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21 불붙은 경매 =========================================================================
청와대가 일을 안 한다!
여의도 정치권에서 공공연하게 나도는 말이었다. 여의도뿐만 아니라 세종시 등 정부청사가 있는 지역에서도 비슷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김시형 검사 때문에 가문이 탈탈 털리고, 가문의 큰 재산인 정일재단까지 국고에 회수당한 뒤, 임기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레임덕은 급속히 진행되었다.
북한 붕괴 때 북진을 통해 정권 초기의 위엄을 잠깐 되찾기도 했으나, 그마저도 에테르 스톰으로 인해 박살이 나버렸다.
수백 명에 달하는 국군 장병 및 장교들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그 때문에 대통령의 위상은 완전히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 뒤로 대통령은 태업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을 ‘아예’ 안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정 운영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안 하고 있었다.
이를 테면 경기부양책이라든가, 시장질서 조율이라든가, 공공질서 확립이라든가, 그런 대통령의 행정업무는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원래 정책 그대로, 일체 손대는 것 없이 알아서 굴러가게 놔두고 있었던 것이다.
“청와대가 일을 안 하잖아요? 근데 왜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겁니까? 이건 뭔가 이상한데요?”
“국정 운영에는 관심 없고 대통령 노후 대책만 준비하고 있어. 그러니 일은 안 하는데 바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실제로 바쁘게 움직이는 것도 맞고.”
“노후 대책이라니요?”
“3년 뒤면 대통령직 물러날 거 아냐. 근데 벌써부터 레임덕에, 한서진 박사 눈치 보여서 뭐 하지도 못하고, 가문의 재산은 잃어버리고, 당연히 노후 대책 외에 눈에 들어오겠어?”
“맙소사.”
세종정부청사에 근무 중인 30대 공무원은 상사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쩍 벌렸다.
아무리 레임덕이라지만, 임기 3년 남은 대통령이 남은 임기 내내 자기 보신에만 열중한다니?
“대체 얼마나 해처먹으려고 그러는 건가요? 정일재단 잃은 것 만큼은 메꾸겠다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김시형 파벌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데 그럴 순 없지.”
30대 공무원은 다행이다 싶어 한숨을 놓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함이 들었다.
“그럼 어떤 식으로 보신을 한다는 건가요?”
“그냥 소소하고 넓게 하는 것 같아. 아직 보답 못한 대선 공신들한테 공기관장 자리 같은 거 보은 인사로 뿌리고, 측근들 비리 같은 게 남아 있으면 최소화해서 나중에 걸고넘어지기 힘들게 만들고, 뭐 그런 정도지.”
“아하, 마지막으로 진탕 해처먹겠다는 게 아니고 나중에 욕먹을 만한 껀수를 줄여나가는 건가요?”
“뭐, 비슷하지.”
작정하고 국고에 손을 대겠다는 것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입맛이 씁쓸해졌다.
“그럼 앞으로 3년 동안 국가 원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지내야겠네요.”
“뭐, 그렇지. 그래도 미국이랑 사이가 좋은 게 다행이야. 한서진 박사 눈치 보여서라도 미국이 우리나라에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대통령이 욕 나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입장이 개인적으로는 나름 이해가 간다는 게 짜증납니다.”
실권을 잃었으니 최소한의 선에서 노후 대책이라도 마련을 해야겠다는 욕심. 개인 대 개인으로서는 그 보험 심리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괜찮아, 그건 나도 그래.”
“에휴, 애초에 우리 수준에 딱 맞는 대통령이었네요. 우린 국민 수준 뭐라고 욕할 게 아닌가 봅니다.”
“아무튼 차라리 사임을 하는 게 낫겠어. 이대로라면.”
특별히 큰 이슈로 욕을 먹는 것도 아니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정일재단의 비리 관련해서는 잠깐 큰 이슈를 탔었으나, 모든 처벌을 마무리한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졌다.
국민들은 대통령으로서의 자격보다는 한서진의 화려한 생활에 더욱 집중했고,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그의 사소한 행보 하나하나에 전 국민이 이리저리 반응했다. 그를 좋아하는 쪽이든, 싫어하는 쪽이든.
극빈층 집안에서 기술 하나로 전 세계 정점에 우뚝 섰고, 세계적인 석학들이 앞 다투어 가르침을 청하며, 그 강대한 미국 대통령조차 어렵게 대하는 인물.
그런 존재의 일상에 집중하느라, 그 외에 사회 돌아가는 흐름은 깊이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에 외국 부호들 엄청 몰려 왔던데.”
“1, 2차 경매보다 훨씬 많이 왔다며.”
“아유, 비교도 안 된다더라고요. 인천, 김포 공항 둘 다 완전히 포화 상태라던데요.”
에테르 워치 첫 경매 때 참석한 부호들의 숫자는 약 100여 명 남짓. 생각보다 적어 보일 수 있으나, 그 부호들 한 명 한 명이 수백억 불의 재력가라는 점을 보면 어마어마한 것이다.
“천 명은 족히 넘게 몰려든 것 같대요.”
“천 명 이상…… 맙소사.”
상사는 질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전부 전용기 타고 왔을 거 아냐? 에테르 워치 경매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설마 전세기나 항공사 비행기 타고 오진 않았을 테고.”
“네, 그렇죠.”
“공항이 미어터질 만하네. 격납고는 터무니없이 부족할 것 같고……. 그 많은 항공기를 어디에 다 세워놓지?”
“지금 두 공항이 지옥이랍니다.”
천 명이 넘는 부호들.
80억 인구 중 재력으로는 탑 오브 탑만 모여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재산을 모두 합치면 대한민국을 통째로 여러 번이나 사고도 남지 않을까?
“이거 정말 어마어마한 기회인데.”
세계적인 VVIP들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잘만 활용하면 국가 경제력을 도약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들이 어디 에테르 워치 경매만 끝내고 돌아갈까. 쇼핑도 할 것이고, 관광으로 시간도 보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 한가하게 백화점 쇼핑이나 하진 않을 것이고.”
“맞습니다. 기업 쇼핑, 프로젝트 쇼핑, 그런 스케일로 돈을 쓸 수도 있는 거죠.”
“정말 절호의 기회인데……. 대통령이 일을 안 하네?”
“국무총리라도 어떻게 나서주면…….”
“국무총리도 국정업무는 현상유지만 하는 거 몰라? 지금 정부는 지들이 나서서 뭔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어. 최소한의 현상유지만 하고 있다고.”
특별국채 발행도 유권자들을 의식한 입법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성사된 결과였다.
특별국채로 충분한 북한 재건 기금을 조달했지만, 그 돈의 대부분은 국고에서 잠자고 있었다. 북한 주민들이 필요한 생필품, 식료 등을 공급하는 데에만 최소한으로 쓰이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그것들도 대부분 수입 물량이라, 막상 국내에 풀린 돈은 그리 크지 않다.
지금도 어마어마한 기업들이 북한 재건 기금을 바라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는 중이었다.
저걸 제대로 활용만 한다면, 한국은 엄청난 경기 부양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일자리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그런데 그 큰돈이 필수고정지출 외에는 모두 국고에서 잠만 자고 있다. 사정을 아는 이들에게는 이보다 안타까운 일이 없었다.
청와대가 착복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묵혀두고만 있는 것 가지고 검찰이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니, 검찰의 ‘집행자’라 불리는 김시형 파벌도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진짜 일 안 할 거면 제발 자리라도 비켜줘라.”
“맞습니다. 제 심정도 딱 그겁니다.”
“……지옥이군.”
간신히 인천김포공항을 탈출한 러시아 재벌, 레이코프스키는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러시아의 석유 재벌로, 공개 된 재산만 수천억 불에 달하는 부호였다.
“천 명이 넘는 부호들이 전용기를 타고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그 많은 이들이 공항 한두 곳에 몰려들었으니, 이런 혼선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만약 지금 한국에 에테르 스톰이라도 일어나면 전 세계가 대공황에 빠지겠어. 그렇지 않은가?”
레이코프스키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수행비서는 식은땀을 흘리며 억지로 웃었다.
정말 그 농담이 현실이 된다면 지구의 미래는 끔찍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에테르 워치 3차 경매에 참석하기 위해 입국한 이들은 하나같이 전 세계 최상위층에서 경제를 움직이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동시에 사고를 당한다면 지구 경제가 어떻게 될까.
레이코프스키는 눈빛을 빛내며 결의를 다졌다.
“1차 경매에서는 어처구니없어서 포기했지만…… 이번에는 다를 걸세.”
그는 유라시아 최고의 석유 재벌, 공개 자산만 수천억 불에 달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재산은 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아부다비의 안슐 왕자가 어마어마한 재력가로 대중 사이에 유명하지만, 그의 재산도 결코 그에 뒤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경매에서 그가 저지른 실수는 단 두 가지다.
‘첫 경매에서 쉽게 포기해버린 것…… 두 번째 경매에 참가하지 않는 것…….’
첫 경매에서 20억 달러라는 터무니없는 금액에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포기했다.
아무리 ‘한서진이 최초로 제작한’이라는 프리미엄이 있어도, 명품 시계 하나에 20억 달러 이상을 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과소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어리석은 과소비는 하지 않는다. 그게 그의 신념이었다.
두 번째 경매는 일부러 참석하지 않았다. ‘최초’라는 프리미엄을 잃었기 때문에, 에테르 워치에 대한 흥미도 급속히 식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다시 소유욕이 생기면 그때 가서나 천천히 구매를 해볼까 생각했었다.
지금 와서 보니, 그 둘 모두 어리석은 결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아무리 큰돈을 쓰더라도 첫 경매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했고, 첫 경매에서 얻지 못한 이상 두 번째 경매에서만이라도 참가해서 워치를 얻었어야 했다.’
라이스 케빈이 워치 덕분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이후, 대부호들이 워치에 품은 소유욕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더 이상 워치는 단순히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그리고 그 미려함을 즐기기 위한 사치품이 아니었다.
근래 재조명된 에테르 스톰 재해로부터 목숨을 지킬 수 있는 부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돈이 많아봐야 목숨을 잃으면 다 소용없다. 아니, 돈이 넘쳐나기에 더더욱 목숨과 건강에 집착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심리.
이번에 모여든 대부호들은 모두 같은 심정일 것이다.
심지어 3차 경매의 정식 일정은 아직 몇 달 남았는데도 다들 한국에 모여들었다. 기 싸움과 견제는 벌써부터 시작된 것이다.
“에테르 워치 정식 브랜드는 언제 런칭한다던가?”
“내년이 유력하다고 다들 보고 있습니다.”
“일반 장인들이 만든 보급형 모델은 그런 경고 기능이 없다고 했지?”
“예, 한서진 박사가 직접 만든 모델만이 에테르의 흐름을 정확히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일반 장인이 만든 것은 에테르학적으로 의미 없는 움직임과 발광일 뿐입니다. 그들은 에테르에 관한 지식과 이해가 없는 일반인이니까요.”
한서진이 직접 만든 것만 진짜 에테르 워치. 그 외는 아름답기만 한 모조품에 불과하다.
그는 두말할 필요 없는 세계 최고의 부자, 게다가 에테르에 관한 연구 활동과 경영 활동으로 무척 바쁜 사람이다.
그런 사람 앞으로 평생 에테르 워치를 몇 개나 만들겠는가?
“선착순 싸움이군. 오직 돈으로만 다투는.”
돈으로만 다투는 것. 그가 제일 잘하는 짓이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 작품 후기 ==========
“돈으로 해결하는 것만큼 손쉬운 건 없지.ㅎㅎ”
“여기 안 그런 사람이 어딨냐?! 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