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31 2관왕 =========================================================================
―아빠가 계속 악화되고 있어요. 도와주시면 안 돼요?
어설픈 정중함과 예의 속에 담겨 있는 간절함이 느껴졌다. 송하나가 그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누구예요, 오빠?”
“전에 나 찾아왔었던 김찬이라는 꼬마애 있잖아.”
“아, 오빠랑 번호 교환했던. 그 애가 왜요?”
“부친 증세가 많이 악화됐나 봐.”
“어머, 저런.”
송하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신효진도 안색이 살짝 어두워지며 감정에 동조했다.
“그 소방관 분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가요?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봐요?”
“화재 진압하면서 중상을 입었다고는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는 모르겠어.”
사실 입원 치료 중이라는 것만 알지, 그 외는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다.
한서진이 바로 김찬에게 연락을 하려 하자, 송하나가 만류했다.
“오빠, 일단 알아보고 나서 연락하는 게 어때요?”
“알아보고 나서?”
“만약 도와주기로 결정한다면 어떻게 할지 대강이라도 계획을 세우고 연락을 해야죠. 괜히 나중에 말을 바꾸게 되면 김찬이라는 아이, 많이 실망할 거예요. 오빠 이미지에도 별로 좋지 않아요.”
“그렇네.”
“제가 지혜 언니한테 부탁드릴게요. 그쪽은 어차피 H컨설턴트에서 담당하고 있으니까요.”
한서진은 마음이 조금 든든해졌다.
친동생은 평판 관리, 약혼녀는 자금 관리. 자신은 그저 연구에 집중하고 느긋하게 여가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
친구가 전혀 없다는 게 아쉽지만, 이 정도만 해도 넘치는 축복을 받은 삶이다. 여기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까지 바란다는 것은, 아무래도 과욕이겠지?
“김찬이라는 아이 부친 그분, 상태가 위중해.”
한지혜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 한서진도 덩달아 진중해졌다. 공기 흐름이 저절로 무거워졌다.
“위중? 그 정도야?”
“불붙은 자재더미에 덮치면서 복부를 심하게 다쳤나 봐. 갈비뼈 부러지고 장기 손상도 좀 입고. 그런데 다른 건 그나마 소소한 편인데 간 손상이 심각하대.”
“간 손상?”
“간 파열이 너무 심각해서 답이 없나 봐. 의료진한테 슬쩍 확인했는데,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만큼 위중한 상태래. 기적 외에는 답이 없다고.”
한지혜는 안 됐지만 어쩔 수 없다는 태도였다.
“병원비 지원이나 좋은 교수를 알아봐주는 그런 거라면 차라리 도울 여지가 있겠는데, 이건 어쩔 수 없어. 우리가 의사는 아니잖아.”
“…….”
한서진은 손수 제작한 피켓까지 들고, 지방에서 서울까지 홀로 올라온 김찬을 떠올렸다.
단순히 피해자들을 도와달라는 요구가 아니라, 더는 그런 피해가 없도록 칩셋 3를 국내에도 많이 풀어달라는 기특함. 그건 시위가 아니라 부탁이자, 애원이었다.
그래서 한서진은 김찬의 존재가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번호까지 교환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아이의 부친이 생사가 불분명할 만큼 위중한 상태, 그것도 타인을 구하려는 소망을 완수하려다가 당한 부상이다.
자신은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자신의 책임이 아님에도 그 고결함에 심적 채무 의식을 느낀다.
“어디 부탁할 만한 데는 마땅치 않고, 그렇다고 아빠 죽어 가는데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서 오빠한테까지 연락했나 보네.”
“…….”
“다행히 병원비는 별로 안 밀렸나 봐. 근무 중에 당한 부상이라서.”
“……그렇구나.”
“오빠가 직접 연락을 하는 건 삼갔으면 좋겠어. 그 아이가 순수하고 인성이 좋은 건 알지만, 그래도 사적으로 접촉해서 잘해줘서 좋을 게 없어. 다른 사람들도 어떻게든 오빠와 직통 연결하려고 안달 낼 테고, 추가 지원 같은 건 H컨설턴트를 통해서 진행해도 충분하니까…….”
한지혜의 말은 더 이상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엘릭서라는 세 글자만이 또렷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영원그룹 회장 박현준은 본래 진성제약에서 한서진과 맺은 인연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몇 년 전, 엘릭서의 재료인 화학혼합물을 제조해달라는 한서진의 부탁을 받아들인 것이,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그를 이 자리까지 이끌어 주었다.
막대한 투자금을 지원받는 영원그룹은 제약 및 의학 발전에 관한 연구개발이 주업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능한 연구원들이 잠을 쪼개가며 신약 개발에 매달린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설립 목적일 뿐, 실제로 영원그룹의 목적은 엘릭서 재료를 안전하고 비밀스럽게 조달하는 것에 있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은 그룹 내에서도 박현준뿐이다. 또한 그는 자신이 은밀히 확보하는 화학혼합물이 어디에 쓰이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알려고 들지도 않는다.
위험한 호기심, 그것은 수천 명의 직원을 거느린 지금의 그룹 회장직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박사님, 찾으셨습니까.”
한서진의 호출을 받고 달려온 그는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네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의 총수이지만, 한서진 앞에서는 그저 샐러리맨일 뿐이다.
“다름이 아니라 혹시 김찬이라는 학생, 들어보셨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렇게 기사에 크게 났는데 제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한서진의 측근으로서, 그에 관련된 큰 기사 같은 것은 당연히 놓치지 않고 찾아본다. 박현준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 아이 부친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더군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영원그룹을 통하는 게 적당할 것 같아서요.”
“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저희 그룹이 나서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겠습니다.”
“부탁합니다.”
박현준은 깍듯이 대답하고 돌아갔다.
혼자 남은 한서진은 생각을 정리했다. 엘릭서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직접 찾아가는 것은 너무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다른 이를 믿고 맡길 수도 없다.
현재까지 엘릭서의 비밀을 털어놓은 것은 백철중뿐이니.
‘그때처럼 수액에 조금 섞는 정도로는 안 될 거야.’
상태가 위중한 것으로 볼 때 정량을 복용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서진은 어떡하면 안전하게 할 수 있을지 방법을 생각했다.
그때였다.
「대표님, 페이 차일드 씨가 찾아오셨습니다.」
“페이 씨가? 들어오라고 해요.”
잠시 후 CIA 화이트 요원, 페이 차일드가 대표실로 들어왔다. 한서진을 상대로 자잘한 교섭 창구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갑작스레 찾아와서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박사님.”
“아닙니다. 어서 오세요.”
가벼운 일상 이야기로 페이 차일드는 대화를 시작했지만, 한서진은 좋지 않은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오늘 영원그룹 박현준 회장을 호출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만, 그런데요?”
좋지 않은 예감은 더욱 짙어졌다. 하필 영원그룹을 언급한 게 의미심장했다.
페이 차일드는 평소보다 몇 배 이상으로 조심스러워 하고 있는 태도였다. 무슨 어려운 말을 하기 위해서인지 짐작이 안 갔다.
“현재 미국에 등록된 장기기증 대상자 정보, 그리고 교류 관계인 타 선진국의 정보까지 무차별로 체크해서 이식에 적합한 간 보유자를 찾고 있습니다.”
“……네?”
“미국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적합 대상자를 찾아내겠습니다. 그러니 지금 박사님께서 생각하신 계획은 중지해주시기 바랍니다.”
“…….”
한서진의 표정은 놀랄 만큼 차분해졌다.
페이 차일드의 말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알 것 같았기에, 안색이 저절로 굳어졌다. 페이 차일드는 그런 반응이 송구했는지 더욱 고개를 숙였다.
“북한에서 에테르 스톰에 피폭된 이들을 치유하는데 박사님과 백철중 회장님께서 개입하신 점,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외에도 냄새를 맡은 이들이 있다는 겁니다.”
“…….”
“그들은 아직 확신을 하지 못한 상태지만,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결국에는 확신하게 될 겁니다. 미국이 최선을 다해 막아내고 있지만, 의심의 눈을 완벽히 가린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잠깐만요. 미국은, 혹시…….”
“정확한 명칭은 알지 못합니다만, 박사님께서 기적의 신약을 개발해서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어떤 연유에서 그것을 숨기고 있는지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
미국이 엘릭서의 존재를 알고 있다.
한서진은 순간 짜릿한 전류가 온몸을 흘렀으나, 이내 어렵지 않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래, 미국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오히려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한서진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들은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박사님을 탐내는 다른 나라들의 정보기관들을 말합니다. 특히 러시아와 일본이 박사님한테 호시탐탐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
“일본은 어차피 미국의 그늘 아래 있으니 군침만 흘릴 뿐, 선을 넘는 행위는 하지 못합니다. 기껏해야 협상에서 유리한 이익을 얻기 위한 교섭 재료 정도로 쓰겠지요. 하지만 러시아는 다릅니다.”
“러시아…….”
“중국이 무너진 지금, 러시아는 우리 미국도 함부로 여길 수 없는 위험한 존재입니다. 기적의 신약이 알려지면 러시아 수뇌부가 어떤 마음을 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 신약이 어떤 효능이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까?”
“말기 췌장암을 단기간에 말끔히 치유하고, 뇌출혈로 영구적인 뇌 손상을 입은 노인을 완벽히 치유할 수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그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 엘릭서의 대단한 가치를 숭배하기에는.
페이 차일드는 조금 단호하게 말했다.
“그 아이의 부친은 어차피 회장님에게 남입니다. 그런 이에게 비밀스러운 신약을 투여하는 것은, 욕심 있는 타국 정치인들에게 기대를 주는 행위가 됩니다. 아예 본격적으로 제공한다면 모를까, 아니라면 여지를 주지 마십시오.”
“…….”
“박사님,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정보부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송하나 양이 위험에 처하시는 건 박사님도 바라지 않으실 겁니다.”
한서진은 한참이나 아무 말이 없다가, 천천히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페이 차일드의 안색이 꽤 밝아졌다.
한서진이 다시 말했다.
“제가 너무 안일했던 것 같습니다. 경각심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로서도 다소 어려운 말이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자칫 박사님께서 오해를 하시면 미 정부의 입장도 매우 난처해지기 때문에…….”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해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친교의 뜻을 제게 전한다는 미국의 진심을 믿고 있습니다.”
페이 차일드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분위기가 더없이 훈훈해졌다.
“그럼 수고스럽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저도 마음이 쓰여서요. 외면하기가 힘드네요.”
“반드시라고 장담은 드릴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따로 방법을 찾아볼까 합니다. 아아,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비밀스럽고 위험한 길은 걷지 않을 테니까요.”
마지막 말에 페이 차일드는 조금 우려를 보였으나 곧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혼자 남은 한서진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두 손을 키보드 위로 올렸다. 저택에 있는 타르타로스 2에 접속해서 명령을 입력했다.
잠시 후 모니터에 타르타로스가 찾아낸 자료가 나타났다. 김찬의 부친이 입원한 병원을 조사해서 찾아낸, 환자 차트 및 각종 기록이었다.
“치료법.”
한서진은 작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집중했다.
그 순간 무수하게 많은 정보가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통찰안이 보여주는, 해당 환자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들이었다.
신성력을 이용한 치유, 마력을 이용한 자가회복 증대, 고급 치유 주문, 귀한 약초를 이용한 치료법, 마력이 모이는 지점에서의 요양을 통한 치유 능력 증폭…….
그가 이해할 수 없거나, 혹은 실행이 불가능한 무수한 방법들이 떠올랐다. 현대 의학으로는 간 이식 외 손을 쓸 수 없다 했는데, 레노지안에는 이렇게나 다양한 방법들이 있는 것이다.
그는 통찰안이 보여주는 방법을 빠르게 읽어가며 넘겼다.
어느 순간 그의 눈동자가 멈칫했다.
「마력 명령어의 자극으로 성체줄기세포를 원초적으로 통제한 장기 복원 시술. 2급 마법진 구축 능력 필요.」
2급이면 1급 바로 아래? 그렇다면 대단한 고급 의학 기술이 아닌가?
한서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거다.”
========== 작품 후기 ==========
“1급이 최하위고 2급이 그 바로 위이거늘…….”
왕은 오늘도 답답함에 할 말을 잃습니다.
저주는 차곡차곡 완성되어 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