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318화 (318/609)

00318  에테르 워치  =========================================================================

“고장이 났나?”

라이스 케빈은 다소 짜증스럽게 말했다. 거금을 주고 산 시계가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멈춰 버리다니.

여비서가 즉시 말했다.

“제가 바로 H백화점에 전화해서 클레임을 넣겠습니다.”

“음, 너무 지나치게 따지진 말게. 이래나 저래나 한서진 박사가 손수 제작한 물품 아닌가. 그 사람에게 무례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

“알겠습니다.”

“기왕이면 이걸 기회로 한서진 박사와 식사라도 함께 했으면 좋겠군.”

최초 경매 때 한서진이 직접 나와서 설명하고, 시계도 채워준 것과 달리, 두 번째 경매는 그런 게 없었다.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 점이 아쉬웠던 라이스 케빈은 초기 불량을 그와의 친분을 다지는 기회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아무리 수천억 불의 자산가라 해도, 한서진과 식사 약속을 잡는 것은 무척 어렵다.

여비서의 통화가 길어지고 있었다. 뭔가 대화가 순탄하지 않은지 여비서의 표정에도 짜증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기다리던 라이스 케빈도 점차 표정이 굳어지며 여비서를 주시했다.

별안간 여비서의 표정이 흙빛으로 굳었다. 케빈은 목소리를 잔뜩 낮춰 물었다.

“왜 그러지? 뭐가 안 좋은가?”

“……하, 한서진 박사가 직접 전화를 받는다고 합니다.”

“뭐? 한 박사가 직접?”

라이스 케빈은 눈동자가 커졌다. 설마 전화 한 통에 다이랙트 연결이라니! 아직 이쪽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반갑습니다. 한서진입니다.」

이윽고 한서진의 목소리가 울리고, 곧바로 통역의 목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스피커 모드로 돌려놓은 라이스 케빈은 들리지 않게 헛기침을 했다.

에테르 워치를 낙찰 받을 때 이상으로 진득한 긴장감이 손끝에 잡혔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라이스 케빈입니다. 귀하가 손수 제작한 에테르 워치를 두 번째로 낙찰받은 구매자입니다.”

「예,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시계에 약간의 트러블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초기 불량이 뭐가 그리 큰 결점이겠습니까. 혹시 시간을 내주시면 지금이라도 기수를 돌려 한국을 방문해서 직접 식사라도 하면서 제품의 문제점에 관해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야기는 대강 들었습니다만, 시계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지다가 완전히 멈춘 게 확실합니까?」

떨림을 억지로 감추고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는데, 상대는 야속하게도 본론만 이야기했다. 라이스 케빈은 살짝 서운한 감정을 감추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혹시 중심체 내부 부품들이 망가지거나 뒤틀려 있지는 않았나요? 미세한 흔적이라도 없는지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라이스 케빈은 여비서와 함께 다시 한 번 에테르 워치를 자세히 살폈다.

“아니오, 그런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아무리 봐도 내부 부품들은 멀쩡합니다.”

「…….」

“박사, 워치가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정말 단순한 초기 불량인가요?”

「미스터 라이스, 혹시 지금 위치가 어디인가요? 정지 상태입니까, 움직이고 있습니까?」

“……일본에 출장차 들렀다가 전용기를 타고 미국으로 귀국 중입니다. 지금 태평양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다. 망망대해 위입니다.”

「미스터 라이스, 저를 믿고 지금 즉시 속도를 낮추고 기수를 돌려주십시오. 그리고 지금까지 왔던 방향으로, 전속력으로 회항하십시오. 더 이상 전진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뜻밖의 말에 라이스 케빈은 순간 멍해졌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박사, 그게 무슨 뜻인가요? 왜…….”

「에테르 워치가 고장 난 게 아닙니다. 그 주변의 에테르 반응이 비정상적으로 변했고, 그 파동을 감당하지 못한 워치가 멈춰버린 겁니다.」

“뭐라고요!”

라이스 케빈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통역사는 침착한 어조로 한서진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서두르십시오. 어서요.」

긴박한 순간, 다급한 외침보다는 침착한 어조가 오히려 빠르게 대처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정신을 차린 라이스 케빈은 즉각 조종실에 전화해서 바로 기수를 돌리라고 지시했다. 여태까지 왔던 항로를 그대로 되짚어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조종실은 당황했지만, 부랴부랴 오너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방향을 선회한 기체는 왔던 항로를 역으로 비행하기 시작했다.

“대체 이 대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 건가?”

“그,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서진 박사가 허튼 소리를 하지는 않을 사람인데.”

후방을 내다볼 수도 없으니 답답했다. 기체 뒤꽁무니에 카메라라도 달려 있으면 이렇게 답답하진 않을 텐데.

무심코 창밖을 내다본 라이스는 바위처럼 굳었다. 여비서가 의아해서 창밖을 내다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꺄악!”

흰 물보라가 쉴 새 없이 튀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비가 거꾸로 하늘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광경이었다.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폭우처럼, 후방에서 끝없는 물보라가 튀어 올랐다. 물살 줄기는 눈에 띄게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퍼뜩 정신이 든 라이스 케빈은 무심코 에테르 워치를 살폈다.

완전히 멎었던 움직임이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본래 속도보다는 느렸지만, 분명하게.

발광 현상까지 희미하게 살아났다.

부품의 움직임, 그리고 신비한 명멸은 점점 활기를 띠며,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한 박사는 비정상적인 에테르 반응을 이기지 못하고 워치가 멎어버린 거라고 했다.’

해당 지역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희미한 굉음이 간신히 들린 게 전부였다.

그러나 하늘을 무너뜨릴 듯 튕겨 오르던 물살을 보면, 결코 예사롭지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 몰랐다면 아마 핵이라도 터진 줄 오인했을 것이다.

라이스 케빈은 째깍째깍 움직이는 에테르 워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웃음을 지었다.

“점심식사보다 더 근사한 선물을 얻었군.”

에테르 워치의 구매자, 그리고 구매 희망자 중에 과연 누가 또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제니.”

“예, 회장님.”

여비서가 즉각 대답했다.

“지금 이 일은 절대 비밀로 해야 하네. 알겠지?”

“……물론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에테르 워치 다음 경매 일정은 어떻게 되나?”

“3번째 경매는 세 달 뒤입니다. 그 다음은 다시 반년 뒤, 그 이후는 아직 예정이 없습니다만, 연간 행사로 경매를 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라이스 케빈은 근래 지구상에 몇 차례 일어났던 큰 자연재해를 생각했다. 뒤늦게 밝혀진 것이지만, 그중 일부는 불안정한 에테르의 밀집 반응이 낳은 현상으로 알려졌다.

나머지 자연재해도 확신할 수 없을 뿐, 얼마든지 에테르 재해일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얼마 전 캘리포니아에 일어났던 대지진을 보라. 그것 역시 에테르 자연재해이지 않은가.

‘아니, 어쩌면…….’

알려지지 않았을 뿐, 화산 폭발이나 대진, 쓰나미 등 모든 재해는 에테르 스톰이 낳은 것인지도 모른다.

한서진 박사의 말대로 에테르가 모든 에너지의 근원이고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라면, 모든 물리 현상은 에테르의 움직임에서부터 시작될 테니.

에테르 워치가 에테르의 위험성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했다. 하나 더, 구매희망자 중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아직 자신뿐이라는 것이다.

‘안슐 왕자는 알고 있나?’

아마 모르지 않을까? 이런 기능이 있다면 한서진이 직접 설명을 해줬을 텐데.

‘왜 이런 기능을 진작 말하지 않았지?’

그랬다면 낙찰가가 훨씬 더 뛰었을 것이다. 부호들뿐만이 아니라 에테르 연구에 환장한 여러 선진국들도 체면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왜 한서진은 이런 획기적인 기능을 설명하지 않았을까?

혹시 구매자들만을 위한 특별한 혜택인가? 그렇다면 납득이 된다. 본래 명품이란 그것을 갖춘 이를 위한 특별함을 갖춰야 하는 법이니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제니, 내 통장에 지금 현금이 얼마나 있나?”

“할게요.”

신효진은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다가 수락했다. 한서진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뭘요, 박사님과 저, 모두를 위한 길인데요.”

“그렇게 이해해주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한서진은 서랍을 열더니 서류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제법 두툼한 서류가 담겨 있는 듯했다. 서류 외에도 다른 물체도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박사님, 이게 뭐예요?”

“부동산 관련 서류와 위임장이 들어 있습니다. 조금 있다가 제 고문변호사가 올 텐데 그 분과 함께 명의 이전 절차를 진행하시면 될 겁니다.”

“……네?”

“그냥 작은 아파트 한 채 드릴 테니, 앞으로는 그곳에서 사시면 됩니다. 선물이니 부담 갖지 마시고요.”

“대, 대표님.”

너무 꿈같은 이야기에 신효진은 당황했다.

지금 뭐라고 했지? 자신에게 집을 준다고?

“사옥이 완성되면 지방에서 제가 머무를 시간이 많아지겠지만, 효진 씨는 꼭 매번 따라올 필요는 없습니다. 비서 일을 맡기려는 게 아니라 ‘꿈’ 때문에 협력하는 거니까요. 협력자에게 이 정도 선물은 해드려야 도리인 것 같아서요.”

“저, 저에게 어떻게 이런…….”

“너무 부담 갖지 말아주세요.”

“어떻게 부담을 안 가져요? 저, 이런 선물 너무 과분해요. 부디 거둬주세요.”

신효진은 송하나의 배려로 깨끗하고 넓은 오피스텔에 살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호사스러운 공간이었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만족하는데, 여기에 집까지 새로 주겠다니.

“받으세요. 어서.”

신효진은 극구 사양했지만 한서진이 한사코 권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어깨를 떨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박사님,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신효진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몇 번이나 감사를 나타내고는 돌아갔다. 이제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문 변호사가 명의 이전 절차를 완료해줄 것이다.

한시름 놓은 한서진은 넥타이를 풀었다.

그녀가 현재 수입이 상당한 편이긴 해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클 것이다. 하지만 온전한 집 한 채만 있어도 마음을 편히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레노지안을 상대하기 위한 유일한 협력자인데, 이 정도 선물도 못해줄까. 오히려 너무 약소하다 싶지만, 그는 일부러 과한 선물은 삼가고 있었다.

「대표님, 라이스 케빈 회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구매한 에테르 워치에 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문제요? 어떤?”

「그게…….」

대강 설명을 들은 한서진은 안색이 굳었다.

“바로 그분하고 전화 연결 부탁합니다! 어서요!”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잠시 후 라이스 케빈과 연결이 되었다. 한서진은 즉각 입을 열어,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했다. 그의 얼굴이 더욱 흙빛이 되었다.

“미스터 라이스, 저를 믿고 지금 즉시 속도를 낮추고 기수를 돌려주십시오.”

서둘러 당부한 그는 곧바로 타르타로스에 접속했다.

‘일본발 미국행…… 태평양 상공…….’

해당 항로에서 에테르의 변화가 있는지 검색하던 그의 표정이 더욱 창백해졌다.

태평양 한가운데에 거대한 에테르의 구름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막대한 에너지의 파동이었다.

========== 작품 후기 ==========

새로운 시계는 언제나 환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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