는 감탄했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어떻게 보면 되게 싸게 먹힌 거네. 돈으로 이 나라를 꽉 쥐고 구워삶을 수 있으니까. 그것도 떳떳하고 합법적으로.”
“오빠한테는 돈이 가장 가치 없는 재화잖아요.”
“아, 돈이 가장 가치 없는 삶이라니. 부럽다. 나도 그렇게 살아봤으면.”
“아이, 왜 그래요. 언니는 오빠와 친남매면서.”
“여동생보다는 딸이 좋다니까. 하나야, 만약 내가 불의의 사고로 죽으면 너한테 잉태돼서 다시 태어날 테니까 부디 사양하지 말아줘.”
조금 짓궂은 농담, 송하나는 대답 대신 소리 없는 웃음을 흘리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근데 오빠가 언제 결혼하자고 말 안 해?”
“아직이요. 저나 오빠나 대학생이잖아요.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야. 빨리 해치워버려. 저러다가 다른 여우가 오빠 홀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언니야말로 연애 안 하세요? 준석 오빠 이후로 줄곧 혼자이신 것 같은데.”
“미련 남은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냥…… 남자 생각이 별로 없네.”
한지혜는 시큰둥하게 술만 홀짝거렸다.
========== 작품 후기 ==========
사채 무서운 줄 모르네요.ㅎㅎ
펑펑 쓸 때는... 좋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