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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338화 (338/609)

00338  깨달음  =========================================================================

진성그룹의 방계이자, 회장 이서나의 사촌언니, 그리고 유통을 주력으로 하는 뉴월드그룹의 회장인 이재희는, 한때 한서진 일가의 당당한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정확히는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애석하게도 본인 스스로가 그것을 뻥 차 버렸지만.

그래서 범진성가 전체에서 두고두고 웃음거리로 회자되고 있는 중이다.

당시 이재희는 한지혜가 한서진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아들과의 교제를 반대했고, 그녀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모욕을 주었다.

아들 정준석이 커버하려 했지만 어머니의 단호함을 이기지는 못했고, 한지혜는 결국 이별을 선언했다.

그러나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이서나가 한서진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재희에게 사과를 강요했다. 이재희 역시 그제야 한서진이 아부다비 왕자에게 5nm공정기술의 라이센스를 주고 500억 불을 받았다는 걸 알았다.

현금 500억 불의 재력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웬만한 재벌의 역량을 넘어선다.

이재희는 둘을 갈라놓은 것이 쓰라릴 정도로 아쉬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서진과 척을 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이서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그녀는 결국 그에게 사과했다.

부서진 인간관계는 회복될 수 없지만, 일단 그렇게 무마되는 듯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사람은 어리석은 짓을 지속하는 법이다.

500억 불의 재산가를 놓친 것도 속이 쓰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SJ인더스트리의 오너라는 것 아닌가.

그는 에테르학을 창시했고, 날씨와 재해를 정확히 예측하며, 캘리포니아를 구하고 미국 명예시민이 되었다.

개인 자산만 해도 무려 수 조 달러 이상, 그런 역사적인 인물의 여동생을 매몰차게 거절했던 것이다.

속이 쓰리다 못해 뒤집어질 것 같았던 이재희는 결국 욕심을 억누르지 못했다.

자신의 아들과 한지혜가 맺어지기만 한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서나의 경고도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둘이 맺어지기만 하면 직계 가주인 이서나도 무섭지 않았으니까.

뉴월드의 기현상이라 불리는, 이유 없이 손님이 몇 시간 동안이나 전혀 찾지 않은 괴현상 이후로 백화점 매출이 나날이 하락세인 것도, 그런 욕심을 부채질하는데 한몫했다.

이재희는 한지혜에게 다시 접근하려고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뉴월드그룹이 범진성가이긴 하지만, 엄연한 독립체지. 할아버지께서 고모님에게 나눠주신 기업이니까.”

이창용의 부친은 아들에게 진성그룹을 주었고, 딸에게는 백화점 사업체를 물려주었다. 그 사업체가 지금의 뉴월드그룹이 되었고, 이재희는 그 딸(이서나에게는 고모)의 자녀이다.

진성은 뉴월드의 지분을 약간 보유하고 있고, 카드 제휴 등 협력사업을 벌이기도 하지만, 이미 두 그룹은 오래 전에 분가한 개별 그룹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직계에 피해를 끼치면 곤란해.”

이서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재희의 아들, 정준석은 입술을 살짝 다문 채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지혜 양과 너, 두 사람 이미 오래 전에 끝난 거 아니었니?”

“……끝났지요.”

“그런데 언니는 왜 그러는 거야? 너 설마, 아직 지혜 양한테 미련이 남은 거니?”

“…….”

정준석은 쉬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서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미련이야 남았지요. 저, 아직도 지혜가 그립습니다.”

“……정준석.”

“하지만 깨진 잔이잖아요. 못 붙이는 거 압니다. 여전히 그리운 건 사실이지만 오래 전에 손 놓았습니다. 이미 지혜는 저 생각도 하지 않을 거예요. 원래 그런 아이니까요.”

화사한 미모도 그렇지만, 그런 당당함에 더욱 빠져들었으니까.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손을 놓았다는 게 거짓말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이서나는 조금 풀어진 얼굴로 물었다.

“언니는 그럼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너도 이미 마음 정리를 했는데.”

“어차피 제 마음이 중요한 분이 아니시잖아요. 그랬으면 우리 사이를 반대하지도 않으셨겠죠.”

“……하긴.”

우습게도 그 말에 납득 해버리고, 이서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부모가 결정을 내리는데 자식의 마음은 중요하지 않다, 거기서 기시감을 느껴버린 것이다.

자신이 회장이 되기까지도 그러했다. 부친이 결정을 내리는데 자신의 마음, 능력은 중요하지 않았었다. 그것을 뒤집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고, 또 천운이 따라주었던가.

그러나 이서나는 곧 표정을 냉정히 했다.

“언니는 지금 욕심에 눈이 멀었어. 인정하지?”

“…….”

“나름 총기 있게 백화점 사업을 꾸려나가던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야. 아니, 사업이 흔들리고 있으니까 더 심해진 것 같아.”

뉴월드그룹은 작년, 그룹 전체적으로 1,000억 원 대의 적자를 기록했다. 뉴월드의 기현상의 여파 때문이었고, 덕분에 투자자들도 흔들리고 있었다.

“이해해. 재산만 수 조 원이 넘어가는 사람을 사돈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겠지.”

“…….”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너라도 그걸 알고, 분명히 행동했으면 해.”

“어머니는 제 말을 듣지 않으실…….”

“바로 네 그런 태도가 문제라고!”

이서나가 갑자기 테이블을 쾅 내리쳤고, 정준석은 움찔해서 입을 다물었다.

이서나는 으르렁거리듯 노려보며 말했다.

“애초에 네가 지혜 양한테서 언니를 철저히 차단했으면, 그리고 네 마음과 책임감을 무제한적으로 보여줬으면, 일이 이렇게 되지도 않았어. 너도 지혜 양이랑 결혼할 수 있었을 테고, 뉴월드와 진성도 한서진 박사를 한가족으로 맞이할 수 있었겠지.”

“…….”

“지혜 양이 왜 마음 정리했는지 알아? 언니가 극성스러워서? 시집살이 호되게 시킬까 봐? 아니야, 바로 너 때문이야. 어머니 치마폭에 감싸여서, 어머니가 물려줄 재산에 흠집 날까 봐 덜덜 떨면서 뭐 하나 제대로 못한 네가 실망스러워서 정리한 거야. 너라면, 너 같은 남자 믿고 인생 맡길 수 있겠니?”

이서나는 숨을 고르며, 몸을 소파에 깊이 묻었다.

차가운 분노가 묻어나는 시선이 오촌 조카를 서늘하게 응시했다.

“재희 언니, 네 어머니니까 네가 알아서 정리해. 다시는 지혜 양한테 껄떡거리지 않게끔, 너와 둘의 마음이 확고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시켜.”

등줄기가 서늘해질 만큼 차가운 경고가 뒤를 따랐다.

“물려받을 재산 온전히 지키고 싶음 그렇게 해. 내가 직접 나서기 전에.”

자신이 움직이면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모른다는, 분명한 경고였다.

그래도 핏줄이라고 준, 마지막 기회였다.

“이거다.”

젊은 나이에 모발 이식을 받는 환자, 자신은 머리가 벗겨졌음에도 다른 사람의 두피에 열심히 모발을 심는 의사.

그 모습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공감능력이 결핍된 사람이리라.

한서진은 주먹을 쥔 채 부르르 떨었다. 가슴이 터질 듯이 들끓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비로소 찾아낸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차라리 황홀하기까지 했다.

그는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왔다. 마침 저택에 와 있던 송하나가 반갑게 맞이했다.

“오빠, 이제 오셨어요?”

“응, 잠시만. 나 할 게 있어서.”

애정 행각도 생략한 채 한서진은 급히 보안룸 문을 열고, 작업실에 들어섰다. 그녀가 모처럼 섹시한 원피스를 입고 매끈한 다리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 같았지만, 지금은 다른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먼저 그는 건강 칼럼 등의 가벼운 정보를 검색했다.

‘원형 탈모, 남성형 탈모…… 종류도 가지가지군. 원인도 호르몬에, 유전에, 스트레스에, 식생활 습관에, 참 다양해. 그런데 정식 인정받은 발모제는 딱 두 개 밖에 없군.’

그는 계속해서 자료를 검색했다.

‘약물 치료가 효과가 없으면 결국 모발 이식으로 가는구나.’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두르고 만다.

문득 아까 들여다봤던 수술실의 모습이 떠올랐다.

‘천만 탈모 시대라니, 세상에…….’

천만 탈모인 중, 마지막 희망을 모발 이식에 기댈 수밖에 없는 가여운 사람들이 대체 몇이나 될까? 북한 난민을 제외하면, 5명 중에 한 명은 탈모라는 것 아닌가?

이렇게나 크고, 이렇게나 애절한 시장이었다. 한서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해보자.”

“저어, 오빠. 혹시 탈모 왔어요?”

“응? 아, 아니야!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조금 전부터요. 전 본 체 만 체 하시고 다짜고짜 탈모 정보만 주르륵 검색하셔서…….”

“탈모 아니야! 우리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 정수리가 풍성하셨다고!”

“……전 오빠가 대머리라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언제든 함께 터놓고 의논해요.”

“아니라니까!”

“가능한 많은 탈모 환자들을 보고 싶습니다.”

느닷없는 한서진의 요청에 한국대 의대는 떨떠름했으나, 어렵지 않게 그의 청을 들어 주었다. 한편으로는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설마 한서진 박사, 피부과를 주력으로 삼으려는 건 아니겠지?”

“그럼 안 되는데. 간 재생 치료제 같은 걸 내놓은 사람이 사람 목숨을 살리는 쪽을 택해야지, 피부과라니…….”

“피부과가 어때서! 피부과도 사람 살리는 일 한다고!”

잠시 티격태격 하기도 했지만, 곧 수그러들었다.

한서진은 탈모 환자들을 열심히 살폈다. 관련 논문이나 의학 자료도 부지런히 통찰안에 쓸어 담았다.

중증 환자 중에는 20대 초반에 머리가 훤하게 벗겨진 대머리 환자도 있었다. 약물 치료에도 불구하고 탈모 진행이 오히려 가속화된 사람이었다.

그는 모발 이식 외에는 방법이 없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을 거라고 했다. 그만큼 강력한 탈모 빔을 맞았, 아니 두피가 강력한 탈모 유전자의 지배하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치료법.’

한서진은 통찰안을 발동해서, 환자의 두피를 살폈다.

곧 그에게만 보이는 다양한 치료법이 차르륵 떠올랐다.

‘자라나라 머리머리? 이건 설마 주문 이름인가? 무슨 마법명을 이렇게 유치하게 지었대?’

어처구니없어 하던 한서진은 주문에 첨부된 설명을 보고 그제야 납득했다.

‘레노지안 최초의 발모 주문을 개발한 대마도사라니.’

이백여 년 전 개발되었다는 최초의 발모 마법. 한서진은 어쩐지 마음이 애잔해졌다.

그 노마도사는 얼마나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 마법 주문을 개발했을까?

‘그 엄청난 레노지안조차 탈모를 완전히 정복한 게 겨우 이백 년 밖에 되지 않았구나.’

에테르 문명의 정점을 이룬, 이곳 지구보다 더욱 발달한 차원임에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무수한 탈모인들이 고통을 받아야 했다니.

‘좋았어, 이걸로 해보자.’

탈모에 관한 충분한, 아니 현대의학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까지 확장된 지식을 얻었다. 여기에 발모 마법의 주문까지 획득했다.

이 둘을 적당히 융합하면 원하는 성과를 볼 수 있으리라. 간 재생 치료제 때처럼.

========== 작품 후기 ==========

차원을 달리는 모발.

너의 두피는.

털과 정수리의 행방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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