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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324화 (324/609)

00324  친구 사이  =========================================================================

3차 경매의 낙찰자는 러시아 재벌 레이코프스키였다.

13억 4,000만 달러라는 막대한 액수가 공개되자 세상은 다시 한 번 뒤집어졌다.

3차 경매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에테르 워치는 명품 시계이자(정작 제조자 외에는 시간을 읽을 순 없는) 안전장치로서 확고한 이미지를 쌓으며 기세등등하게 부상했다.

스위스 시계 장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계라며 에테르 워치를 극찬했고, EW의 장인으로 취직하기를 원했다.

파텍필립, 오데마피게, IWC 등 세계적인 시계 브랜드는 최고 브랜드에서 이류권으로 밀려날 위기에 처했다. 최상류층 부자들에게 그들은 더 이상 1순위가 아니게 된 것이다.

워치를 낙찰 받은 레이코프스키는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안슐 왕자에게 향했다.

둘은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그들의 회사는 사업적으로 협력하거나 경쟁할 때가 종종 있었다. 당연히 서로 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안슐 왕자님. 큐스프롬의 레이코프스키라고 합니다.”

“오, 큐스프롬 회장님이시군요. 이거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안슐 왕자는 시원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레이코프스키는 속이 쓰렸지만 겉으로는 태연히 사교적인 미소를 유지했다.

“안슐 왕자님께서는 이미 1차 경매에서 에테르 워치를 낙찰 받으셔서 더 이상 흥미가 없으실 줄 알았습니다.”

“후속 라인업에 구매 의사가 없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2차 경매에도 참가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4억 불도 안 되는 헐값에 팔리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헐값, 이라고요?”

“저는 에테르 워치의 가치는 10억 달러부터 책정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레이코프스키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역시 천문학적인 재력가지만, 4억 달러를 대뜸 헐값이라고 평하는 것은 놀라웠다. 대관절 이 사람은 에테르 워치를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는 것일까.

“하면, 오늘 경매에 딱 한 번 입찰하시고 그만두신 것은…….”

“적절한 시작가를 그어줬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만약에 왕자님께서 덜컥 구매하시면 곤란하신 거 아닙니까?”

“10억 불이면 저렴한 편이죠. 그 가격에 구매해도 좋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안슐 왕자는 태연히 미소 지으며 그의 눈을 주시했다.

“결국 워치는 적절한 가격에 낙찰되지 않았나요? 꽤 많은 경쟁자들이 입찰을 했었고요. 회장님께서 바로 그 승리자 아닙니까?”

레이코프스키는 쓴웃음을 지었다.

전문가들은 4억 내지 7, 8억 달러 정도로 적절한 가치를 책정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랬던 것을 안슐 왕자가 보기 좋게 깨뜨려 버린 것이다. 단호한 메시지와 함께.

한서진이 직접 만든 에테르 워치는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그것을 잊지 말라고.

만약 안슐 왕자가 개입하지 않았으면, 10억 달러에 못 미치는 싼 가격에 낙찰되었을까?

“다음 경매에도…….”

“참가할 겁니다. 시간이 안 되면 대리인이라도 보낼 겁니다.”

안슐 왕자는 최초의 에테르 워치를 보유한 구매자다. 당시 구매 가격은 무려 20억 달러.

그러나 그는 자신이 비싸게 산 제품을, 다른 이가 저렴하게 구매하는 게 못마땅한 게 아니다.

10억 달러라는 ‘적당한’ 가격에 워치를 낙찰 받는다면 오히려 이득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다른 경매 참가자들한테 흙을 뿌리려는 목적이 아니라, 진심으로 워치의 가치를 그 정도로 보고 있었다.

“잘 됐네요. 축하드려요.”

송하나가 밝게 웃으며 축하를 건넸다. 한서진은 그저 멋쩍게 웃었다.

“뭐, 내가 한 건 워치 제조한 거 밖에 없는데. 사업은 어머님께서 다 하셨지.”

“오빠가 만든 거니까 그 가격에 팔 수 있었던 거죠. 근데 오빠, 정말 연구 활동에는 지장 없는 거죠?”

“걱정 마. 도움이 되면 됐지, 해가 되지는 않으니까.”

팔을 뻗자 그녀가 익숙하게 몸을 기대어 왔다. 한서진은 선 채로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속눈썹이 부끄러운 듯이 떨린다.

팔에 느껴지는 감촉이 제법 탄탄하다. 원래 스포츠를 즐겨 했다던데, 요즘 들어 더 열심히 하기라도 하나 보다.

170cm의 큰 키를 지닌 그녀는 비율마저 월등하다. 굳이 힐을 신지 않아도 각선미가 시선을 강탈한다.

힐까지 신으면 가차 없는 흉기가 된다. 남자의 마음을 홀리는 것을 넘어서 압살해버리는.

한서진은 문득 자신의 호리호리한 몸매가 부끄러워졌다.

다행히 키는 그녀보다 좀 더 크지만 높은 힐을 신으면 그 차이마저 역전된다. 날씬한 편에 가까운 체격이라, 그녀의 우월한 몸매와 나란히 서면 격차가 조금 난다.

이거, 오늘부터라도 운동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닐까?

“TF팀 일은 어때?”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어요. 참, 북한 지역은 어떤 것 같아요?”

“아직이야. 더 조사해야 해.”

“빨리 안정화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H그룹이 전격적으로 진출하고?”

“……에헤헤.”

송하나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그 미소는 마치 끼 많은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너도 재벌 딸이기는 하구나. 사업 욕심 없지는 않네?”

“제가 사업 욕심 있는 게 싫으세요?”

“그냥 신기해서.”

송하나는 소리 없는 미소를 지으며 빤히 바라보았다. 마주 보던 한서진은 그녀를 더욱 품에 당기며 은근히 속삭였다.

“오늘 라면 먹고 갈 거지?”

“전 고기가 더 좋은데.”

“그럼 고기 먹고 가.”

둘은 서로 가볍게 껴안은 채 체온을 나눴다.

그렇게 상대의 체취를 느끼고 있을 때, 송하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효진 씨 모델 그만 뒀어요.”

“……어, 그, 그래?”

“오빠 비서하기로 했다던데요.”

올 것이 왔군. 한서진은 뜨끔했지만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지금 껴안고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표정은 감출 수 있을 테니까.

“효진 씨가 오빠 비서를 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아요?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비서 같은 자리는 유능한 재원을 쓰는 게 바람직하죠. 특히 오빠 같은 분은 더더욱. 효진 씨는 비서에 어울리지 않아요.”

맞는 말이다.

신효진은 특별히 업무 능력이 뛰어나지 않고, 학력도 부족하다. 한서진 같은 최고과학자가 그런 이를 비서로 쓴다? 주변에서 이상하게 볼 것이다.

“그건…….”

“게다가 효진 씨는 미인이잖아요. 주변에서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라요. 물론 저는 오빠를 믿지만요.”

뒤에 붙은 말은 마치 ‘저도 그렇고요’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한서진은 차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게, 사정이 있어.”

“어떤 사정이요?”

송하나의 목소리는 고저의 변화가 없었다. 표정도 보이지 않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엿볼 수가 없었다. 포옹을 풀려고 하니까 가느다란 팔이 꽉 잡고 놔주지 않는다. 마치 이대로 대답하라는 듯이.

한서진은 준비한 대답을 꺼냈다.

“가여워서 그래.”

“…….”

“나도 효진 씨 비슷한 인생을 살아왔잖아. 그래도 난 지혜라도 있었지만 효진 씨는 혼자고. 게다가 아직 집안 갈등이 끝난 것도 아니고.”

“동정심 때문이에요?”

“뭐, 그래. 내 동생 같기도 하고, 가엾잖아. 그래서 그냥 도와주고 싶은 거야. 더 넓은 세상이 어떤지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내가 정지원 사장님 덕분에 틀을 깨고 세상을 크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런 기회를 열어주고 싶어. 그래서 내 비서를 맡긴 거야.”

이 세계의 누구에게도 레노지안 이야기는 할 수 없다. 약혼녀인 송하나라 해도 마찬가지다.

오직 같은 꿈을 공유하는 신효진하고만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

그래서 한서진은 진실에 거짓을 섞어 적당한 거짓말을 만들었다. 어설프게 둘러대면 오히려 불신만 더 생긴다.

어쩌면 신효진은 자존심이 상할지도 모르겠지만, 송하나를 납득시키기에는 적당한 명분이다.

잠시 후 송하나가 포옹을 풀고 뒤로 살짝 떨어졌다. 그녀의 표정은 이해한다는 듯이 보였다.

“알겠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수군거릴 수는 있어요. 아무래도 신효진 씨 학력이나, 미인이라는 점 때문에.”

“너만 믿어주면 상관없어. 어차피 난 온갖 음모론의 중심에 있잖아.”

“하긴, 그건 그래요.”

세계 최고 과학자이자 대부호가 된 이상, 이제 한서진은 루머와 음모론을 피할 수 없다. 오히려 평생 동안 옆에 끼고 살아야 하는 몸이다. 어쩔 수 없는 유명세.

“오빠가 그랬듯이 효진 씨도 틀을 깨고 넓은 세상을 봤으면 좋겠다는 말…… 이해가 될 것 같아요. 동병상련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고마워.”

“그래도 진짜 동생처럼만 여기는 건 사실이죠?”

“응, 그렇다니까. 네가 있는데 내가 왜 다른 여자한테 눈이 돌아가니?”

“제가 예쁜 건 맞지만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요. 꼭 ‘더 예쁜’ 여자가 아니어도 ‘다른 예쁜’ 여자한테 눈 돌아가는 거.”

“…….”

한서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반응하면 좋을지 할 말이 생각 안 났다.

송하나가 배시시 웃으며 팔로 목을 감아왔다.

“농담이에요.”

―명불허전 한서진 클래스!

―조 단위 시계, 탄생하다!

―시계 하나에 1조 원 이상. 가늠이 되지 않는 아득한 가치.

―EW 브랜드의 가치는 어디까지 상승하나.

3차 경매 결과에 국내 언론은 크게 호들갑을 떨었다. 속보, 특종으로 내보내며 여론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이미 1, 2차 경매에서 엄청난 관심을 불러 모았던 EW는 이제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박사님은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

컴퓨터로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며 신효진은 자기 일처럼 뿌듯하게 여겼다.

한서진의 개인 비서로 자리를 옮긴 그녀는 주로 그에 관한 여론을 수집하는 일을 한다. 그 외에는 스케줄을 확인하고 상대에게 통보하는 일도 겸한다. 스케줄 작성 자체는 한서진이 직접 짜기에 그녀가 손댈 여지가 없다.

거처도 번화가의 최상위층 아파트로 옮겼다. 4개의 방과 대형 거실까지 갖춰져 있는 고급 아파트였다. 명의 또한 완벽한 그녀 이름이었다.

경비 보안도 철저하고, 입주민을 위한 시설도 최고 수준으로 갖춰져 있었다.

옛날에 살던 초라한 원룸에 비하면 말 그대로 궁전, 그녀는 요즘 집에 들어가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 행운을 자랑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친구가 없었다. 애초에 친구가 적기도 했고, 잘난 체나 오만으로 받아들일 친구가 대부분이었다.

‘매매가가 엄청나던데, 내년 재산세가 대체 얼마나 나올까? 매달 나가는 관리비도 으, 너무 부담이야. 이러다가 모델 일하면서 번 돈 재산세와 관리비로 다 나가는 거 아닐까?’

오죽하면 그런 행복한 비명을 속으로 삭히고 있는 중이다. 비서 일을 하면서 받는 월급으로 지금 생활이 충분히 유지 가능한데.

‘어쩌면 박사님도, 혹시?’

그녀는 모델 일을 하면서 자신이 생각보다 예쁜 편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메이크업을 마치고 거울을 보면, 저런 모습이 나한테 숨어 있었던가 하고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인지 간혹 한서진이 자신에게 다른 마음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수줍은 상상을 품곤 했다.

아름다운 약혼녀가 있는 건 알지만, 돈 많은 남자는 한 여자만으로 만족을 못한다는 말이 자꾸 생각났다.

오늘도 그런 은근한 기대를 애써 부정하며 즐겁게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문득 누군가가 비서실에 들어왔다. 인사를 하려고 일어서던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녕하세요, 효진 씨.”

“아, 안녕하세요…….”

화려한 명품 코트를 걸친 늘씬한 몸매의 미인, 방문자는 바로 송하나였다.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오빠한테 들었어요. 늦었지만 이직한 거 축하해요.”

========== 작품 후기 ==========

새해에는 여러분도 서진이처럼 라면 많이 끓이시고, 복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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