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343화 (343/609)

00343  그리고 새해  =========================================================================

또 한 번의 새해가 밝았다.

한서진은 28세가 되었다. 학부 4학년, 엄연한 졸업반이지만 한국대의 누구도 그를 학부생이라 여기지 않았다.

간혹 4학년이라는 말을 듣고 오히려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자신은 그가 당연히 교수인 줄 알았다며.

한서진은 연말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며, 안 그래도 드높은 금자탑을 한층 더 쌓아 올리기도 했다. 당시 수상식에 참가한 이들은 내년 생리의학상 수상자는 이미 결정 되었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떠들기도 했다.

“H-1, H-2, 각각 하나씩만 놓고 봐도 충분히 노벨상감이다. 안 그런가?”

완벽한 간 재생 치료제, 그리고 탈모제 및 발모제.

그 두 약이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하면, 그것은 100% 선정 비리라고 단정하는 분위기였다.

SJ인더스트리는 사업 규모를 더욱 확장하며, 기업 가치 6조 달러를 달성했다. 다만 실제로 거래되는 주식은 거의 없다.

주식시장에 상장되지 않은 SJ인더스트리의 주주는 원래 정지원, 칼 루이스, 크렘, 그리고 한서진, 이렇게 네 명이었다.

각각 1%, 2%, 10.5%, 86.5%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작년 말 크렘 회장이 오랜 지기에게 0.5%를 300억 불에 매각했다. 그래서 그 거래액을 기준점으로 삼아, 기업 가치를 6조 달러로 가늠하게 된 것이다.

300억 불의 거액을 주고도 0.5% 밖에 확보하지 못했음에도, 오히려 구매자는 싱글벙글했다.

“도저히 살 수 없는 주식을 살 수 있게 돼서 매우 기쁘다. 그리고 나는 오히려 싸게 샀다고 생각한다. SJ인더스트리의 기대 성장 가치는 아직도 무궁무진하며, 무엇보다 한서진 박사와 사적인 인연이 생겼다는 게 흡족하다.”

회사는 특허료로 이익의 50%를 한서진에게 지불한다. 즉 매출원가와 판관비를 제한 금액에서 절반을 특허료로 지불하고 남은 금액이 회사의 이익이 된다.

그 세전이익이 작년 한 해 동안 무려 1조 5,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법인세만 5,800억 불 이상을 냈다.

어마어마한 수치 덕분일까. SJ인더스트리는 더 이상 반도체의 황제기업이라 불리지 않는다. 반도체의 괴물기업이라는, 다소 무시무시한 별명을 얻었다.

“구세대 반도체가 사용된 수퍼컴퓨터를 어떻게 수퍼컴퓨터로 인정할 수 있는가.”

에테르 반도체는 수퍼컴퓨터의 세대 구분을 짓는 결정적 분기점이 되었다.

구세대 반도체는 이미 일반 컴퓨터 시장에서도 퇴출되는 분위기였다. 초저가형 제품 등에 사용되어 간신히 명맥을 이어갈 뿐.

에테르 반도체는 수퍼컴퓨터, PC, 스마트폰 등 모바일 기기, 서버, 네트워크 설비, 항공기, 인공위성, 심지어 전투기, 군함과 어뢰, 미사일 등에까지 사용된다. 거의 모든 전자설비에 사용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SJ인더스트리는 캘리포니아 왕좌에 앉은 채, 전자 시장의 헤게모니를 독점하고 있는 괴물이었다.

영원그룹은 몇 달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안에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그 성장 속도와 폭발적인 성장폭은 오히려 SJ인더스트리를 능가한다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간 재생 치료제인 H-1, 발모제 및 제모제인 H-2.

겨우 몇 달 만에, 그 두 가지 약으로 세계 제약 시장을 재패한 것이다.

두어 달의 짧은 시간 동안 H-2로만 30억 달러 가까운 매출을 올렸으며, H-1로 60억 달러에 달하는 매출을 올렸다. 그 빈약한 생산라인에서 비명을 지르고 쥐어짜내면서도, 저만한 매출을 단숨에 올린 것이다.

생산라인이 안정화되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쓸어 담을 것인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현재 영원그룹은 캘리포니아에 대대적인 규모로 제2공장을 한창 짓고 있는 중이다. 세계 제약시장을 석권하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쏟아져 나올 H-3, H-4 등의 추가 시리즈 생산까지 염두에 둔 대대적인 투자였다.

“이미 SJ인더스트리라는 괴물을 낳은 한서진 박사가 또 다른 괴물을 빚어내려고 한다.”

“자본주의 시대가 낳은 괴물들…….”

한서진이 최단기 코스로 의대 수업을 듣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세상은 더욱 충격에 빠졌다.

이미 독학으로 공부해서 반도체 시장을 재패한 이가, 의학 시장마저 노리고 있다!

노벨화학상 수상자가 한 말, 매해 수상식에서 한서진의 얼굴을 보게 될 거란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서진, 그는 대체 몇 관왕을 달성해야 만족하려는가?”

“그를 존경하지만, 가끔 그가 무서울 때도 있다. 지금의 그는 자비로운 거부이지만, 과연 그의 후손도 그러할까?”

“어쩌면 지금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초대형 부자 가문이 탄생하려는 역사적인 시대일지도 모른다. 전 세계의 모든 재화를 움켜쥐는.”

세상은 열광하면서도 두려워했고, 겁을 먹으면서도 환호했다.

한서진을 향한 국내 여론은 뜨거웠다. 특히 H시리즈의 성공으로 인해 영원그룹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자, 많은 국민들이 큰 기대를 드러냈다.

“앞으로 영원그룹이 우리나라를 먹여 살릴 기업이 될 거야.”

“연간 수익이 수 조 달러면 세상에……. 어마어마한 경제 부흥 효과가 생길 듯. 이제 불경기 시대가 끝날 때가 멀지 않았다.”

“헬조선, 청년실업이란 단어는 이제 그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주라. 부탁이다.”

국내에 기반을 둔 영원그룹이 SJ인더스트리 못지않은 회사로 성장한다면, 매년 엄청난 경제성장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들은 그런 희망에 부풀었다.

그것이 한낱 거품 같은 꿈인지도 모른 채.

“정녕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실 생각입니까?”

여당에서 중진 의원 몇 명이 찾아왔다. 한서진은 처음에는 만남을 사양했으나, 그들은 몇 번이고 만나줄 때까지 끈질기게 찾아왔다.

결국 한서진은 잠깐 시간을 내주었고, 그들이 긴 탐색 끝에 꺼낸 본론은 영원그룹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무슨 내란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느껴지네요.”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국민들의 기대와 열망이 매우 큽니다.”

“영원그룹이 생산거점을 캘리포니아로 옮기는 것은 합리적인 경영적 선택입니다. 그리고 저는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저 오너일 뿐입니다.”

여당은 한국에 뿌리를 내릴 줄 알았던 영원그룹이 캘리포니아로 생산거점을 옮기는 것을 두려워했다.

“생산비용은 한국이 오히려 더 저렴할 수 있습니다. 미국, 특히 캘리포니아는 인건비와 물가가 비쌉니다.”

“대신 어떤 경우에도 생산이 흔들리지 않고 안전하죠. 미국만큼 안전한 곳은 없으니까요.”

“한 박사님!”

“저는 경영자가 아닙니다. 이런 말씀은 박현준 회장님을 찾아가셔야지요. 그리고.”

한서진은 얕은 한숨을 쉬며 잠시 침묵하다가 덧붙였다.

“애초에 영원그룹은 한국기업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

냉정한 진실, 부푼 희망에 잠식된 국민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한서진은 본래 L국에 설립한 지주회사 에스코너를 통해 SJ인더스트리의 지분과 현금계좌 등 모든 자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에스코너는 한서진이 그 지분을 100% 보유하고 있는 회사로서, 당시 정지원의 조언을 듣고 만든 회사였다.

나중에 천문학적인 재산이 생길 때를 대비해 미리 재산관리수단을 만들어놓으라는.

그때는 시키는 대로 만들었지만, 몇 년 지나니 정말 그의 말대로 되었다.

에스코너는 현재 L국에서 미국으로 거점을 옮긴 상태이며, 영원그룹의 모든 지분을 보유하는 지주회사이기도 하다.

즉 회사 구조적인 측면에서, 국내에 있는 영원그룹은 한국법에 의해 설립되었고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엄연한 미국 기업이라 할 수 있다.

맥플코리아가 미국 기업이지, 한국 기업이라고 우길 수는 없는 것처럼.

“비록 미국 명예시민이지만, 박사님도 엄연히 우리나라 국민 아닙니까? 어떻게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모른 체 할 수가 있으십니까?”

“저는 이 사회에 꽤 많은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는데요.”

단지 자신이 이 나라에 남아있음으로써, 국가와 사회가 얻은 유무형적 이익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한서진은 몇 년 전 태풍 메기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그들에게 새 집을 지어주기 위해 많은 돈을 냈다.

북한 소멸로 국가 전체가 전전긍긍할 때 1조 달러 이상의 특별 국채를 매입했으며, 한지혜가 H컨설턴트를 통해 저소득층 청소년들의 생활과 교육을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열악한 소방관들을 지원하기 위해 10조 원을 쾌척하기도 했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지원할 계획이다.

“이런데도 너무하다는 말이 나옵니까?”

“한 박사님. 물론 정치인으로서 사재를 털어 자선 사업을 벌이는 하해와 같은 마음에는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만, 근본적인 도움은 SJ인더스트리나 영원그룹 같은 건실한 기업을 유치함으로써 줄 수 있습니다.”

몰염치…….

두 중진 의원들을 보며 한서진이 떠올린 단어였다. 사람의 낯짝을 쓰고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자신이라면 수치스러워서 입 밖으로 내뱉기도 전에 목구멍에서 거부감을 일으킬 것 같은데.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제가 그래서 과학자 외 사람들을 안 만나는 겁니다. 요즘은 과학자분들도 정치한다고 들떠 있어서 여러 모로 아쉽지만요.”

“한 박사님. 저희는 그저…….”

“돌아가세요. 다시는 이런 자리를 받아주지 않을 테니 그렇게 아시고요.”

한서진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5선 의원이라는 이가 부르르 떨며 직시했다. 그의 눈빛에 숨기지 못하는 노여움이 언뜻 스쳤다.

“박사님은 이 나라에서 태어났고, 이 나라 복지 시스템의 수혜를 입으며 자랐지 않습니까. 만약 박사님이 중동의 전쟁국가에서 태어났다면 지금 같은 인물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의, 의원님! 그건 좀……!”

“…….”

“가난한 어린 시절 생활비, 학비 보조를 받지 못했으면 박사님이 한국 제일 대학을 과연 갈 수 있었겠습니까! 공공사회 서비스 덕분에 박사님이 지금 이만큼이라도 성장하신 겁니다! 국민으로서 나라의 은혜를 입은 게 있는데, 어찌 그리 매정하게 자를 수가 있습니까! 이제는 그 은혜를 갚아야지요!”

“동전으로 받은 은혜를 금괴로 갚았는데,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건가요?”

한서진은 조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대학은 제가 벌어서 제 힘으로 갔습니다. 전 원래 고교 졸업하고 반도체 생산공장에서 일했는데, 의원님은 그것도 모르시나 보군요?”

순간 5선 의원의 말문이 막혔다.

동행한 의원은 험악해진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선배 의원을 말리고 싶지만, 연륜과 경력에서 밀리는 터라 제대로 참견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기만 했다.

잠시 후 5선 의원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저는 박사님이 애국자이신 줄 알았습니다. 수를 가리지 않고 사회적 약자들을 돕는 것을 보고 말입니다.”

“저도 한때 열악한 인생을 살아봐서인지, 안 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좀 있습니다. 그게 답니다.”

한서진은 완전히 등을 돌렸다.

“돌아가세요. 다시는 이런 자리 없을 겁니다.”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한서진은 그 자리를 떴다.

불쾌함보다는 묘한 거부감이 가슴속을 스멀스멀 차지했다.

‘미친 거 아니야? 아니면 생각이 없는 건가?’

자신은 미 대통령도 함부로 못하는 인물, 헌데 어떻게 저런 말도 안 되는 태도로 나올 수 있는 걸까? 한서진은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

5선 의원이라는 사회적 인사가 어떻게 저런 의사능력을 갖고 있는지.

‘진짜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네.’

문득 지혜가 저 사람을 어떻게 관리할지 조금 궁금해졌으나, 그에 관한 관심은 금방 사라졌다.

========== 작품 후기 ==========

“사람 살려! 사람이 물에 빠졌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니 그가 고맙다고 인사하다가 흠칫 놀랍니다.

“아니, 너는 13년 전에 저잣거리에서 마주친 그 거지 아닌가! 내가 그때 굶어죽을 뻔한 네놈에게 한 냥을 적선했었지! 그런데 겨우 나를 구해주고 끝이냐! 어서 가서 강바닥에 빠진 내 십억 냥을 건져 오너라!”

“……십억 냥을 혼자서 어떻게 들고 다녀. 개황당.”

“이, 이 은혜도 모르는 후안무치한 놈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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