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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326화 (326/609)

00326  친구 사이  =========================================================================

손가락이 키보드를 빠르게 오가며 쉬지 않고 키를 입력하고 있었다. 춤을 추는 듯한 그 광경은 마치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물 흐르듯이 연주하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다른 손은 터치 패드에 그림을 그리듯이 오가며, 입체적인 궤적을 컴퓨터에 입력한다. 타이핑과 입체적 입력이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며, 주모니터 위에 미세한 모형의 반복적 결합을 그려낸다.

그 명령을 실시간으로 받고 있는 공정라인은 한창 불을 뿜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내 둥근 원반으로 된 반도체 원판이 찍혀 나왔고, 로봇 팔이 나서서 가지런하게 절단했다. 부스러기가 버려지고 난 뒤 남은 것은 42개의 완성품이었다.

그제야 두 손이 완전히 멈추며, 참았던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짙은 땀이 섞인 숨결이었다.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던 박효산 교수가 가까이 다가오며 대견해서 어깨를 두드렸다.

“끝났냐?”

“네, 일단은요.”

“만만한 작업이 아니구나.”

방금 완성된 42개의 반도체는 마력 칩셋 No.3, 어떤 화재라도 단숨에 진압하는 소화 장치로 각광받고 있다.

칩셋 3는 원형 설계를 제조 당시의 에테르 흐름에 따라 변수를 적용하여 실시간으로 변경한 형태로 찍어낸다. 변수 적용은 한서진이 공개한 변수 프로그램을 이용하려 실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업이 보통 만만한 게 아니어서, 원형 설계와 변수 프로그램을 공개했음에도 지금까지 공정에 성공한 연구소나 기업은 없었다.

“정작 너는 변수 프로그램 안 쓰던데.”

“사실 그거 쓰면 오히려 불편하거든요. 저 말고 다른 사람들 쓰라고 만들어놓은 거라서요.”

“그럼 괜한 오해가 생기지 않을까 모르겠다. 특허는 공개해놓고, 일부러 써먹지 못하게 이상한 프로그램이나 내놨다고.”

“베풀어줘도 고마운 줄 모르고 징징거리는 애들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어요.”

“하나 양이?”

“네.”

박효산은 작게 혀를 내둘렀다.

“하나 양, 가만 보면 보통이 아니라니까. 스무 살 맞냐? 한 마흔은 넘은 듯한 능구렁이 같던데?”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하나가 얼마나 순수하고 착한데. 그냥 좀 남들보다 똑 부러지는 겁니다.”

“아아, 그래그래.”

한서진이 살짝 정색을 하듯이 말하자 박효산은 어깨를 으쓱하고 넘어갔다.

“그나저나 너는 변수 프로그램도 없이 대체 어떻게 만드는 거냐?”

“처음에는 저도 잠깐 써봤었는데 불편하더라고요. 그냥 직감으로 하는 게 더 편해요.”

통찰안을 통해 에테르의 흐름이 보이니, 당연히 그쪽이 더 편할 수밖에 없다. 변수 프로그램은 통찰안이 없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통찰안 못 쓰게 됐을 땐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는데.’

한동안 통찰안을 사용하지 못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아직도 진땀이 흐른다. 통찰안이야말로 칩셋 3를 제조하는데 최고의 변수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부활한 통찰안은 이전보다 한층 강화되어, 그동안 불편했던 시간들이 좋은 추억으로 변했을 정도다.

“교수님, 지방간은 좀 나아지셨나 봐요?”

“엉? 나 좋아진 거 어떻게 알았냐? 아니, 내가 지방간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전에 술 취하셨을 때 언뜻 말씀하셨어요. 혈색이 좋아지셔서 혹시나 하고 물어본 거예요. 요즘 술도 잘 안 하시고.”

“하하, 오래 살아야지. 요즘 식이요법이랑 운동이랑 병행하고 있다. 하루하루 몸이 가벼워지는 게 느껴져.”

“좋은 현상입니다. 앞으로 몇 십 년은 거뜬하시겠어요.”

빈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본래 통찰안의 권능에는 ‘제대로 볼 수 있는 카테고리’에 제한이 걸려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제한이 사라졌다. 그 어떤 사물이나 이치도 가리지 않고 진실을 보여 준다.

단 진실의 ‘깊이’는 예전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나은 정도로 생각된다.

마음만 먹으면 반도체공학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에도 진출하여 대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도체 하나로도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는데, 의학, 물리학, 항공학 등 각종 과학의 대가가 된다면 어떨까.

‘역사상 둘도 없는 천재 취급받겠네.’

지금도 거의 그런 대접을 받고 있지만, 그 이상의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에테르 하나만으로 충분하기에, 그리고 물질적으로 부족한 게 전혀 없기에, 한서진은 다른 분야로 진출할 생각은 아직 품고 있지 않았다.

다만 일상생활에서 이렇게 소소하게 써먹을 수 있는 게 늘어난 점은 쏠쏠했다. 지인들의 건강 체크 같은.

“그나저나 이 칩셋들은 어떡할 거냐?”

“어떡하긴요, 미국에서 와서 가져가겠죠.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세요?”

“국내에도 물량 좀 푸는 게 낫지 않을까? 여론을 다독이는 의미에서라도 말이야.”

“여론이요?”

“칩셋 3를 죄다 미국에만 퍼준다고 불만 있는 사람들이 좀 있는 모양이던데. 나야 네 결정을 존중한다만 어디 사람들이 그렇냐? 우리나라에 안 준다고 빽빽거리지.”

“어쩔 수 없어요. 미국은 제가 워낙 받은 게 많아서.”

한서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미국은 오래 전부터 음과 양으로 자신을 도와줬다. 명예시민권에, 영웅 대접에, 중국에 희생당한 것으로 알려졌을 때에는 자신을 위한 복수전까지 결행했다.

게다가 소득세조차 물리지 않는다. 미국의 영웅에게 세금을 받을 순 없다고.

“그리고 칩셋 3는 한국과 미국에 서로 상의해서 비율을 조정하라 했었고요. 현 정권이 미국에 일방적으로 양보한 것을 제가 어떡합니까.”

“아아, 퍼주라는 게 아니고 네가 욕먹는 게 보기 그러니 좀 다독여주는 게 어떻겠냐는 거지.”

“제가 잘못한 게 전혀 없는데 뭐 어때요. 전 신경 안 씁니다. 괜찮습니다.”

“너도 참 강심장이다. 나라면 여론 신경 쓰여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텐데.”

“그러다가 탈모 심해지니 조심하세요, 교수님.”

“뭐, 인마! 나 아직 풍성해!”

가슴 아픈 곳을 찔린 박효산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그래도 요즘 거울을 볼 때마다 속상해 죽겠는데, 이 제자 녀석이…….

본래 칩셋 3는 상당수의 비율을 미국이 가져가고 있었다. 한국 정부와 협의한 결과였다.

한서진이 미국과 친했기 때문에, 그리고 한서진이 한국 정부와 서먹한 사이였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강력하게 우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근래에는 거의 전 물량을 미국이 가져가는 수준으로 변했고, 그 때문에 소방관계자들의 커다란 불만을 샀다.

그들은 미국을 원망하기보다는 자국의 보물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정부를 원망했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자기들끼리 술잔을 나누며 분을 터트리고, 감정을 삭일 뿐.

미국은 본래 한국의 몫이었던 물량을 주한미군에 배치한다. 미국으로 가져가는 게 아니라 한국에 남기되, 그 운용을 한국 정부에서 주한미군으로 이양한 것이다.

―어차피 한국에 남는 물량은 주로 한서진 박사와 주변인들의 안전을 위해 쓰이니, 차라리 우리 미국이 관리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비리가 개입할 여지도 없다.

당시 미국의 주장에 한국 정부는 반발했으나, 미국이 제시한 자료를 보고 끽소리 하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비리 증거.

한국에 배치되는, 얼마 되지 않는 칩셋 3의 물량 중 일부가 빼돌려진 증거가 나왔기 때문이다.

5개 밖에 되지 않는 적은 물량이지만, 소방부서에 배치해서 공공의 안전을 위해 쓰여야 할 칩셋 3가, 뇌물이나 선물, 접대를 목적으로 빼돌려졌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비리를 묻기 위해 정부는 미국에 이리저리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고, 결국 대부분의 물량을 미국에 넘겨주고 말았다.

한서진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일부 물량을 빼돌리는 부패공직자들을 적발했다〉는 미국의 귀띔을 받고 미국 손을 들어주었다.

어차피 그 물량이 미국 땅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고 주한미군이 관리하는 것이니, 그도 공공의 안전을 위해서는 그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비리에 가담한 자들은 조용히 옷을 벗고 은퇴했고, 사라진 5개의 칩셋은 주한미군 손으로 다시 돌아왔다.

물론 이 사실은 국민들이 모른다.

대다수 국민들은 칩셋 3에 얽힌 이해관계나 문제 등을 알지도 못한다. 그나마 칩셋 3에 관심 있는 소수도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한서진을 비난하거나 원망할 뿐이다.

얼마 되지도 않는 물량까지 미국에 넘겼다고. 사실 그 물량은 여전히 한국 땅에 남아 있음에도.

42개의 칩셋 3를 완성했다는 말을 듣고, 미국 관할 책임자가 한국대 연구소로 찾아왔다.

“박사님, 이번 물량은 한국 소방본부 측에 기부하는 게 좋겠습니다.”

“네? 어째서요?”

한서진은 의아했다. 매번 물량이 부족하다고 징징거렸으면서, 갑자기 왜?

“저번 대구 상가 화재 사건 때문에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론을 가라앉히고 환기도 시킬 겸, 이번 물량은 전량 한국에 배치하는 게 나을 거라는 본국의 판단입니다.”

“저야 누가 쓰든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기부는 좀…… 차라리 주한미군에 배치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한국 행정부를 믿지 못하시는군요.”

“그럴 수밖에요. 저번에 5개를 빼돌린 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어처구니가 없어요. 저와 미국이 관련된 사업에까지 불순한 손을 뻗는 사람들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한서진과 미국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는 칩셋 3까지 불온한 손이 닿는 판국이다. 그 외 다른 부문에서는 대체 얼마나 많은 더러운 일들이 오고 갈까?

“최시중이었나요? 그 놈만 아니었어도 애초에 그 대구 화재도 그렇게 큰 피해는 안 났을 겁니다.”

몇 달 전 대구 상가 지역에 일어난 대형 화재는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대형 참사였다. 그건 자연재해가 아닌 명백한 인재였으며, 미흡한 대처와 관할당국의 무능력함, 그리고 부정부패가 삼위일체로 절묘하게 결합하여 대참사로 번진 사건이었다.

소방규정을 마구잡이로 어긴 낡은 시스템, 뒷돈을 받고 제대로 감독하지 않은 관할당국, 그리하여 도시가스 폭발까지 번진 대형 사고였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대구에 배치된 2개의 칩셋 3와 관련된 비리가 대구 시민들을 분노에 빠뜨렸다.

상가 화재가 발생하기 하루 전, 대구 시장 사택에 화재가 발생했다. 문제는 그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서 2개의 칩셋 3개 중 1개를 사용해버린 것이다.

칩셋 3는 진압이 매우 어렵거나 사람의 목숨이 달린 위급한 화재의 경우에만 사용하게 되어 있다. 가벼운 재산상의 피해만 나오는 화재는 사용할 수 없도록 정해놓고 있다.

대구 시장 사택에 난 화재는 진압이 별로 어렵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칩셋 3를 소모해 버린 것이다.

또한 나머지 한 개의 칩셋 3는 행방이 묘연했다. 책임부서가 어딘가로 빼돌린 것이다.

결국 시민들은 분노했고, 그 사건으로 대구 시장은 정계에서 은퇴해야 했다.

엄연한 행정책임자들의 비리였음에도 피해 당사자들은 분노를 가라앉히지 않았다. 그들은 행정책임자들에게 분노하는 한편, 한서진이 미국이 아닌 국내에 물량을 충분히 공급했으면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원망했다.

“물론 진실은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좋지 않은 여론은 초기에 잡는 게 좋습니다. 이번의 생산 물량을 한국에 전부 공급함으로써 어느 정도 가라앉힐 수 있을 겁니다. 때문에 주한미군이 관리하는 방식은 곤란합니다. 대신 소방당국의 관리를 철저히 감시하겠습니다.”

“대중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자는 거군요.”

“네, 그렇습니다.”

“저보다 더 저에 관한 여론을 신경 써 주시는군요. 전 사실 별로 관심 없는데.”

“저희는 그저 박사님의 한국 생활이 쾌적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게 무슨 애들 쇼도 아니고.

“그렇게 하세요, 그럼.”

========== 작품 후기 ==========

저희 실탄프로덕션은 그저 독자 여러분들의 구독 생활이 쾌적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처럼 연참을 반짝반짝 닦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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