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41 진성그룹 연말 파티 =========================================================================
“한서진 박사, 오랜만입니다.”
세간에서 비운의 황태자로 일컬어지는 이용무, 그의 인사에 한서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와 마지막으로 대면한 건 송하나가 수능을 마친 그 해, H그룹 연말 행사장에서였다. 겨우 일 년 전 일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진다.
당시 한서진은 500억 불의 잭팟을 터트려, 국내 재벌 누구 앞에서도 당당할 자격을 갖췄다. 이용무도 그 점을 알기에, 그의 앞에서만큼은 불편한 심기를 감췄었다.
그러나 고작 일 년 만에, 천지는 개벽했다.
한서진은 재해 예보를 통해 미국을 구했고, 미국이 중국과의 전면전까지 불사하면서까지 지켜주고 싶은 영웅이 되었다.
에테르학의 창시자로서 드높은 권위를 쌓았으며, 에테르 워치와 신약 H시리즈로 의학에서도 빛나는 명성을 쌓았다.
미국 대통령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인물, 그것이 지금의 한서진이다.
그에 비해 이용무는 그때보다 퇴보해, 지금은 후계자에서 밀려난 그룹 부회장으로만 남았다. 심지어 100조 원의 비자금마저 사회에 환원하여 사라졌다.
일 년 만에 결코 좁힐 수 없는 까마득한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
“그렇군요, 부회장님. 반갑습니다.”
“위명은 늘 듣고 있었습니다. 참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업적이라 생각합니다.”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문득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백세완 실장과 함께 부회장님을 처음 만나던 날이 생각납니다. 벌써 오래 전 일이네요.”
“이거, 절 난처하게 만드시는군요.”
“저런, 난처한 말이었나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닙니다. 저도 백 실장이 그런 인물인 줄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가까이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백세완과 한서진 사이에 얽힌 은원은, 재계의 주요 인사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용무에게는 그 주제가 무척 불편했다. 그렇다고 감히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돌릴 순 없었다.
“저도 백 실장한테 더 묵은 유감은 없습니다. 다만 혹시라도 우연히 직접 마주치게 되면 옛날의 빡침이 다시 올라올 것 같긴 하네요.”
“옛날의?”
“아,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저도 똑같이 돌려줄 걸, 왜 한 대만 때리고 말았지 하고요. 괜히 폼 잡았다고 아쉬운 마음이 종종 듭니다.”
“이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군요.”
이용무는 어색하게 웃었다. 한서진도 심각한 건 아니었는지 가볍게 피식거렸다.
“실은 제가 한서진 박사님께 꼭 드리고픈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뭔가요?”
“과거 저에게 언짢은 게 있었다면 전부 용서해 주십사…… 꼭 한 번 진솔한 사과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글쎄요. 제가 부회장님께 쌓인 게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이용무와 몇 번 마찰을 빚을 뻔한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한서진과 이용무는 심한 격차가 나서, 마찰 자체가 일어나기 어려웠다.
재벌 2세답게 오만하고 권위적인 태도에 몇 번 심기가 불편한 적이 있었던 듯하지만, 기억의 한편에 쌓아둘 만큼 대단한 일도 아니다.
“한 박사님의 넓은 도량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꼭 한 번 직접 뵙고 말씀드려야 제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요.”
“그러신가요. 저는 신경 안 씁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제 진심을 전할 기회가 생겨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필요하신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 주십시오.”
깍듯하고, 공손했다. 마치 회사 오너로서 갓 입사한 신입사원을 맞이한 듯한 느낌이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의 일이 마치 꿈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질 정도로, 지금 이 순간이 너무 낯설다.
한서진이 악수를 청하자, 그는 공손하게 두 손으로 악수에 응했다. 아마 그의 나이가 20년 가까이 많을 텐데도.
‘달라졌구나. 이 사람도.’
뭔가 신기한 기분이었다.
진성그룹 연말파티는 성황리에 끝났다.
무엇보다 한서진이 파티에 참가한 덕분에 행사의 격이 한층 높아졌다는 평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서나는 대외적으로 한서진과의 친분을 과시했고, 덕분에 진성그룹의 주가는 소폭이지만 상승세를 그렸다.
기자들은 어떻게든 인터뷰 하나라도 따내기 위해 극성을 부렸으나, 별관은 철저히 기자들의 출입을 통제했다. 몰래 잠입한 기자들이 경호원들에 이끌려 강제 퇴장 당하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와줘서 진심으로 고마워요.”
이서나가 미소 띤 얼굴로 한서진 일행을 직접 배웅했다.
“그나저나 두 사람, 언제 결혼하나요?”
“결혼이요?”
한서진은 본능적으로 송하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으나, 희미한 부끄러움이 묻어나는 듯했다.
“저야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하고 싶죠. 하지만 하나가 아직 대학생이라…….”
“대학이 무슨 상관이에요? 서로 사이 확실하면 바로 쐐기 박는 거지, 안 그래요?”
한서진은 조금 난처했다.
송하나와 하루 빨리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사실이지만, 이런 질문을 받는 것은 왠지 쑥스럽다.
이서나가 희미하게 웃었다.
“잊지 말고 저도 꼭 초대해줘야 해요, 알았죠?”
한서진은 미미하게 끄덕였다.
H-2는 예상 밖의 이슈로 매스컴을 탔다.
제모 효과를 본 여성들의 만족스러운 후기, 그리고 중증 다모증이 말끔히 개선된 여성들의 눈물겨운 감사 인사 등이 병원 홈페이지 및 인터넷에 올라왔다.
그러나 그런 감동적인 후기는 전혀 시선을 끌지 못한 채 파묻혔다. 오죽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다모증과 제모에는 별 효과가 없나?’하고 오해할 정도다.
그만큼 무수하게 많은 ‘부작용 후기’가 인터넷 여론을 잠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H-2의 부작용은 진짜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50년 넘게 대머리로 살아오신 저희 할아버지 정수리 사진입니다. 보이시나요, 이 풍성함이?
―다른 털을 잃고, 대신 모발을 얻는다. 이런 등가교환이라면 언제나 환영이야.
―브라질리안 왁싱에 거부감이 있었는데, 막상 해보니까 이것도 꽤 괜찮고 깔끔한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거울 속 내 두상이 너무 만족스럽다.
―한서진 박사님, 이 부작용 제발 고치지 마세요! 천만 탈모인을 대표해서 이렇게 간절히 기원합니다!
끊이지 않고 속속들이 올라오는 부작용 후기, 오죽하면 어떤 언론사에서는 ‘희대의 부작용 스캔들’이라며 우스갯소리로 논평을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부작용 후기로 뒤덮이는 것을 우려했던 한지혜도, 이쯤 되면 관점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
“부작용 심하다고 욕하는 건 줄 알았는데, 이건 말투나 맥락을 보면 그게 전혀 아니네요.”
“그렇습니다, 사장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모증 치료제로 나온 신약을 어떻게 부작용 하나만 보고 임상시험에 지원할 수 있는지, 저는 잘 이해가 안 가네요.”
“사장님! 그건 탈모인들의 애절한 마음을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김범석이 평소 같지 않게 흥분해서 옹호했다. 예상치 못한 박력에 한지혜는 움찔했다. 부사장님이 요즘 들어 왜 이래?
“만약 저 부작용을 주목해서 최초로 ‘탈극사’에 올려 임상시험 지원 분위기를 조성한 사람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 뜨거운 여론은 형성되지 않았을 겁니다!”
“탈극사요?”
“탈모를 극복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사이트입니다. H-2의 부작용을 최초로 겪은 사람이 그곳이 자세한 경험담을 적어서 지금의 분위기를 만들었지요.”
“이야, 되게 잘 아시네요.”
“…….”
김범석은 순간적으로 얼굴이 벌게진 채 시선을 돌렸다. 한지혜는 갑자기 말이 끊기자 갸웃거렸다.
“부사장님, 얼굴 빨개지셨어요. 혹시 많이 더우신가 봐요? 역시 가발이…….”
“흠흠! 아무튼 탈모인들은 ‘두피’와 ‘모낭’, 그리고 ‘모발’이라는 단어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종족들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자기 머리에 심고 싶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몰랐어요.”
한지혜가 순순히 수긍하자 김범석의 표정도 조금 풀어졌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부작용이 크게 해로운 게 아닌지라 미국에서 쉽게 시판 승인을 받을 것 같아요.”
“시판 승인이요?”
순간 김범석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날카로워졌지만, 한지혜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영원그룹 회장 박현준은 근래 늘어나는 매출에 만족하고 있었다.
간 재생 치료제인 H-1은 초대박이었다. 말 그대로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생산물량이 곧 출하물량이요, 매출이었다. 재고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간암, 간경화, 만성 간염 환자에게 H-1은 필수였다. 환자들은 어설픈 치료로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깔끔하게 싱싱한 간을 새로 얻는 것을 택했다.
지난달에 1차 생산량 10만 개가 모두 소진되었고, 1조 원의 매출이 발생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 앞으로 H-1은 전 세계 의료시장 간 부문을 독점할 패왕이 되어줄 것이다.
신약 시판 승인을 이렇게 획기적으로 빨리 받을 수 있게 될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미국 정계가 합심해서 밀어주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국 공장 건설을 서둘러야 할 텐데.”
영원그룹은 근래 미국에 생산 공장을 건설하는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10년은 걸릴 신약 시판이 이렇게 초고속으로 가능해진 것은 미국이 손을 써준 덕분이다. 세계 최고 공신력을 가진 FDA의 승인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미국은 한서진에 대한 호의, 그리고 에테르학에 대한 확고한 신뢰로 법적 절차의 간소화를 마련해준 것이지만, 그래도 보답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에 제2공장을 세우려는 것이다.
이처럼 H-1만 해도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여기에 H-2라는 효녀까지 가세했다. 게다가 H-2는 H-1보다 더 성장 가능성이 컸다.
“현재까지 3,000명을 상대로 효능을 입증했습니다. 효능, 부작용 등 모두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H-2도 조만간 FDA 승인이 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제모제 시장이야말로 방대하지. 선진 국가의 모든 젊은 여성들은 H-2를 간절히 원하게 될 거야.”
H-1은 중증 간 질환자들에게만 의미가 있다. 물론 그 시장 규모도 엄청나다.
그러나 H-2가 만들어낼 시장은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좀 산다는 싶은 국가의 젊은 여성들은 H-2를 간절히 원하게 될 테니까.
“중요한 건 일회용이 아니라는 거지.”
H-2는 한 번 투여하면 끝나는 H-1과 달리,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만약 두 달 이상 복용을 중지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즉 평생 먹어야 하는 약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소비자들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약값을 설정해야 했다.
“한 달에 백, 이백 달러로만 책정해도 어마어마하게 팔릴 거야.”
박현준을 비롯한 영원그룹의 관계자들은 장밋빛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다들 들으셨습니까? H-2가 조만간 시판 승인이 날 것 같답니다.
―벌써요? 아니, 그거 임상시험 한지 얼마나 됐다고.
―미국에서 FDA 시판 승인에 특별 간소화 절차를 넣었잖습니까. 효능만 확실하다면 개발하고 몇 달 안에 시판을 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웬만한 제약회사들은 해당되지 않지만요. 그 요건이 엄청나게 빡셉니다.
―H-2가 시판한다면 우리 탈극사 회원들에게도 좋은 거 아닌가요?
―맞아요. 나 임상시험 광탈했었는데 이 소식 들으니까 치유가 된다. 적어도 몇 년씩 마음 졸이며 시판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잖아요.
H-2의 시판 승인이 임박하고,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진짜 심각한 상황을 모르시네. 지금 H-2는 다모증치료제, 제모제로 허가 신청을 넣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대로 승인이 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H-2는 당연히 의사 처방이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약이 될 거예요. 그런데 이대로 승인을 받으면, 탈모 치료를 목적으로 의사가 처방해주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H-2는 발모제가 아니라 제모제니까!
―…….
―의사한테 매달려봤자 절대로 처방 안 해줄 겁니다! 우리 천만 탈모인들의 꿈이 깨지는 겁니다!
Mr.김.
‘탈극사’의 최우수 회원이자 뛰어난 선견지명으로 유명한 그가 탈극사에 거센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일어서라, 대머리들이여!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아직은 미약하기 그지없는 태풍이.
========== 작품 후기 ==========
날아오르라, 모발이여!
ps : 작품설정에 실탄의 ㅅ이 풍성의 ㅅ이라는 인증을 올렸습니다.
더 이상의 루머 생성이 없기를 바라빈다 ㅎㅎ
인증은 최대 1시간 안으로 삭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