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30 친구 사이 =========================================================================
땀에 살짝 젖은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늘씬한 두 다리가 힘차게 뛰어가고, 가느다란 팔이 길게 뻗으며 라켓을 힘차게 휘두른다.
공이 빠르게 튀어 올라 네트를 넘어갔지만, 아쉽게도 선 밖을 벗어나고 말았다.
그걸 보고 신효진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송하나는 공을 쫓아가지 않고 그대로 선 채 씩 웃었다.
“아웃, 제 승리네요.”
“하아, 하아…… 팔에 힘이 빠져서 잘못 쳐냈어요.”
“그래도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많이 늘었어요. 역시 운동신경이 참 대단해요.”
신효진은 주저앉은 채 가쁘게 숨을 쉬었다.
자신에게 운동신경이 있었던가? 옛날 기억을 떠올려보면 별로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어렴풋한 중고교 시절, 체육수업은 그녀에게 별로 즐거운 시간이 아니었다. 빈말로라도 운동을 잘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스포츠에 만능인 송하나와 비등비등하게 테니스를 치는 걸 보고, 신효진도 느껴지는 게 있었다. 지금 자신의 운동신경은 본래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고.
‘스칼린…….’
그녀는 속으로 그 이름을 뇌까렸다.
꿈속의 자신,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여자.
무가의 후계자이자 여기사인 그녀는 발군의 운동신경을 갖고 있었다. 아니, 단순히 운동신경이 뛰어나다기보다는 인간이 아니라고 해야 올바를 것이다.
비약적으로 늘어난 자신의 운동신경은, 어쩌면 스칼린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만약 꿈이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면…….’
픽 웃음이 터졌다.
겨우 운동신경이 조금 좋아진 것을 가지고 이런 상상을 하는 것도 우습다. 하지만 신효진은 중독된 것처럼 그런 상상을 끊을 수가 없었다.
‘혹시 박사님도?’
퍼뜩 묘한 상상이 스쳤다.
어쩌면 그는 꿈에서 신비한 무언가를 얻지 않았을까? 군주 아서가 지닌 무력이나 권능은 전능에 가깝다. 만약 그 부스러기 하나라도 얻을 수 있다면?
‘지적 능력 향상이라도 되신 건 아닐까?’
가벼운 실소가 나왔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럴 듯하다는 게 우스웠다.
지금 한서진은 불세출의 천재로 알려져 있지만, 본래는 평범한 반도체 생산직원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놀라운 천재성을 드러내며 반도체의 거장이 되었다.
만약 거기에 군주 아서의 권능이 조금이라도 연결이 되어 있다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그것도 혼자 웃으면서. 재밌는 거면 나한테도 말해줘요.”
“아, 별 거 아니에요. 그냥 잠깐 엉뚱한 생각이 나서요.”
“엉뚱한 생각이라면, 어떤?”
송하나가 맞은편에 쪼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이렇게 서로 퍼질러 앉아 마주보고 있으니, 어려서부터 친했던 친구 사이 같다는 착각마저 솟는다.
‘어떡해. 내가 망상이 너무 지나쳐. 테니스 좀 잘 쳐지는 거 가지고 이런 생각이나 하다니.’
진실에 닿을 수 있는 상상을, 그녀는 그렇게 우스운 망상으로 치부해 버렸다.
“땀도 많이 흘렸는데, 우리 수영이나 하러 갈까요?”
“수영이요? 저 수영은 잘 못하는데…… 한 번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어요.”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아요? 너무 걱정 마요. 그 운동신경이면 금방 배울 거예요.”
“자신 없는데…….”
말은 흐리면서도 신효진은 묘한 기대감이 들었다.
자신의 수영 실력이 어떨지도 궁금했지만, 그보다는 옷 아래 감춰진 송하나의 몸매가 어떨지 호기심이 들었다.
이상한 마음이 아니라, 같은 여자로서 부럽기 그지없는 그녀의 몸매를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다. 스타에게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동경하게 되는 심리, 뭐 그런 것이다.
그때였다.
“하나야, 여기 있었…… 효진 씨?”
한서진은 의외의 조합에 살짝 의아했다. 송하나를 만나러 왔는데 신효진도 함께 있다니.
안 그래도 신효진을 비서로 거둬들인 것 때문에 은근 눈치가 보였는데, 이렇게 셋이서 딱 마주칠 줄이야.
송하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반겼다.
“아, 오빠. 우리 같이 테니스 치고 있었어요.”
“테니스? 효진 씨가 테니스도 쳐?”
“처음 배웠대요. 근데 엄청 잘 쳐요. 운동신경이 정말 예사롭지 않아요.”
그 말에 한서진의 표정이 묘하게 일렁거리는 것을, 신효진은 짧은 순간에도 놓치지 않았다. 기묘한 예감이 스치며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빠르게 이어지는 대화에 의식할 틈이 없었다.
“우리 이제 수영하러 갈 건데……혹시 오빠도 같이 가실래요?”
“수영?”
“네, 땀 흘렸으니 시원하게 물놀이 좀 하려고요. 겸사겸사 효진 씨도 수영 배우고 싶대요.”
한서진은 조금 당황해서 신효진과 눈이 마주쳤다. 예상치 않은 전개에 그녀도 살짝 흔들리는 듯이 보였다.
공개 수영장이긴 하지만 수영복 차림으로 마주치다니. 뭔가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분이 묘하다.
“효진 씨가 난처해하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영은 조금…….”
“……저는 괜찮아요.”
신효진이 조그맣게 내뱉은 말에 한서진은 멈칫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주눅 들지 않고 말을 이었다.
“셋이 같이 하면 오히려 재밌을 것 같아요.”
“그래요. 사장, 비서라고 같이 수영장 못 갈 건 뭐예요? 효진 씨랑 저랑 친군데.”
친구 사이? 둘이 어느새 그런 사이가 되었지?
한서진은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으나, 어느새 송하나가 먼저 나서서 이끌었다. 그녀는 몹시 즐거운 듯이 보였다.
실내 수영 센터에서 수영복을 대여하고, 각자 탈의실에서 갈아입고 나왔다.
한서진은 약혼녀의 늘씬하면서도 볼륨감 넘치는 검은 원피스 수영복 차림을 보고 속으로 감탄했다. 내 여자지만, 언제 봐도 흐뭇하다.
화려한 미모 앞에 굴복한다는 것은, 그 상대가 내 여자라면 참으로 짜릿한 쾌감을 준다.
한서진은 신효진에게도 무심코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탄성을 지를 뻔했다.
“수, 수영복이 뭔가 어색해요.”
“아니에요. 아주 잘 어울려요.”
부끄러워하는 그녀에게 송하나가 기분 좋게 칭찬했다. 그녀는 수줍은 얼굴을 들어 한서진의 눈치를 살폈다.
송하나의 칭찬은 과언이 아니었다.
단조로운 하늘색 원피스였지만, 시원하게 쭉 뻗은 슬림한 몸매를 자랑하듯 선보인다.
송하나보다는 조금 키가 작지만, 그녀 역시 160 후반의 큰 키였고, 특히 얇은 다리와 전체적으로 잘 어울리는 가냘픈 느낌이 남자의 시각을 자극했다.
늘씬하면서도 볼륨감 넘치는 서구적인 라인의 송하나, 그리고 날렵하고 가늘게 뻗은 모델 핏의 신효진. 송하나가 화려한 미인이라면 신효진은 청초한 미인이었다.
썬베드에 누워, 송하나가 신효진에게 수영을 가르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서진은 흐뭇한 시간을 보냈다.
“둘이 언제부터 친구하기로 했어?”
“정식으로 말한 건 얼마 안 됐지만, 원래 친했어요. H백화점 모델도 제가 주선한 거잖아요.”
“하긴, 효진 씨가 그거 덕분에 돈 많이 벌었다고 너한테 고마워하고 있더라.”
“그러게요. 이제 모델 일을 못하게 됐으니 어떡해요? 오빠가 월급이라도 많이 챙겨주세요.”
둘은 수영을 마치고 라운지 카페에서 잠시 티타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신효진은 잠깐 손을 씻으러 자리를 비운 상태, 송하나가 웃으며 덧붙였다.
“제가 직접 챙겨주기에는 이제 좀 뭐하잖아요. 친구 사이에.”
“친구라…… 난 둘이 그런 사이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저, 신효진 씨 같은 사람 좋아해요. 여리긴 하지만 지나친 욕심 없고, 품성도 바른. 가정환경이 그렇게 어려웠는데도 비뚤어지지 않게 잘 자랐잖아요.”
턱을 살짝 괸 채 지그시 주시하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제가 재벌 딸인 거 알고 실망스럽게 변한 친구들도 많은데, 효진 씨는 그런 것도 없구요.”
“그거야 원래부터 네가 누군지 알아서 그런 거 아냐?”
“그런 뜻이 아닌데. 아무튼 효진 씨 참 바른 사람 같아요. 오빠나 지혜 언니처럼.”
그녀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긴, 그녀는 거의 그랬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 외에는 무슨 생각을 품는지 종종 이해하기 어려웠다.
‘회장님 쓰러졌을 때가 그나마 소녀 같았지.’
신효진과 친구 맺기로 한 것은 여전히 의아하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다. 둘 사이가 어색하지 않을수록 신효진을 옆에 두고 있기 수월할 테니. 눈치도 덜 봐도 되고.
마음에 여유가 생긴 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너, 근데 괜찮아?”
“뭐가요?”
“효진 씨 솔직히 미인인데 안 불안해? 질투도 별로 안 하는 것 같다?”
“미인인 건 인정하시나 봐요.”
“아, 아니. 내 말은 그런 게 아니고…….”
“걱정마요. 질투 안 해요.”
송하나는 밝게 웃으며 덧붙였다.
“친구 사이에 무슨 질투, 걱정을 해요. 안 그래요?”
“…….”
뭐지, 이 묘한 압박감은?
분명 생글생글 웃고 있는데, 표정에도 전혀 이상한 점이 없는데, 알 수 없는 기운이 오싹하게 어깨를 휘감는다.
그때 신효진이 돌아와서 빈자리에 앉았다.
“너무 일찍 왔죠? 미안해요. 좀 더 눈치껏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데 너무 목이 말라서…….”
“괜찮아요. 데이트는 나중에 따로 하면 되니까.”
신효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큰 눈동자로 선망을 담고 바라보자, 한서진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까 보았던 그녀의 원피스 수영복 차림이 생각나자 괜히 뺨이 뜨거워졌다.
“오빠, 효진 씨는 제 친구니까 비서라도 너무 막 대하지 말고 잘해줘요. 알았죠?”
“걱정하지 마. 비서가 아니라 네 친구 대하듯이 모실게.”
“효진 씨, 들었죠? 오빠가 오너랍시고 함부로 하면 언제든지 저한테 연락해요.”
“……고맙습니다. 하, 하지만 박사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에요. 저한테 얼마나 큰 은인이신데요.”
“그럼 잘 됐고요.”
송하나가 방글방글 웃었고, 신효진도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도란도란 잡담을 나눴다.
조금 어색한 듯하면서도 편안해 보이는 분위기, 한서진은 문득 씁쓸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난 친구가 하나도 없구나.’
오랫동안 이어진, 가난하고 팍팍한 삶은 친구를 사귀거나 유지할 여유가 닳아 없어지게 만들었다. 그나마 얼마 안 되던 친구들도 이제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통찰안 덕분에 얻은 지금의 사회적 지위는, 가끔 그런 고독감을 느끼게 한다. 물론 그 이상으로 즐거운 인연과 시간이 넘쳐나지만.
그는 흘끔 신효진을 바라보았다. 송하나와 잡담을 나누는데 푹 빠진 그녀는 자신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뭐가 저리 즐거울까.
문득 그는 신효진이 남자였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다. 편안한 친구 사이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레노지안이라는 꿈을 공유하는 유일한 상대이니.
친구가 전혀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며 씁쓸히 웃음 짓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뭐지?”
뜻밖에도 발신인은 김찬이었다. 얼마 전에 회사 빌딩 앞까지 찾아왔던.
문자 내용은 어설프게 정중하지만 그래서 더 풋풋함이 묻어나는 글귀로 부탁을 전하고 있었다.
―아빠가 계속 악화되고 있어요. 도와주시면 안 돼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박사님.
========== 작품 후기 ==========
―난 친구가 하나도 없구나…….
“전용기 준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