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27 친구 사이 =========================================================================
‘또 실패네.’
주모니터를 들여다보던 한서진은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치직거리는 잡음과 백색 노이즈만이 가득한 화면을 노려보듯이 응시하며, 주먹에 힘을 넣어서 쥔다.
‘설마 아서 왕이 나를 막고 있나?’
몇 번째 실패를 반복하는지 모른다.
저번 왕과 직접 맞닥뜨린 이후, 레노지안으로 들어가는 게 불가능해졌다. 꿈을 통해서든, 타르타로스를 통해서든.
지겹도록 거듭된 실패 때문인지, 레노지안을 겪었던 경험이 흐릿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실제로 겪은 일이 아닌, 잠깐 꾸었던 꿈처럼.
‘그건 아서가 바라는 게 아니겠지.’
왕이 바라는 것은 한서진이 지구가 꿈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러나 지구를 현실로 인식하는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효진 씨가 뭐라도 건져야 할 텐데.’
레노지안과 단절된 지금, 유일한 통로는 신효진뿐이었다.
물론 그녀에게만 기댈 생각은 없었다. 닥치는 대로 시도해서 방법을 찾으려 노력할 것이다.
크게 기지개를 켠 그는 창문 밖을 주시했다.
설계사무소가 위치한 이 최상층도 이제 머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신사옥 정비가 끝나는 대로 모두 그곳으로 입주할 테니까. 직원들도 새 연구소, 그것도 온전한 회사 소유의 건물로 이주한다는 것에 모두 들떠 있었다.
‘감회가 새롭네.’
문득 옛날, 한밤중에 사장실에서 서울 야경을 내려다보며 품었던 야망이 떠올랐다. 눈에 보이는 서울의 모든 것을 이 한손에 전부 쥘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때.
지금은 어떨까.
한손으로 서울, 아니 한국 전체를 움켜쥐고도 남지 않을까.
그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때였다.
그는 빌딩 광장에서 커다란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인물을 보았다. 14, 15세쯤 되었을까 싶은 소년이었다.
멀어서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가장 커다란 〈도와주세요 박사님〉이라는 문구만큼은 대강 보였다.
“뭐지? 설마 날 말하는 건 아니지?”
여기는 상업빌딩, 학문기관이 아닌 만큼 박사라 불릴 만한 사람이 거의 없다.
한서진은 혹시나 해서 다른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아까 보니까 빌딩 앞에서 웬 남학생 하나가 1인 시위하고 있던데, 무슨 일 있습니까?”
“아, 대표님. 그게 말이죠…….”
직원은 이상하리만치 난처한 반응을 보였다. 한서진은 시위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뭡니까? 알려 주시죠.”
“대표님께서 굳이 아셔야 할 만한 일은 아닙니다만…….”
“저 남학생은 누굽니까? 왜 저러고 있는 거죠?”
직원은 어쩔 수 없다 느꼈는지 호흡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대표님이 그간 잘 모르셨겠지만…… 벌써 사흘 정도 되었습니다.”
사흘이라면 자신이 모를 법도 했다. 어제까지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으니까.
“몇 달 전 대구에 발생한 대형 화재 있잖습니까. 칩셋 3가 없어서 제대로 진압을 못해 큰 피해가 났던…….”
“아아, 그거요?”
화재가 도시가스 폭발까지 이어져, 사망자만 수십 명이 넘은 대형 참사. 칩셋 3에 관련된 비리 덕분에 대구 시장이 정계를 은퇴하고, 공무원 여럿이 중징계를 받은 사건.
바로 한국 몫의 칩셋 3 물량을 주한미군에서 관할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한서진도 기억이 났다.
‘피해자 가족인가?’
안타까운 일이지만 자신이 해줄 말은 없다.
자신은 그 화재에 어떤 연관도 없으며, 비리로 얼룩진 부실한 대처로 인해 커진 피해에도 간접 책임이 없다. 일을 키운 것은 칩셋 3를 빼돌린 지역 공무원 및 시장 측근 아닌가.
동정심에 호소하러 온 거든, 아니면 잘못된 비난의 화살을 돌리러 온 거든, 자신이 관여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 화재를 진압하다가 부상을 입은 소방관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관심을 끊으려던 한서진은 순간 멈칫했다.
“소방관 아들이요?”
“네.”
“그 소방관은 지금 상태가 어떻습니까?”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피켓을 보면 중상을 입고 아직도 치료 중인 것 같습니다.”
“저 학생 좀 불러다주시겠어요?”
직원은 살짝 놀라서 반문했다.
“저 아이를 말입니까? 이곳에요?”
“네.”
“대표님…… 굳이 대표님이 만나실 것 없습니다. 그 화재에 대표님이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니구요. 괜히 만나봤자 매스컴에 오르내릴 구실만 줄 뿐입니다.”
직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서진은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피해자 가족이 엉뚱한 번지수 짚은 거면 저도 모른 체 넘어가는데, 소방관 가족이라잖아요. 만나보고 싶습니다.”
남학생은 쭈뼛거리며 들어왔다.
피켓을 구석에 살그머니 세운 남학생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낯설다는 감정을 드러냈다.
회사에 들어서기 전 몸수색을 받은 터라 긴장감이 극에 달해 있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직원은 사무적인 얼굴로 남학생을 안내했다.
대표실에 들어선 남학생은 한서진을 보고는 눈에 띄게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바짝 긴장하는 게 눈에 보인다.
“앉으세요.”
한서진은 가벼운 어조로 앉기를 권했다. 의외의 존대에 남학생은 조금 어리둥절해하다가 조심스럽게 앉았다.
“아, 안녕하세요? 한서진 박사님, 저는 영일중학교 2학년 김찬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사흘 전부터 피켓 들고 서 있었다면서요?”
한서진은 궁금했다.
무엇을 도와달라고 이 어린 아이가 대구에서 서울의 회사까지 찾아와서 혼자 서 있었을까? 학교는 어떡하고?
부친이 중상을 입고 치료 중이니, 경제적인 도움을 부탁하려고 찾아왔을까? 아니면…….
“박사님! 우리나라에도 칩셋 3를 많이 풀어주세요!”
“…….”
뜻밖의 말에 한서진은 순간 침묵했다. 개인적인 도움을 청하러 올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칩셋 3를?”
“네! 몇 달 전 대구 대형 화재 사건 아시죠? 사람도 엄청 죽고 소방관분들도 많이 다치셨어요. 칩셋 3만 충분했어도 어렵지 않게 진압했을 텐데, 물량이 부족해서……. 그러니 다시는 그런 사람들이 생기지 않게 우리나라에도 칩셋 3를 많이 풀어주세요! 미국에만 몽땅 팔지 마시구요. 부탁드려요, 박사님은 우리나라의 영웅이시잖아요.”
어긋난 예상, 한서진은 한 대 맞은 기분이었지만 표정을 차분하게 다스렸다.
“그거 때문에 왔나요? 피해자 가족이나 학생 아버님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러 온 게 아니라?”
“네, 그 부탁을 드리러 왔어요.”
김찬은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한서진이 조용히 물었다.
“아버님은 어떠시죠?”
“……많이 안 좋으세요.”
“참 안타깝겠어요. 쾌유를 빌어줄게요.”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한서진은 호의를 품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
“아빠를 많이 존경하나 보네요.”
“네, 제게는 자랑스러운 아빠예요. 사실은 저도 소방관이 꿈이거든요.”
“그래요?”
한서진은 이 어린 소년이 어떻게 해서 아빠와 같은 길을 가기로 결심했는지 궁금해졌다.
“어렸을 때 거리에서 불이 난 걸 본 적이 있어요. 소방차도 여러 대 오고, 소방관 아저씨들도 열심히 불을 끄고 있었는데, 그 중 아빠도 있었어요.”
“…….”
“재를 흠뻑 뒤집어쓰고 어린아이를 안고 나오는데, 그 모습이 너무 멋졌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아빠 같은 훌륭한 소방관이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한서진은 슬쩍 웃었다.
“나도 사실 비슷한 기억 있는데.”
“박사님도요?”
“예전에 엄청 작은 집에 살던 가난한 시절이 있었는데…… 자다가 집에 불이 났어요. 그때 긴급 출동한 119에서 불을 잡아주고, 십시일반 돈도 모아서 가구도 몇 개 새로 사주시고 그랬죠. 그땐 내가 참 많이 가난했거든.”
“……아.”
“대놓고 말하자면, 사실 피해자 가족이면 안 만나주려고 했어요. 부상당한 소방관 아들이라고 해서 만나볼 마음이 들었어요.”
김찬은 숨을 죽였다.
다른 곳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하던 한서진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내가 뭘 도와줄 수 있는지 한 번 알아볼게요. 폰 잠깐 이리 줘 봐요.”
번호를 교환하고 난 뒤, 한서진은 김찬을 돌려보냈다.
그는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 뒤 돌아갔고, 배웅하고 들어온 한서진은 구석에 기대어 있는 피켓을 보았다.
피켓에 쓰인 글귀를 가만히 읽어 내려가던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김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박사님은 우리나라의 영웅이시잖아요.
영웅이라. 민망하고, 낯 뜨거운 말이다.
‘내가 영웅?’
문득 미국이 떠올랐다. 그는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영웅 취급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 숭배의 형태나 성질은 전혀 다르다.
세상은 두 개의 조국을 갖고 있다고 평한다. 그러나 과연 자신도 진정 그리 느끼고 있을까.
미국은 그에게 조국보다는 고마운 나라, 절친에 가까웠다. 그러나 한국은 어떤가.
‘내가 태어났고…… 거주하기에 편한 나라.’
여론은 북한 재건 기금에 천문학적인 돈을 내놓은 그를 가리켜 애국심이 가장 뜨거운 남자라고 호들갑을 떤다. 하지만 그는 그 뜨거운 애국심이 뭔지 몰랐다.
난민, 힘없는 약자를 향한 동정심은 있고, 지금까지 내놓은 기부금 역시 어디까지나 그런 측은지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여론은 그런 ‘사람을 향한 마음’에 ‘절절한 애국심’이라는 표현을 무조건 끼워 넣곤 한다.
왜 그런지는 알고 있었다.
여론은 미국을 의식하고, 견제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물건에 이름을 적듯이, 자신의 소속에 대한 관계를 자꾸만 확인하고 싶어 했다.
‘난 물건이 아닌데 말이지.’
사람을 아끼는 마음을 나라사랑으로 포장하려 들 때마다 가벼운 거부감이 든다.
미국의 영웅이면서도 끝까지 한국에 남아 있는 것을 두고 애국지사라 칭송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자신은 그저 이곳이 살기 편해서 머무르고 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천진한 김찬의 눈빛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머금는다.
그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마 이 나라 대다수의 심정이겠지.
그러나 그는 자신을 분명하게 정의할 수 있었다.
영웅도 뭣도 아닌, 그저 한 명의 개인일 뿐이라고. 그저 남들보다 돈이 좀 더 많고, 좀 더 유명할 뿐이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동생인 한지혜한테 전화했다.
「응, 오빠. 무슨 일이야?」
“부탁할 게 있어서.”
「무슨 부탁인데?」
“마력 칩셋 3 때문에 문의가 많이 들어와서. 그런데 물량을 당장에 늘려줄 순 없잖아. 미국 입장도 있는데.”
「그럼?」
“일단 당장은 돈으로라도 커버해야지. 소방서 근무 환경이 어떤지 전국적으로 한 번 대강 알아보고, 얼마 정도 쓰면 좋을지 견적 좀 짜 봐.”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영웅놀이야? 뭐, 소방관 쪽은 우대해줘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알았어, 내가 한 번 알아보고 견적 내볼게. 돈은 얼마까지 써도 돼?」
“견적 나오는 만큼.”
「콜. 역시 우리 오빠 시원시원해.」
한서진은 전화를 끊으며, 피식거렸다.
갑작스러운 변덕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혼자서 먼 서울까지 찾아온 김찬을 보고 얻은 감정 때문이다.
사람을 향한 동정심, 그러나 이 행위를 대중은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날 또 애국자로 만들려나.”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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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두 편 올렸으니까 오늘 쉴 거라고 하신 분 얼른 나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