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342화 (342/609)

00342  진성그룹 연말 파티  =========================================================================

붉은 머리띠를 두른 시위대가 영원그룹 본사를 찾았다. 그 수는 무려 3천여 명.

느닷없는 시위에 영원그룹 관계자들은 당황했다. 영원그룹은 딱히 시위에 시달릴 만한 짓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슨 악덕 재벌도 아니고.

그러나 푯말을 보자 모든 사태가 이해되었다.

「탈모인들의 치료받을 권리를 보장하라!」

「발모제를 제모제로 승인 신청한 이유가 무엇?」

「영원그룹은 모두 풍성충만 서식하나? 그렇게 잘났어?」

「서진이 형은 자기가 풍성하다고 탈모인들의 비애를 몰라줘!」

본사 앞은 매일같이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물론이고, 매스컴을 타서 9시 뉴스로까지 보도 되었다.

“여기는 간 재생 치료제로 유명해진 제약기업 영원그룹 본사 앞입니다. 벌써 일주일째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대관절 무슨 사연으로 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목청이 터져라 외치는 걸까요? 한 번 취재해 보겠습니다.”

―평생 탈모로 고통 받다가 이제야 처음으로 희망이 생겼는데 H-2가 다모증 치료제, 제모제로 시판 승인 신청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제모제로 승인을 받으면 탈모 치료로 처방을 받을 수 없잖습니까!

―꼭 제모제여야만 했습니까? 물론 털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여성들이 많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 분들은 털을 깎을 수라도 있잖아요! 우리는 방법이 없단 말입니다!

―옮겨 심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관자놀이와 뒤통수에 모발이 남은 사람들은 그나마 모발이식이라도 기대할 수 있지, 저 같은 100% 천연 대머리는 어떡하란 말이에요? 옮겨 심으려 해도 옮겨 심을 모발이 없어요…….

그들은 투쟁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제모로 고통 받는 여성 소비자들과 싸우려는 게 아니었다.

시위대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바로 평화.

―모두가 행복해지면 안 돼요?

―발모 기능도 추가로 넣어서 신청을 해도 되잖아요.

예상치 못한 뜨거운 반응에 한서진은 얼떨떨했다.

마치 국내의 모든 탈모인들이 들고 일어난 것만 같았다. 그들은 영원그룹뿐만 아니라 설계사무소 빌딩까지 몰려와서 시위를 벌였다.

제모제 신청을 취소해달라는 요구가 아니었다. 발모 기능을 부작용이 아니라 정상 효능으로 기재해달라는 말이었다.

“우리나라에 탈모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어?”

항상 풍족했던 이는 타인의 굶주림을 알지 못한다. 한서진은 자신이 그런 입장이 되었음을 알았다.

한지혜는 표정이 심각했다.

“아무래도 우리 회사 내부에 스파이가 있는 것 같아.”

“스파이?”

“시위대가 우리 내부 움직임을 훤히 알고 대응하는 것처럼 느껴져. 그래서 탈극사인가? 그 커뮤니티를 염탐하려 했는데 가입부터 너무 높은 장벽 때문에 곤란해졌어.”

“검색 모듈을 쓰면 되잖아.”

검색 모듈.

원하는 정보는 무엇이든지 찾아내는 프로그램으로, 타르타로스 2의 탐색 기능을 태블릿을 통해 원격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한지혜와 송하나가 각각 하나씩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한지혜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써봤어. 하지만 Mr.김이 누군지 알아내지 못했어.”

“Mr.김? 뭐 하는 사람인데?”

“탈극사의 최우수 회원, 지금 이 시위의 주동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야.”

타르타로스의 검색 모듈은 전자적 정보는 무엇이든지 찾아낸다.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거나 전원이 나간 컴퓨터라 해도 예외는 없다.

지구를 덮고 있는 에테르를 통해 데이터베이스에 ‘물리적으로’ 직접 접촉해서 자료를 빼내오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해킹 툴. 물론 그 진정한 정체를 아는 것은 한서진뿐이다.

그는 가볍게 소름이 돋았다.

‘검색 모듈이 찾아내지 못했다면……!’

상대가 에테르 탐색을 막아낼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아니, 이건 말도 안 된다. 미국이라 해도 그런 기능을 보유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아예 처음부터 흔적 자체를 안 남겼어.’

탐색을 방어하는 게 아닌, 탐색할 정보 자체를 없애버리면 찾아낼 수 없다. 있는 걸 찾아내는 거지, 없는 걸 찾아낼 수는 없으니까.

“틀림없어. Mr.김은 우리 회사 내부에 있고, 탈모를 갖고 있는 게 분명해.”

“그럼 회사 내부 탈모인들을 상대로 조사하면 되겠네.”

“문제는 수가 너무 많아. 대강 확인해보니 몇 백 명은 되는 것 같아. 그걸 한 명 한 명 심층 조사를 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어. 그러는 사이에 오빠 이미지가 나빠질까 봐 걱정이야.”

“그냥 발모 기능을 부작용이 아니라 정상 효능이라고 변경해서 시판 신청하면 되겠네. 이미 임상시험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도 나왔고.”

“발모제는 나도 찬성인데, 이런 식으로 대중 압박에 밀리는 그림으로 가면 곤란할 것 같은데. 떼쓰면 들어주는구나, 하는 이미지가 생길 수도 있어.”

“그래도 불쌍하지 않냐? 타꼬야끼 수천 개가 바글거리는 거 보니 가슴이 아프더라.”

“타꼬야끼…… 알았어.”

한지혜는 숙연해져서 한 걸음 물러섰다. 타꼬야끼, 그 별거 아닌 단어에서 기묘한 애절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빠가 주도하는 식으로 해야 하는데, 끌려가는 식으로 비쳐지면 안 되는데.’

한지혜는 속으로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타꼬야끼…….

‘그러고 보니 부사장님도…….’

가발을 쓰니 사람이 달라졌다. 그러고 보니 그 분, 아직 서른줄이었지?

김범석 부사장의 훤한 정수리, 그리고 요즘 매일 쓰고 다니는 가발. 그 두 가지 대조된 모습을 떠올리니 가슴이 뭉클했다.

「영원그룹, H-2 추가 효능 신청!」

「제모제이자 발모제!」

「천만 탈모인들, 한 마음으로 기뻐해.」

경사가 터졌다.

영원그룹이 H-2의 효능을 추가해서 재신청한 것이다. 즉 두피의 모발이 증대하는 현상을 부작용이 아니라 정상적인 효능으로 인정했다.

박현준이 기자회견을 갖는 영상은 단숨에 UCC 국내 1위에 올라섰다.

“……이처럼 H-2는 두피에는 모발이 증가하는 발모 효능을, 그리고 인중 아래 표면 피부에서는 모발이 나지 않게 하는 제모 효능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H-2는 제모, 발모가 필요한 환자들을 동시에 만족시켜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수천 건이 넘는 임상시험에서 단 한 번도 잘못된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다. 나이, 성별, 체질 등을 가리지 않고 H-2는 균일한 효능을 보였다.

다른 제약회사들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성과였다. FDA는 빠른 시일 안에 승인 심사를 하겠다고 밝혔고, 탈모인들은 세상이 개변한 듯이 기뻐했다.

“영원그룹, 만세!”

“한서진 박사에게 노벨 평화상을!”

“그는 세상을 구했다!”

FDA는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재빠르게 시판 승인을 내주었고, 그 허가를 기반으로 영원그룹은 국내에서도 본격적인 판매를 시작할 수 있었다.

H-1 때보다 더욱 신속한 결정은 FDA 국장의 시원한 정수리와 맞물려 온갖 음모론을 발생시켰지만, 그리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H-2의 처방이 가능해지자 탈모 환자들은 우르르 병원을 찾았다. 초기에 환자가 몰리면 물량이 부족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자칫 하다가는 몇 달 동안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할 지도 모른다.

차라리 희망이 없었을 때에는 초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닿지 않을 것 같았던 희망, 그것이 실체로 다가오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조급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H-2 물량이 모자랍니다!”

“영원그룹에 발주 요청해!”

“안 돼요! 영원그룹도 이미 생산물량 다 동났답니다! 지금 전 세계 80개국에 동시 수출하고 있대요!”

“영원그룹 제1공장 규모가 얼마 안 돼요! 한 달에 30만 개나 생산할까 말까랍니다.”

한 달에 30만 개 될까 말까 한 물량을 한국 포함해서 80개국에 동시에 수출하고 있으니, 물량이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미국에 짓는 제2공장은 이제 막 삽을 떴을 뿐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영원그룹은 부랴부랴 제2공장 설계를 전면적으로 수정했다. 공장 규모를 원안보다 무려 30배로 늘려 잡은 것이다. 추가 부지도 확보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지금의 폭발적인 수요를 감당할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30배로 늘려 잡은 제2공장이 완공된다 하더라도, 지금 빗발치는 요구 수량의 5%나 간신히 충당할 수 있을까?

“라이센스 생산을 검토하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 공장만으로는 도저히 생산이 불가능합니다.”

영원그룹 경영진에서 그런 제안이 나왔다. 그러나 박현준 회장은 한 마디로 기각했다.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방법특허를 필수로 내야 하는데, 그럼 20년 뒤에는 누구나 만들 수 있게 됩니다.”

H시리즈는 물질특허만 낸 상태다. 제조하는 방법은 현재 비공개로 되어 있다.

마력 칩셋에 새긴 마법 주문으로 원액의 성분을 변형시키는 원리이니, 방법특허를 내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은 박현준뿐이다. 그는 칩셋의 존재를 다른 이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하고 있었다.

“기본 용액의 제조를 타회사에 수주를 주는 방향으로 물량을 충당하겠습니다.”

대책은 그렇게 결정이 났다. 공개할 수 없는 것 외의 다른 제조공정은 타회사에 돈을 주고 시키는 것으로.

H-2는 몸에 무해한 화합물에 마력 칩셋을 넣으면, 칩셋이 소멸하면서 흡수되는 에테르로 성분이 변형되어 완성된다. 물질특허가 공개되어 있어도 다른 제약회사들이 따라 만들 수 없는 이유였다.

20년 후 특허가 공개되어도 마찬가지다. 노력하면 물질적으로 똑같은 구조의 화합물을 만들 순 있겠지만, 그것은 진정한 H 시리즈가 아니다. 에테르가 흡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제약 회사들이 에테르를 검출할 수도 없으니, 그들 눈에는 똑같은 물질인데 왜 효능이 없는지 이해가 안 될 뿐이다.

H-2의 약값은 99달러로 책정되었다. 한 달 기준 복용량이다.

두 달 이상 복용을 중지하면 효능은 사라지고 원래대로 돌아가지만, 내성이 생기지 않기에 다시 복용을 시작하면 바로 효과를 볼 수 있다.

평생 먹어야 하는 약이지만 탈모 환자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적이 구현되었다는 것에 그저 기뻐했을 뿐이다.

“한 달에 99,000원이면 솔직히 엄청 싸네.”

“다달이 십 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풍성한 모발을 가질 수 있다니, 이거 너무 싼 거 아니야? 우리 서진이 형이 돈 좀 많이 벌어야 신이 나서 더 좋은 약도 뚝딱뚝딱 개발해주실 텐데.”

H-2는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간 재생 치료제인 H-1도 막대한 매출을 올리고 있지만, H-2에 비하면 새 발의 피나 다름없는 수치였다.

해가 바뀌기 전.

스웨덴에서 또 하나의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한서진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최종 선정되었다는 것이었다.

누구나 예상했던 결과였기에 큰 놀라움은 없었으나, 그래도 경사는 경사였다. 특히 한국은 평화상 외 부문의 첫 수상 아닌가.

한서진은 수상식에서 덤덤하게 상을 받고, 무난하게 수상 소감을 밝혔다.

오히려 화학상을 수상한 다른 과학자의 소감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유명세를 탔다.

“여러분, 결국 시작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한서진 박사의 얼굴을 매해 이 자리에서 보게 될 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지겨워도 끝나지 않는 광고 CF처럼 말이죠. 물론 저는 그 지겨움이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한 박사가 세상을 뒤흔들 놀라운 발견을 꾸준히 계속한다는 뜻이니까요.”

그렇게 한 해가 저물었다.

========== 작품 후기 ==========

만약 한서진이 아니라 유트롤이었다면 자기 입으로 직접 저 말을 했겠죠?

“여러분, 결국 시작됐어요. 앞으로 매해 이 자리에서 지겹게 내 얼굴을 보게 될 거임. 물론 나는 여러분들이 영원히 지겹기를 원해요.”

요렇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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