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23 불붙은 경매 =========================================================================
300억 불의 경매 급행료.
그저 경매를 빨리 열어주기만 하면, 1,500여 명의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걷어서 그 돈을 내놓겠다고 한다. 북한 난민 구호 기금이든, 한국 최약계층 지원 기금이든 뭐든 간에, 그저 무상으로 내놓겠다는 것이다.
생중계를 지켜보고 있던 국내 시청자들은 얼이 빠져서 제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사회자도 경매 결과에 놀랐는지 안색이 창백했지만, 떨지 않고 침착하게 진행을 이어 나갔다.
“이것은 에테르 워치, EW에 보내는 우리들의 메시지입니다.”
1,500여 명의 의지는 단 몇 줄의 문장으로 간결하게 함축돼 있었다. 간단하면서도 모두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우리는 3개월씩이나 기다릴 심적 여유가 없습니다.”
H그룹 전략기획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그룹의 컨트롤 타워인 기획실 직원들은 숨을 죽여 생중계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여유가 없습니다.
사회자의 마지막 멘트가 끝나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참았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지금 P예술회관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그 나라의 최상류층 사람들이다. 재산만 따지면 국내 재벌들 중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
저 중에서 제일 ‘가난한’ 이라 해도 자산가치가 수십 조 원 이상은 될 테니까. 한서진 외에는 저들과 비교할 수 있는 이들이 없다.
그런 이들이 자그마치 1,500여 명이나 모였다.
지켜보는 입장에서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미 해외에서도 큰 긴장과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중이다.
“이건 우리한테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EW 브랜드 런칭은 기획실에서도 강력히 보조하고 있는 패션 사업이었다. 브랜드 오너가 다름 아닌 한서진과 송지현이기 때문이었다.
기획실장은 송지현을 향해 확고한 음성으로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압박이기도 합니다.”
서둘러 경매를 열어달라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송지현 역시 1,500여 명의 그런 강력한 의지를 또렷이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푸념처럼 말했다.
“차라리 그 돈을 우리한테 직접 주지……. 300억 불이나 되는 돈 가지고 홀라당 남 좋은 일만 하게 생겼네.”
“사모님, 300억 불이 큰돈이긴 하지만 EW의 브랜드 가치를 생각하면 오히려…….”
“알아요. 나도 그냥 푸념처럼 해본 거예요. 아까워서.”
경매 참가자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을 급행료로 직접 받으면 어떻게 될까. 당장 300억 불의 수익이 거저 생기지만, 그 대신 EW의 이미지는 다소나마 하락한다.
명품의 이미지에는 때로는 오만함과 도도함도 필요한 법. 급행료를 받고 런칭 일정을 바꾸는 것은 그런 필수적인 오만함을 깎아내리는 행위다.
“이런 식으로 압박을 할 줄은 몰랐네요.”
하지만 참가자들은 영리했다. 명품 브랜드에 꼭 필요한 오만한 이미지를 신중히 고려했다.
그래서 그들은 차출한 돈을 EW에 직접 주지 않고, 한국 사회를 위한 기금으로 기부하는 것을 택했다.
기부금을 받기 위해서라도 국민들은 EW가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기대할 테고, EW는 도도한 이미지를 지키면서도 경매 일정을 앞당길 수 있다.
“누가 생각한 건진 몰라도 제 마음을 확실히 꿰뚫고 있군요.”
거의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한 반응이었다. 기획실장은 조심스럽게 우려를 나타냈다.
“사모님, 하지만 S스타디움 정비는 아무리 서둘러도 1개월은 족히 걸립니다.”
“저들이 원하는 것은 신속과 효율이에요. 근사한 스타디움에서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며 경매를 즐기는 게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에테르 워치를 손에 넣는 거죠.”
송지현은 결정을 내렸다.
“그냥 P예술회관에서 열어요. 시계는 준비돼 있으니까.”
EW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왔다.
―일주일 안으로 참가자분들의 기부금 협의가 이뤄졌던 장소인 P예술회관에서 3차 경매를 열겠습니다.
그 순간 얼마나 많은 이들이 환호를 터트렸을지는, 굳이 두 말 해봤자 입만 아플 것이다.
―기부금은 국내 저소득층 아동, 청소년층의 교육과 생활을 지원하는데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W의 홍보실장은 경매 일정을 발표하면서, 넌지시 그 말을 끼워 넣었다. 300억 불이 투입되기를 원하는 방향을 정확하게 짚어준 것이다.
참가자들은 즉답으로 동의를 표현했다. 경매에 대한 기대감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화려한 스테이지는 필요 없습니다. 중요한 건 실속입니다.
그들의 의지는 또렷하게 전해졌다.
그날 저녁, 서울 시내 특급 호텔들은 밤새도록 떠들썩한 파티가 열렸다.
진성호텔을 찾은 이용무는 1층 로비에서 흠칫했다.
로비 프론트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설마…….’
아니겠지. 멀어서 착각을 한 것이겠지. 조금 닮은 것뿐이겠지.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는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믿어지지 않게도, 누나인 이서나가 프론트 데스크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고급 정장을 입은 중년 남성들 여럿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그들이 로비 데스크를 향해 다가가자 이서나는 활짝 웃으며 유창한 영어로 물었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조금 후에 야외 수영장을 이용하고 싶소. 그런데 날씨가 다소 쌀쌀하니…….”
“알겠습니다. 맞춰 놓겠습니다.”
“고맙소.”
중년인은 유쾌하게 웃으며 로비를 나섰다. 잠시 호텔 밖에 볼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정문 밖에서 대기 중인 황금색 롤스로이스를 타고 어딘가로 떠났다.
멍하니 바라보던 이용무는 그제야 물었다.
“누나, 지금 뭐하는 거야? 왜 누나가 프론트에 있어?”
이서나는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못마땅한 듯이 입을 열었다.
“너, 방금 나간 저 분이 누군지나 알아?”
“……누군데?”
“사우디 왕자님이야. 그것도 왕위 계승 서열에 가장 가까운. 즉 사우디의 차기 국왕이지.”
“…….”
“그리고 개인 재산만 수백억 불이 넘는 분이야. 지금 우리 호텔에 투숙한 경매 참가자 VVIP들은 하나같이 이런 분들이야. 당연히 그룹 회장인 내가 직접 응대해야 하지 않겠니?”
이용무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그룹 총수가 호텔 데스크에서 응대라니.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식사는 어떠셨는지요?”
“오, 아주 좋아요. 오늘 주방장 특선, 제법 괜찮군요. 귀하의 추천에 감사합니다.”
“즐거우셨다니 다행입니다.”
호텔 레스토랑에도 있었고.
“물 온도는 적절한지 모르겠습니다.”
“만족합니다. 어디선가 온풍도 나오고 있어 아주 훈훈하군요.”
야외 풀에도 있었고.
“주문하신 룸서비스입니다.”
“흐음?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인데……. 이상하게 낯이 익군요.”
“혹시 진성그룹 회장 아닌가요?”
“알아봐주시니 영광입니다.”
그리고 룸서비스 자리에도 있었다.
스위트룸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미국 고객들은 직접 카트를 끌고 온 이서나를 보고 감탄했다.
호텔 사업을 오래 운영해온 그녀는 작은 동작 하나하나에도 노련함과 친절함이 배여 있었다. 게다가 그룹 총수가 직접 룸서비스를 제공하다니.
고객들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들 또한 이서나를 훨씬 능가하는 재벌들이었다.
“그룹 회장님이 설마 이런 소소한 일까지 직접 챙길 줄은 몰랐군요.”
“지금 저희 호텔을 찾아주신 분들 중 어느 한 분도 저보다 못한 분이 없으십니다. 부족하나마 제가 직접 나서서 응대해드리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룹 총수가 손수 해야 할 일은 아니지요.”
“오늘 진성그룹의 저력을 알 것 같군요. 괜찮으시다면 같이 한 잔 하시겠어요?”
이서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거절했다.
“응대해 드려야 하는 분들이 많아서, 마음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이서나는 프론트에도, 레스토랑에도, 비키니 미녀들과 다이아몬드 광산 재벌들이 물놀이 파티를 즐기는 야외 풀에도, 한창 떠들썩한 연회 중인 그랜드볼룸에도, 그 어느 곳에도 존재했다.
마치 분신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일주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드디어 폭발적인 관심 속에서 경매가 열렸다. 경찰들이 삼엄한 경비를 섰고, P예술회관 주변은 철저히 통제 되었다.
시에서는 아예 인근 도로를 모조리 통제하고, 경매 참가자 및 관계자들만 들여보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내로라하는 세계 재벌들이 화려한 개별 부스도 없이 일반 관중석에 앉아서 진행되는 경매였다. 하지만 그들은 경매가 빨리 열렸다는 것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희소성과 가치를 고려할 때 에테르 워치의 적정 가격은 최소 4억에서 최대 7억 5천만 달러 정도일 것이다. 그 정도 선에서 낙찰가가 형성되리라 생각한다.
―에테르 워치는 큰 재해를 피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지만, 막상 한 명의 개인이 살아가면서 큰 재해를 직접 겪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참가자 같은 재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예상 낙찰가는…….
전문가들은 앞을 다투어 예상 낙찰가를 내놓았고, 사람들은 흥미진진해서 경매 결과를 기다렸다. 경매 과정은 비공개로 진행된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었다.
2차 경매 당시 낙찰가는 3억 5,000만 달러.
에테르 스톰 경고 기능이 알려지며 가치가 증가했지만, 2차 경매 낙찰가 역시 거품이 낀 것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어느 정도 낙관하고 있었다. 그들이 예상하는 낙찰가 역시 전문가들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드디어 경매가 시작되었다.
시작가는 천만 달러. 초라한 수치지만 말 그대로 경매 시작가일 뿐이다.
쥐죽은 듯한 고요함 속에서 여기저기 눈치만 보던 중, 러시아 재벌 레이코프스키는 가격을 부르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10억 달러.”
순간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의 고요, 마치 둔기로 강하게 내리친 듯한 충격이 섞인 정적이 찾아왔다.
모두의 시선이 입찰자를 향했다.
터번을 두른 느긋한 표정의 중년 남성, 그는 바로 첫 경매의 승리자인 안슐 왕자였다.
사회자가 정신을 차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10, 10억 달러 나왔습니다. 그 외에 상위 입찰자 분 없습니까? 만약 없다면…….”
“……10억 1천만.”
약간의 망설임을 뚫고, 누군가가 가격을 불렀다. 안슐 왕자는 느긋하게 지켜보기만 할 뿐, 추가 입찰을 하지 않았다.
10억 1천만을 부른 이가 승리의 안도감, 그리고 가격적인 부담으로 묘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또 다른 이가 나섰다.
“10억 2천만.”
“10억 3천만.”
여기저기서 망설임을 누른 참가자들이 나섰다.
세계 최상류층이라 해도 군중심리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여기저기서 또 다른 입찰자들이 가세했다. 백여 명이 훌쩍 넘는 입찰자들이 보합을 벌인 끝에 마침내 워치는 13억 4,000만 달러에 당첨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 10억 불을 불렀던 안슐 왕자는 더 이상 입찰에 응하지 않았다. 가격만 훌쩍 띄워놓고 자기는 뒤로 빠진 것이다.
2차 경매의 승리자 라이스 케빈, 낙찰 의사가 없이 구경삼아 경매에 참가했던 그는 새삼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슐 왕자가 2차 경매에 참가하지 않았던 것을.
========== 작품 후기 ==========
“내 눈에 석유가 들어가기 전까지 조 단위 밑으로 팔리는 꼴은 절대 못 본다.”
“2차 경매 때는 그럼 왜……?”
“그래서 앞으로는 꼬박꼬박 출석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