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35 2관왕 =========================================================================
“반갑습니다. 외과 박종원 교수입니다.”
한서진을 처음으로 가르치게 된 의대 교수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비교적 젊은 사람이었다.
제자와 스승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박종원은 깍듯하게 그를 대했다. 말투마다 조심스러운 기색이 묻어났다.
“비록 학문 영역은 다르지만 평소 박사님을 무척 존경해왔습니다. 이번에 개발한 H-1의 놀라운 효능에도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의학의 길을 걷겠다는 점이 놀랍긴 했지만 박사님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황제를 가르치는 스승의 태도가 이럴 것인가.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공손함을 뒤집어쓴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박사님의 현재 의학 지식의 깊이를 알고 싶습니다. 어느 정도인지 파악이 되어야 교습이 수월할…….”
“그냥 고교 졸업하고 막 의대 합격한 수준이라고 생각하시고 가르쳐 주세요.”
“네?”
한 마디로 백지 상태라 가정하라는 말, 박종원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아니, 그런 사람이 H-1은 어떻게 만들었대?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H-1은 에테르의 흐름을 적용해서 만든 의약이라, 기존 현대 의학이나 약학과는 전혀 궤를 달리합니다. 물론 제가 약간의 의학 지식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리가 되지 않아 매우 난잡한 수준입니다.”
“……허허.”
“그러니 백지 상태의 신입생이라 가정하고, 기초부터 자세히 가르쳐 주십시오.”
박종원은 난처한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사실 1대1 의사 수업 과정이라는 게 전례가 없어서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약간 고민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아무튼 의대 역사상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수업이 되겠군요.”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한서진은 의학 과외를 시작했다.
정식 의대생으로 등록한 것도 아니고, 그저 현대의학의 방대한 지식을 빨아들일 뿐이다. 실습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참관은 어렵지 않다.
1대1 특별 교습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박종원은 강의 방식을 독특한 컨셉으로 잡았다. 강의의 목적이 한서진에게 지식을 단숨에 ‘주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서진은 그가 준비한 교재, 프린트, 그리고 보드 필기 등을 통찰안으로 꿰뚫어보며, 그 안에 담긴 현대 의학의 정수를 속속들이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외과 서종찬 교수입니다. 반갑습니다.”
“최현 교수입니다.”
“오늘 참관하실 수술을 집도할 소현진 교수입니다.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일 년에 등록금으로 500억 원이나 내는 학생이다. 게다가 이미 한 분야에서 세계적인 대가를 이룬 사람, 교수들은 그를 평범한 제자처럼 대하지 않고 깍듯하게 여겼다.
이론 수업, 참관 수업 등을 거치며, 통찰안은 잠시도 쉬지 않고 발동했다. 그 안에 담긴 현대의학의 정수를 꿰뚫어보며 한서진의 두뇌에 저장했다.
강화된 통찰안은 단지 진리를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이해력을 극도로 높여 주었고, 그렇게 투시한 지식을 그의 뇌에 차곡차곡 쌓았다.
한서진은 이론 수업이나 실습 참관이 없을 때에도 쉬지 않았다. 교수들이 추천한 교재나 논문 등을 읽으며, 통찰안을 가혹하게 밀어붙였다.
‘어떠냐, 통찰안. 비명 지르고 싶지?’
반도체에 이어 의학마저 정복하기 위한 통찰안의 두 번째 걸음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다.
H-1은 차곡차곡 임상시험 데이터를 쌓아 나갔다.
공식적으로는 Ⅰ상 단계지만, 실제로는 Ⅲ상 단계를 밟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손을 쓸 수 없는 간 질환 말기 환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시험 투여되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터라, 임상시험이 어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위중한 환자들이 앞을 다투어 시험 참가 신청을 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무려 1,530명의 간암 환자들이 새 인생을 찾았다. 완치 판정을 받은 이후에도 건강 상태를 추적하는 작업이 남았지만, 정밀 검사에서는 아무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재생된 간은 에너지와 열정이 넘쳤고, 충실하게 자기 일을 해내고 있었다. 완치된 환자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미 의회, H-1을 위해 움직인다!
―존 캐롤 상원의원, 더 이상 고통 받는 환자들의 요청을 외면할 수 없다고 밝혀.
―옳은 목적을 위한 예외라면, 당연히 환영할 것.
지켜보고 있던 미국이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래 의약품, 특히 신약은 오랜 시간을 두고 엄격하게 관리하며 허가를 내줘야 한다. 환자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 절차는 무너질 수 없다.
그러나 H-1은 그런 절차를 비웃기라도 하듯, 말기 환자들을 대상으로 착실하게 효능을 입증하고 있었다. 그 어떤 부작용도, 실패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미 1,500명이 넘는 말기 환자들이 완치되었는데, 그리고 아무 부작용이나 실패가 없는데, 절차만을 고집하여 환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미 하원, 의약 판매 허가 특별법안 발의!
―에테르 제약 허가와 승인의 쾌속성을 노린 포석?
―H-1을 손꼽아 기다리는 환자들, 늦어도 몇 달 안에는 약을 살 수 있을 것.
한국 간 환자들은 태평양 건너에서 속속들이 들어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뻐했다.
미국에서 정식 시판을 승인받는다면, 한국의 승인 절차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국내 시장 시판도 손쉽게 이뤄질 것이다.
정식 시판 승인이 난다면, 영원그룹도 생산에 박차를 가할 테니, 지금처럼 1,000 대 1 이상의 경쟁률에서 허덕이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장밋빛 미래를 꿈꿨고, 하원은 마침내 특별 법안을 통과시켰다.
특별 법안은 의약품 시판에 관해서 이것저것 새로운 제한을 언급하고 있지만, 한 마디로 일축하자면 H-1을 위한 제약들이었다.
다른 제약회사들은 그 조건을 절대로 충족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항의를 할 수도 없었다.
―2,500 건 이상의 필요대상군 환자를 상대로 한 임상시험에서 효능이 분명히 입증될 것.
―다음 각 호에서 언급하는 종류의 부작용이 없을 것.
―기타 제반적인 사항을 충족해야…….
특별 법안이 언급하는 절차는 살벌한 수준이었다. 일반적인 신약은 도저히 충족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이것들을 모두 충족한다면 승인에 걸리는 시일을 획기적으로 단축해주겠다는 것이, 바로 특별 법안의 핵심 취지였다.
“신약을 기다리며 신음하는 환자들을 위한 의회의 과감한 결단에 환영합니다.”
클레튼 대통령은 직접 지지 발언을 했고, 법안이 효력을 발휘함에 따라 FDA는 즉시 H-1의 시판을 승인했다.
“우리 미 식품의약국은 엄격하고 신중하게 H-1의 시판승인 결정을 내렸음을 밝힙니다.”
FDA국장이 예외적으로 기자회견을 통해 시판승인 의사결정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낱낱이 밝혔고, H-1는 드디어 정식 판매의 길이 열렸다.
이제 남은 것은 H-1의 가격이 얼마로 결정되느냐. 세계의 시선이 한국, 영원그룹으로 쏠렸다.
국제적으로 뜨거운 관심에 영원그룹 박현준 회장은 직접 기자회견을 열고, H-1의 판매계획에 관해 밝혔다.
“H-1은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개발된 신약입니다. 우리 영원그룹은 제약연구 및 판매유통을 하는 영리기업으로, 이윤창출이라는 기업 본위의 목적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도리를 못 본 체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그룹은 이 순간에도 수많은 간 질환 환자들이 고통 받고 있음을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기자들은 쉴 새 없이 플래시를 터트리며, 바짝 긴장한 채 박현준의 이어질 말에 주목했다.
“H-1의 가격은 달러 기준으로 3만 불에 책정될 것입니다.”
그 순간 기자들의 입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한꺼번에 힘 빠진 탄성이 터져 나왔다.
3만 불이면 원화로 3,000만 원. 결코 싼 가격은 아니다. 가난한 환자들은 엄두도 내기 힘든 가격이다.
그러나 H-1은 1회 투여로 실질적인 치료가 끝난다는 장점이 있다. 입원과 추이 관찰 등에 들어가는 비용을 제외하면, 더 이상의 치료비가 들지 않는 것이다.
통상 간암 환자들은 치료비에 수천만 원에서 억대 이상의 비용을 지출한다. 그렇게 돈을 쏟아 붓고도 회생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에 비해 단돈 3,000만 원으로 망가진 간을 버리고 새 간을 얻을 수 있다면, 파격적인 가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환자들이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단돈 몇 십 만 원에도 허덕이는 가난한 환자들의 눈에는 절망스러운 가격이다. 그들은 객관적으로 H-1의 가격이 저렴하게 책정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영원그룹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이 가격은 H-1의 효능, 그리고 간암 치료에 드는 비용에 비교하면 매우 저렴하게 책정된 것이지만, 가난한 환자들에게는 일시불로 3,000만 원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 절망의 벽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
“그래서 우리 그룹은 H-1을 살 형편이 되지 않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연간 일정량의 물량을 90% 가까이 할인된 가격으로 제공할 계획입니다. 물론 이에 관련된 권리나 자격은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습니다.”
“그 물량은 어느 정도로 잡고 있습니까?”
“일단 잠정적으로 생산량의 30% 정도를 잡고 있습니다. 물론 이 수치는 유동적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와 별개로, H컨설턴트에서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을 위해 H-1을 지원해준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습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그 이상의 물량이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배정될 것입니다.”
기자들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조치였다. 약값이 비싸다는 항의는 더 이상 나오지 못할 것이다.
객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다, 가난한 환자들을 이만큼이나 배려해줬으니. 영원그룹은 다른 말이 나오지 않도록 초장부터 단단히 못을 박은 것이다.
세계 간 질환 시장을 독점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중증 간 질환 환자들은 이제 H-1을 간절히 원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한서진이 H-1을 통해 벌어들일 돈이 얼마나 될까?
이미 반도체를 통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금자탑을 쌓았는데, 이제 또 다른 금자탑이 새로이 세워지려 하고 있었다.
다행히 약값에 대한 환자들의 반발은 관계자들이 우려했던 것처럼 그리 크지 않았다.
오히려 국내 반응은 고요하다 싶을 만큼 조용했다.
가난한 환자들은 3,000만 원이라는 고가에 경악했지만, 통상 암 치료에 몇 천, 몇 억이 드는 것을 생각해서 이해했다.
“3,000만 원만 내면 간암이 완치되는데, 충분히 싼 가격이지.”
“거기다가 가난한 환자들은 따로 지원까지 해준다잖아.”
“영원그룹이 무슨 자선단체도 아니고 엄연한 영리제약기업인데, 이 정도만 해도 사회적 책임은 다했다고 본다.”
영원그룹, 나아가서 한서진을 향한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되었다.
“난 그저 신약을 개발해줘서 고맙다고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야.”
“진짜, 개발해준 것만 해도 어디야. 애초에 자기 분야도 아니었다는데.”
물론 모두가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일부 한서진 비판론자들은 약값이 터무니없다느니, 그렇게 부자이면서 돈을 갈퀴로 쓸어 담으려 한다느니, 하면서 온갖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약 하나에 무슨 3,000만 원이 말이 되냐? 한서진은 진짜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다!”
“양키 고 홈! 왜 흰둥이가 우리나라에서 끼끼거리고 있냐!”
물론 그런 이들은 H컨설턴트가 차곡차곡 명단을 입수해서 리스트에 올리고 있었다. 그들은 앞으로 한서진으로부터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할 것이다.
“부사장님, 근데 설마 H-1 판매도 거절되는 건가요? 그랬다가는 반발이 장난 아닐 것 같은데.”
“그거야 대표님께서 결정하시겠지. 하지만 내 심정 같아서는 죽게 놔뒀으면 싶어.”
김범석은 번쩍거리는 두피를 긁적이며, 오늘도 추가된 블랙리스트를 확인했다. 그는 새로 합류한 이들의 신상을 한심하다는 듯이 확인했다.
직원이 투덜거렸다.
“이놈들은 박사님께서 자기들한테 피해준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박사님 욕을 하지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어요.”
“못난 애들이 못난 짓 하는 거야. 뭐가 이상해?”
“듣고 보니 그렇네요.”
========== 작품 후기 ==========
리미트리스 드림에서는 통찰안이 한서진을 발동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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