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320화 (320/609)

00320  불붙은 경매  =========================================================================

“카르쉬라이 백작가에서 소녀를 보신 적이 없으신가요?”

스칼린은 당황해서 머뭇거렸다.

이 귀공녀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 예전에 ‘자신’과 부딪친 적이 있단 말인가? ‘스칼린’의 과거를 아는 사람?

귀부인들이 술렁거리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르쉬라이 백작가?”

“그, 콜린 지역에 있는 명문가를 말하는 거지요?”

“중앙 정치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던데…….”

“그래도 백작가에서 한 분이 왕성에 와 계시지 않던가요?”

술렁거림이 점점 커진다.

스칼린은 마음을 가다듬고, 표정을 일부러 차갑게 했다.

“제가 그대와 카르쉬라이 백작가라는 곳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요?”

“소, 송구합니다. 소녀는 그저 낯이 익어서…….”

서늘한 눈빛에 질겁했는지 귀공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변명했다. 나쁜 뜻으로 물어본 것도 아니니 조금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스칼린은 조금 풀어주기로 했다.

“그대를 탓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제가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래요.”

“와, 왕비 전하…….”

“아직 저는 정식 왕비도 아니니 그렇게 겁먹을 것은 없어요. 자, 말해주세요. 제가 그대와 과거에 어떤 인연을 맺은 건가요?”

“……인연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먼발치에서 잠시 바라보다가 소녀가 용기를 내어 다가가서 몇 마디 말을 걸었을 뿐입니다. 그때 그 분이 맞는지 사실 소녀는 확실치도 않사옵니다. 다만, 다만…….”

“다만?”

“백작가에서 길을 잃었을 때, 우연히 전하를 닮은 분을 마주친 적이 있사옵니다. 검의 마음을 읽는 듯이 자유로이 다루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워 넋을 잃고 바라보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 불꽃같던 붉은 머리카락도, 소녀의 기억에 선명하게 박혀 있어서…….”

귀공녀는 부끄러워하며 뒷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스칼린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카르쉬라이 백작가는 어떤 곳이고, 자신은 왜 그곳에서 이 소녀를 만났던 것일까?

대관절 ‘스칼린’의 과거는 어떤 것일까? 혹시 그 지역 출신이기라도 한 건가?

그때였다.

저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파도가 갈라지듯이 인파가 좌우로 갈리며,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교적 왜소한 체격이지만, 태산을 방불케 하는 기세가 노인의 주변을 두르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저, 저건?’

스칼린은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노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숨길 수 없는 마력의 파동을. 노인이 지닌 힘이 워낙 강대하여, 아무리 잠재워도 그 육중한 흔들림이 주변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주저 없이 이쪽을 향해 성큼 다가왔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렸다.

“대, 대마도사님이시다!”

“아아, 저분을 여기서 뵙게 될 줄이야……!”

“연회 같은 것에는 일절 관심 없으신 분이, 대체 어떻게……?”

대마도사의 등장을 알아차린 왕도 어느새 스칼린의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는 나란히 서며 부드럽게 스칼린의 손을 잡아주었다.

대마도사는 왕과 스칼린을 향해 다가오다가 그 앞에 멈췄다.

왕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떠들썩한 걸 싫어하는 경이 이런 자리에 나올 줄은 몰랐소. 경도 왕가의 새 일원이 보고 싶었던 거요? 아무튼 짐의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소. 경이 내 체면을 세워주는구려.”

노인은 대답하지 않고, 스칼린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그는 스칼린보다 키가 작았지만, 눈빛만큼은 그녀를 확실하게 압도하고 있었다.

스칼린은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저 사람은 누구지? 왜 저런 눈으로 바라보지?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것일까? 출생이 불분명한 떠돌이 여기사를 이 나라의 왕비로 맞이하기 싫다는 건가?

노인이 입을 열었다.

“네가 왜 국왕 폐하와 함께 있는 게냐? 수행은 어쩌고?”

청천벽력 같은 말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다들 굳어버린 채로, 방금 노인이 한 말을 해석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놀란 것은 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경, 그게 무슨……?”

“네가 직접 폐하께 설명 드리거라.”

노인은 엄히 질책하듯 스칼린에게 말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당황하던 스칼린은 순간 찡 하고 머릿속을 울리는 통증을 느꼈다.

희미하지만 선명한 두통이 스치고 지나간 직후, 스칼린은 불현듯 떠오른 단어를 저도 모르게 입 밖에 내뱉었다.

“아, 아버지……?”

그 순간 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열기에 물든 관심을 품고 지켜보던 귀부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왕비 전하께서, 대현자님의 따님이라고?”

“세, 세상에…….”

“왕비 전하는 여기사라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대현자님의 따님이라고?”

“무슨 소리야! 원래 카르쉬라이 백작가는 검의 극한을 이룬 명문가라고. 대현자님은 가문 역사상 최초로 검이 아닌 마법에 도전하셔서 극한을 이루셨고, 그래서 지금은 가문의 원로들도 모두 대현자님을 인정하고 계시다고 들었어.”

“아! 들어본 것 같아! 그래서 카르쉬라이 막내딸은 검과 마법에 모두 능통한 훌륭한 혈통일 거라고 누가 말했던 것 같아. 그럼 그 분이 왕비 전하란 말이야?”

한바탕 태풍이 들이닥친 듯했다. 그리고 기류는 멈출 줄을 몰랐다.

웅성거림은 계속 커져 갔다. 스칼린은 당혹스러운 한편, 어떻게 자신이 그를 알아봤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건 마치 가라앉아 있던 기억의 한 조각이 갑자기 수면으로 떠오른 듯한 경험이었다. 여전히 과거는 기억나지 않지만, 눈앞의 노인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은 분명히 인식했다.

왕이 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거 참,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이오?”

“폐하.”

“경은 기쁘지 않소? 이제 경은 내 장인, 짐은 경의 사위가 되는 거요. 운명이 이런 인연을 안배해놓았을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경의 가문을 자주 방문할 걸 그랬소.”

“정녕…… 제 여식을 왕비로 맞이하시렵니까?”

“혹시 경은 내키지 않는 거요?”

노인은 몇 번이나 스칼린을 뜯어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결혼 자체가 내키지 않는 것은 아닌 듯 보였다. 그렇다면 대관절 무엇이 마음에 걸리는 것일까.

스칼린은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눈앞의 노인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신효진의 아버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는 이 왕국에도 매우 귀중한 인물로 보인다. 얼핏 대현자라는 호칭도 스쳐 들었다. 잘은 모르지만 아무에게나 주는 가벼운 호칭은 아닌 듯했다.

게다가 왕이 그를 대하는 태도를 보라. 절대군주와 신하의 관계지만, 왕조차 그를 조심스러워하지 않는가.

그런 아버지의 얼굴 위로, 술과 폭력, 무능함에 찌든 ‘신효진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 잇따라 가슴에 고였다.

노인은 망설임을 지우고, 정중히 왕 앞에 고개를 숙였다.

“부족한 여식이지만……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폐하.”

“아서 카드리온 슐트제너윈 코트발 1세의 이름을 걸고, 그대의 여식을 짐의 반려로서 평생 사랑할 것을 약속하오.”

“신, ――――――의 이름을 걸고, 이 결혼에 운명의 축복이 깃들기를 기원하옵니다.”

그 순간 스칼린은 퍼뜩 놀라서 아버지를 주시했다.

그가 본인의 이름을 읊는 순간, 마치 잡음이 낀 것처럼 교묘하게 그 부분만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왕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조차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는 들리지 않는 그 이름이, 저들에게는 들렸던 것처럼.

‘뭐, 뭐야?’

혼자 허우적대는 듯한 답답함에 사로잡혀 있던 스칼린은 주변의 모든 것이 멀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꿈에서 깨어날 때가 온 것이다.

H백화점은 근래 에테르 워치 관련으로 쏟아지는 문의에 즐거운 몸살을 앓고 있었다.

대부분 일반 라인업은 언제 출시하느냐는 내용이었지만, 간간이 구매력 있는 부호들이 직접 고급형 모델에 관해 질의할 때도 있었다.

1차 낙찰가가 20억 달러, 2차 낙찰가가 3억 5,000만 달러.

에테르 워치는 시계 경매 역사를 줄줄이 새로 쓰며, 그 찬란한 미래를 예고했다.

스위스 시계장인 중에서는 에테르 워치 제조법을 배울 수 없느냐는 이들도 간혹 나왔다. 하나같이 그 분야에서는 대가를 이룬 이들이었다.

H백화점은 물론 사양하지 않고, 그들을 장인으로 채용해서 기술 전수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앞으로 일반 모델을 생산하는 주체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던 중 은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에테르 워치는 에테르 스톰에 접근하면 시계가 과부하를 일으켜 정지한다. 그리고 멀어지면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믿기 어려운 놀라운 소문이었다.

근래에 에테르 스톰이 부각되면서, 과거의 대재해가 새로이 재조명되고 있는 분위기였다.

쓰나미, 화산 폭발, 도시를 집어삼킨 태풍 등 그런 어마어마한 자연재해가 사실 에테르 스톰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한서진도 관련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과거의 일이므로 자료가 없어 확인이 불가능하다.’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에테르의 존재가 알려지기 전의 자연재해가, 에테르와 관련성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최근 한국과 일본을 할퀸 태풍 메기, 강원도 산림지대를 휩쓴 에테르 산불, 캘리포니아 대지진, 그리고 북한에 일어난 에테르 폭발 등 굵직굵직한 재해들이 모두 에테르 스톰과 연관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게 에테르 스톰에 지대한 관심이 쏠려 있는 와중에, 에테르 워치에 관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에테르 과밀 지역에서는 무슨 재난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캘리포니아, 북한을 봐라.

―에테르 워치가 있으면 에테르 스톰을 사전에 피할 수 있다.

―대부호들은 지금 돈을 아끼지 않고 에테르 워치를 손에 넣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런 소문이 나돌자, 에테르 워치와 경매에 관한 관심은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그래서 안슐 왕자가 선뜻 20억 달러를 내놓고 쓸어간 거구나.

―라이스 케빈 회장은 그럼 날로 먹은 거 아닌가?

―에이, 그래도 최초라는 프리미엄을 무시할 수 없지. 3억 5,000만 달러 정도면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본다.

3차 경매가 개시되기까지는 아직 몇 달이 남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소문을 접한 대부호들은 그 몇 달도 기다리기 힘든 듯했다. 그들은 가진 힘을 총동원해서 한서진과 접촉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미국 대통령보다 더 만나기 힘들다는 사람이다. 하지만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서, 그들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성화에 시달리다 못해 결국 한서진이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에테르 워치는 주변 에테르의 흐름을 감지하여, 내부 부품의 움직임과 발광 현상으로 에테르 상태를 보여줍니다.”

한서진은 은근히 답답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몇 번이나 말을 했는데, 왜 그때는 집중을 하지 않은 거야?

‘시계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그저 아름다운 자태에만 홀려서, 스펙 설명은 두 귀로 흘리듯이 들었으니 이 꼴이 났지.

“물론 저 외의 사람이 내부 부품의 움직임으로 에테르 정보를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아주 간단한 작용은 알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에테르 워치는 에테르 스톰에 가까워지면 움직임이 멈춘다는 겁니다.”

공식 발표가 끝난 뒤, 수많은 전용기들이 한국을 향했다.

3차 경매는 아직 몇 달이 더 남은 상태였다.

========== 작품 후기 ==========

―님들……? 아직 경매 많이 남았는데요?

“괜찮아요. 우리끼리 일단 가경매해서 3차 경매 낙찰자를 미리 정해두겠습니다.”

“ㅇㅇ. 우리 못 기다림. 성격 급해서.”

“가경매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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