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17 에테르 워치 =========================================================================
근래 한서진은 레노지안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 꿈을 통해서든, 타르타로스를 통해서든.
아서 왕의 의식과 마주했던 것을 마지막으로, 레노지안과 단절 비슷하게 지내왔던 것이다.
자신이 레노지안에 경계심을 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레노지안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차단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레노지안은 허상이 아닌, 실존하는 세상이다.’
레노지안이 허구라면 통찰안의 권능도 거짓이라는 이야기가 되므로.
한서진은 레노지안에 적대할 마음이 없다. 오히려 고마워하는 마음이 컸다.
통찰안을 얻지 못했다면 오래 전에 죽었을 테고, 지금처럼 누구나 동경하고 부러워하는 삶을 누리지 못했을 테니.
그러나 한서진이 레노지안을 실체로 인정하는 것에 비해, 레노지안은 이곳 세상을 거짓으로 인식하고 있다. 왕 뿐만 아니라 레노지안의 모든 이가.
그것이 한서진이 미래를 준비하는 이유였다.
「문제없어. 전미의 인재를 싹쓸이해서 보내주마.」
“네, 부탁합니다.”
「맡겨 둬. 깔끔하게 처리해줄게.」
정지원의 목소리에서 자신만만한 기색이 느껴진다. 역시 언제나 믿음직스럽다.
「연구 활동은 한국에서 할 거지?」
“네, 제가 이곳에 살고 있으니까요.”
「예전처럼 사업은 미국에서 하고, 연구 장소만 한국에 두는 거네. 알았다.」
한서진은 정지원에게 인재 확보를 부탁했다. 미국의 뛰어난 인재들을 모아서 에테르 공학 발전을 본격적으로 가시화하기 위해서였다.
그 계획은 원래부터 미국이 주된 무대였다. 그러나 한서진은 한국 인재들에게도 그 기회를 주었다.
어렵게 살던 자신의 옛날을 생각해서였다. 학문에 관한 재능을 떠나, 만약 반도체공학으로 진로를 틀지 않았으면, 자신이 연구자 체질이라는 것을 영영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가난에 찌들어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지 못하는 이공계 인재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서진혁에게 장학재단 설립을 지시했던 것이다.
SJ인더스트리에서 연구실만 뚝 떼어다가 한국에 차리는 체제로 갈 것이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그때 송지현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 박사, 나예요.」
“예, 장모님.”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상기돼 있었다. 한서진은 그제야 오늘 에테르 워치 두 번째 경매가 있는 날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공식적으로 세계에서 3번째로 제조된 에테르 워치가 주인을 찾는 날이다.
「놀라지 말아요. 3억 5,500만 불에 팔렸어요.」
“저번에 비해서 많이 떨어진 가격이네요.”
「그건 최초라는 프리미엄이 붙어서, 그리고 안슐 왕자의 배포 덕분에 가능했던 거죠. 솔직히 나도 아직 그 때만 생각하면 얼떨떨해요. 상상도 못한 가격이잖아요.」
시계 하나에 2조 원이라니, 과연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나 첫 경매가 끝난 후, 세상은 2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액수에 조금씩 납득하고 있었다.
한서진이 최초로 제조한 에테르 워치, 단순히 시계가 아닌 에테르 공학의 역사적인 첫 보물이라는 프리미엄을 감안하면, 2조 달러는 합리적인 가격이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안슐 왕자가 처음에 가격을 껑충 띄워준 덕분에 3억 달러 넘게 받을 수 있었던 거예요.」
최초라는 프리미엄은 더 이상 없다.
이제부터는 에테르 워치의 희소성, 그리고 한서진이 직접 제작했다는 프리미엄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 것을 고려해도, 3억 5,500만 달러는 어마어마한 것이다.
“근데 처음 경매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두 번째 경매를 해도 되나요?”
「열기를 식히지 않기 위해서죠. 세 번째 경매는 조금 더 텀을 길게 가질 거예요. 그럴수록 구매자들은 더욱 안달 날 테니까.」
“그런가요?”
「일반형이 공급될 때까지만이라도 고급형을 좀 더 자주 푸는 계획으로 갈 거예요. 그 뒤부터는 한 박사도 널널해질 테니까, 안심해도 좋아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에테르 워치 하나 만드는데 그렇게 시간을 잡아먹는 것도 아니니까요.”
송지현은 즐거워하며 전화를 종료했다.
에테르 워치는 무사히 초명품 브랜드로 자리를 잡아나갈 수 있을 것 같다. 한서진으로서는 세상이 시계로만 바라보는 점이 다소 아쉬웠지만.
‘그러고 보니 시침, 분침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네.’
에테르 워치의 움직임에는 무수한 정보가 담겨 있다. 그 중에는 시간에 대한 정보 역시 섞여 있다.
단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한서진 역시 에테르 워치만으로 시간을 알아볼 자신은 없었다. 무수한 책 속에서 단 한 권의 원하는 책을 찾아내는 작업이니까.
대표실 의자에 앉은 채 창밖을 내다보며, 한서진은 우두커니 중얼거렸다.
“이 빌딩도 이제 안녕인가. 정도 많이 들었는데.”
니트론 교수는 스탠포드에서 데려온 인재들을 데리고, 얼마 전에 인수한 연구소에 새 살림을 차렸다. 한국대 소속인 현진국 교수도 사실상 거기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박효산 교수는 강의 때문에 주기적으로 한국대를 방문하는 편이지만, 그 역시 새 연구소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지방에 있는 연구소는 원래 짓던 공장을 매입해서 개조한 거라 흡족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주변에 빈 땅이 많아서 시설 확장에는 용의했다.
한서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주변의 빈 땅을 되는 대로 사들였고, 새 사옥도 짓고 있는 중이었다.
사옥이 완공되는 대로 SJ설계사무소는 이사한다. 정든 이 빌딩 최상층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결정을 반겼다. 특히 경호팀에서 아주 좋아라 했다.
여러 입주사들이 들어 있는 빌딩 특성상 국제 주요 인사인 한서진의 경호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툭하면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지라 다른 입주사들도 곤란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효진 씨는 어떡하지?’
연구소와 사옥이 지방에 있기에, 직원들은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한다.
신효진은 거리 문제로 지금처럼 회사 일과 모델 일을 병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 택일을 해야 하리라.
‘모델 일이 꽤 수입이 된다고 했던가.’
살짝 알아본 바로, 신효진이 모델 일을 통해 얻는 수입은 회사 수입의 몇 배에 달했다.
게다가 사무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그쪽 세상에서 상당히 유명한 모델이었고, 배우 진출 등 다양한 가능성이 열린 상태였다.
아무리 레노지안이라는 동질감으로 묶여 있다 하나,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선뜻 모델을 포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신효진이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한서진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녀를 맞이했다.
“효진 씨? 무슨 일인가요?”
“저어,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런데 좀처럼 기회가 생기지 않아서…….”
“아아, 제가 요즘 회사에 잘 안 나왔죠. 미안합니다.”
한서진은 조금 긴장했다. 역시 레노지안 일인가? 뭔가 특별한 일이라도 있던 걸까?
그녀는 자리에 앉았고, 한서진은 도청방지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초룡을 만났는데, 그만 놓쳤어요.”
“아아, 그래요.”
초룡의 근사한 위용이 잠시 생각났지만, 그것은 한서진의 큰 관심사는 아니었다.
‘한 번쯤 타보고 싶긴 한데 말이지.’
신효진은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래서 리온과 여행을 멈추고, 수도의 왕성으로 돌아가기로 했어요.”
“아, 그래요?”
이건 의외의 소식이었다. 한서진은 좀 더 그녀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네, 당분간 왕성에서 생활하게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리온이 저에게 아주 고귀한 신분을 새로 내려준다고 했어요.”
“고귀한 신분이라면, 어떤? 귀족 같은 건가요?”
“……비슷해요. 아니, 그보다 더 좋은 거지만.”
“대단한 작위를 주려나 보군요.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없나요?”
“아, 아직은 안 돼요.”
“네?”
한서진이 의아해서 반문하자 신효진은 당황해서 손을 휘젓다가 얼른 수습했다.
“사실 아직 구체적으로는 잘 몰라요. 귀족보다 더 좋은 거라고, 그, 그렇게만 말을 했거든요.”
“……그렇군요. 그 외 다른 건 없습니까?”
“그리고 또…….”
한서진은 신효진의 설명을 열심히 들었다.
그러나 초룡 추적을 포기하고 왕성으로 귀환하기로 했다는 것 외에 특별한 내용은 듣지 못했다. 무엇보다 꿈속에서 ‘스칼린과 리온’은 아직 왕성에 도착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신효진이 무언가 말하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지만, 그것을 꼬집어 말할 수도 없었다.
“신효진 씨, 우리 회사 사옥이 곧 완공되는 거 아시죠?”
“네, 들었어요. 이사한다면서요.”
“효진 씨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거리상 모델 일과 회사 일을 병행하시지는 못할 듯한데.”
신효진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한서진은 잠시 그녀를 주시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모델 일을 관두시는 건 어렵습니까?”
“……네?”
“그 대신 제 비서 자리를 맡기겠습니다. 어차피 형식적인 거고, 제가 업무적으로 특별히 부담 드리지는 않을 겁니다. 급여도 모델 수입 그 이상으로 맞춰 드리겠습니다.”
신효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좋군, 아주 좋아.”
태평양 위를 활공 중인 개인 전용기는 훈훈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전용기의 주인, 라이스 케빈은 손목에 찬 에테르 워치를 들여다보며 연신 흐뭇해했다.
“정말 아름다워. 안슐 회장이 왜 그리 거금을 치르고 구입했는지 알 것 같군.”
수많은 부품들이 맞물리며 자아내는 움직임의 조화, 쉼 없이 반짝거리며 변화하는 발광.
보면 볼수록 빨려 들어갈 것 같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질리지 않는 신비함, 이건 단순한 기계장치가 아니라 자연이 낳은 하나의 걸작이었다.
‘그래도 20억 달러는 너무한 가격이었어.’
첫 경매를 떠올리니 입안에 씁쓸한 미소가 고인다.
그는 첫 경매에도 당연히 참가했었다. 안슐 왕자 때문에 호가 한 번 불러보지 못하고 끝나버렸지만.
4,000억 불의 자산가인 그에게 수십 억 달러 정도를 쓸 수 있는 여유는 있다. 단, 그게 투자가 아닌 사치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총자산의 5%를 시계 하나에 붓는다? 그가 아무리 수천억 불의 재력가라 해도 무리였다.
게다가 최초라는 프리미엄만 없을 뿐, 지금 이 에테르 워치 또한 안슐 왕자의 것과 등급의 차이는 없다. 외형적인 차이점만 있을 뿐이다.
“워치가 몹시 마음에 드시는 모양입니다, 회장님.”
섹시한 여비서가 웃으며 말을 걸자 라이스 케빈은 키득거리며 보란 듯이 손목을 들어보였다.
“자네고 보라고.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반해버릴 것 같지 않나?”
“저보다 더 예쁜가요?”
“물론 자네도 아름답지. 하지만 이 워치의 아름다움과는 카테고리가 다르다네. 그러니 굳이 비교하려 하지 말게.”
“쳇, 안 넘어오시네.”
라이스 케빈은 여비서의 투덜거림을 그저 흐뭇하게 듣기만 했다.
그때 시계를 들여다보던 여비서가 흠칫 놀라서 말했다.
“회장님, 이거 조금 이상한데요?”
“뭐가?”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 말에 라이스 케빈은 화들짝 놀라서 에테르 워치를 확인했다. 확실히 여비서의 말대로 조금 전에 비해 움직임이 느려지고 있었다. 발광 반응도 무언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게 왜 이러지?”
이유를 모르는 라이스 회장은 체통을 잃고 당황했다. 3억 달러를 넘게 주고 산 초고가 사치품이 벌써부터 고장이란 말인가?
어느 순간 에테르 워치가 완전히 멈췄다. 영롱하게 반짝이던 빛도 완전히 꺼졌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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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계약해서 마법비서가 되어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