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13 에테르 워치 =========================================================================
한서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박효산 교수도 그렇고, 페이 차일드도 그렇고, 심지어 예비 장모님까지. 다들 왜 이걸 시계로 보는 거야?
“장모님, 이거 시계 아닙니다. 보세요. 시침이랑 분침 같은 게 일절 안 보이잖아요?”
“무브먼트에 시침 분침이 뭐가 중요한가요? 시간을 알려면 핸드폰 시계를 보면 되는 거지. 안 그래요?”
시계에 시침 분침이 중요하지 않다니. 한서진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이게 무슨 모순적인 말이야?
“내가 좀 자세히 볼 수 있을까요?”
“저기, 그게…….”
“부탁해요. 흠집 안 내게 조심할게요.”
부탁을 이기지 못한 한서진은 ‘에테르 감지기’를 손목에서 풀어서 건넸다.
‘감지기’를 받아든 송지현은 중심체에서 황홀함이 가득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마다 개성적인 방향으로 회전, 전퇴, 무빙을 반복하는 수많은 부품들. 그런 유기적인 움직임이 한데 묶이며 커다란 통일감을 형성하고, 수없이 반짝거리는 개별 부품 표면에서 뜻을 알 수 없는 문자가 광택을 일으킨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혼이 빨려들어갈 듯한 극치의 아름다움, 송지현은 마침내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한 박사, 이거 어디 제품이에요? 신상인가? 하지만 브랜드가 짐작도 안 가. 난 왜 이런 걸 전혀 몰랐지.”
“시계가 아닙니다. 그리고 공산품이 아니라 수작업으로 만들어서 세상에 단 두 개밖에 없어요.”
“어머나, 수작업? 세상에 단 두 개뿐이라고요?”
그 말에 송지현은 더욱 놀라운 감정을 나타냈다.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대체 어떤 장인이 만든 거죠?”
“장인까진 아니고…… 제가 만들었는데요.”
“네? 뭐라고요? 한 박사가 이걸?”
송지현은 소스라치게 놀랐고, 그 반응에 한서진은 괜히 머쓱해졌다.
“네, 시계가 아니고 에테르 감지기입니다. 휴대가 편리하도록 손목시계형으로 만든 것뿐이죠. 보세요. 여기 중심체 내부의 금속 부품들, 사실 모두 미스릴입니다.”
“…….”
“금속 부품들이 주변 에테르의 흐름에 반응하면서 서로 맞물리게 되어 있어요. 물론 이 감지기만으로 에테르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주변 에테르 상태를 보여주는 것뿐이죠. 하지만 에테르를 기계적으로 활용하는데 본격적인 시금석이 되어 줄 겁니다.”
통찰안을 다시 활용할 수 있게 된 후, 한서진은 재빨리 에테르 감지기부터 만들었다. 오래 전부터 구상했지만 통찰안을 사용하지 못해 묻어두고 있던 계획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에테르 감지기는 주변 에테르의 흐름, 나아가 광대하게 연결된 지구 전체의 흐름까지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을 가졌다.
그러나 상태가 어떠한지를 보여주기만 할 뿐, 그 자체로 에테르 세계에 간섭하지는 못한다. 말 그대로 감지기인 것이다.
일반인에게는 그저 극치의 아름다움으로만 보이는 금속 부품의 움직임과 발광도, 실은 방대한 에테르 정보량을 담고 있는 데이터였던 것이다.
물론 그 정보를 해석할 수 있는 건 타르타로스, 그리고 통찰안을 지닌 한서진뿐이다. 다른 이에게는 그저 몹시 아름다운 부품 간의 무빙, 조화일 뿐이다.
“에테르 워치, 에테르 워치가 좋겠어요. 어때요?”
“예? 그게 무슨…….”
설명을 간단히 마치고 나름 뿌듯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송지현이 꺼낸 말에 한서진은 당황했다. 이 분, 지금 내 말을 제대로 듣기는 하신 거야?
“에테르의 힘으로 돌아가는 오토매틱, 심지어 여러 가지 다양한 빛도 쉴 새 없이 내네요.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무브먼트를 본 적이 없어요. 이건 정말 걸작이에요.”
“장모님. 그건…….”
시계가 아니라니까요!
‘에테르 스카우터’란 나름대로 의미 깊고 멋진 이름을 생각해두었던 한서진은, ‘워치’라는 이상한 단어가 묻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설마 그 이름으로 가는 건 아니지. 제발…….
“한 박사, 이거 워치 브랜드로 정식 런칭해보는 게 어때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실 시계는 스위스, 프랑스 이런 유럽 쪽만 유명하지 우리나라는 내세울 게 없잖아요. 아무래도 전통과 기술력, 인프라가 딸리니까. 하지만 이 에테르 워치는 가능성이 있어요. 아니, 폭발적이에요!”
송지현은 무척 흥분한 상태였다. 그녀가 이렇게 들떠 있는 모습, 한서진은 처음 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났다.
“한 박사, 우리 해봐요.”
“저기, 장모님. 하지만…….”
“난 우리나라에서 탄생한 브랜드로 세계 패션 시장을 석권하는 게 꿈이었어요. 단순히 진출이 아니라, 누구라도 인정하고 동경하게 되는 그런 거요. 그런데 이 에테르 워치는 충분히 해낼 수 있어요! 나만 믿어요!”
한서진은 망설였다. 그러고 보니 장모님은 패션 쪽에 관심이 지대했지. 백화점 사업체까지 운영하시고.
“한 박사, 부탁해요. 네?”
무리한 부탁도 아니고, 예비 장모님의 간청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 것인가. 한서진은 결국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하나만이라도…….”
“충분해요!”
송지현은 손뼉을 짝 치며 기뻐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거 일 년에 몇 개나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열 개 이상은 힘들 것 같은데요. 한 8, 9개 정도? 아시다시피 제가 다른 일도 원체 바쁜지라 틈틈이 노는 시간에만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너무 적은 게 아니냐고 장모님이 실망하면 어쩌지? 그렇다고 다른 일정을 무리하게 쪼갤 수도 없고.
그렇게 걱정했는데, 의외로 송지현은 씩 웃었다.
“잘 됐네요. 딱이에요.”
한서진은 의아했다. 이만큼 밖에 못 만드는데, 대체 뭐가 딱이라는 걸까?
두 번에 걸쳐 흐지부지 된 런던왕립학회의 에테르 학술회가 다시 열렸다.
영국은 이번에야말로 그 어떤 방해도 없을 것이라 자신만만한 채 일을 추진했다.
이미 두 번이나 겪은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이번에는 더욱 대대적으로 학술회를 열었다. 저번보다 더 많은 학자들을 초대하는 것은 물론, 매스컴의 힘을 총동원해서 일반인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게끔 꾸민 것이다.
수만 명이 넘는 대규모 인파가 오로지 한서진의 강연을 듣기 위해 찾아왔다. 이번에는 납치, 에테르 자연재해 같은 게 일어나지 않기를 빌면서.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첫날, 한서진은 에테르와 그 가능성에 관한 개요 연설을 마치며 무수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내로라하는 석학들이 이쪽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박수를 보낸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는데, 문득 귀에 낀 초소형 통신기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한 박사! 바로 지금이에요!」
송지현의 다급한 목소리, 그제야 한서진은 아차 싶었다.
강연에 집중하느라, 단상에 오르기 전 그녀가 했던 신신당부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서요!」
‘정말 이래도 돼?’
한서진은 왠지 설명할 수 없는 수치심이 밀려왔다. 하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고 침착하게, 송지현과 수도 없이 연습했던 포즈를 취했다.
왼손을 들어 올려 우아하게 손을 흔들어주고, 앞 머리카락을 매만지듯이 살짝 더듬는다. 동시에 자연스럽게 손목에 차고 있는 ‘에테르 워치’가 노출된다.
정면으로 노출된 시간은 불과 몇 초도 되지 않는 매우 짤막한 시간.
그러나 그 이상은 과한 법, 그는 아무렇지 않게 왼손을 아래로 내린 채 단상을 내려왔다.
「잘했어요! 아주 자연스러웠어요!」
한서진은 내려오면서도 조금 의아하긴 했다.
연습한 대로 자연스럽게 하긴 했지만, 이런 퍼포먼스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첫날부터 학술회는 대성황을 거뒀다.
한서진은 연설과 집단 토론, 집단 질의 시간을 통해 에테르에 관한 자세한 학술적 교류를 나눴다. 정확히는 일방적으로 전파했다고 봐야겠지만.
노벨상을 수상한 석학들도 그의 앞에서 마치 얌전한 초등학생처럼 강연을 듣고, 질의시간에는 묵혀둔 호기심을 터트리며 정신없이 질문을 해댔다.
“지금까지 에테르 연구는 반도체 같은 미시적인 영역에서만 그 활용이 가능했었습니다. 하지만 곧 새로운 가능성을 발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혹시 기계적인 활용에 관한 내용입니까? 이를테면 에테르 엔진 같은?”
“글쎄요. 일단은 발표를 위해 집중적으로 다듬고 있는 테마가 몇 있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현재까지 에테르가 산업에 진출한 영역은 반도체뿐, 하지만 그 외의 영역에도 곧 진출할 거란 소식이 세계를 강타했다.
금융, 투자, 중공업, 전자산업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두 한서진만을 쳐다보았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따라 전 세계 경제지수가 출렁거렸다.
그러나 모두가 에테르 산업에만 치중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유명 패션지는 한서진의 개인적인 부분에 집중했다.
―성공적인 학술회, 한서진 박사가 연설 때 차고 있던 시계는 무엇?
―극도로 아름다운 조형미, 내 평생 이렇게 전율을 안겨주는 무브먼트는 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시계.
―스위스 시계장인들, 자존심에 불이 붙어.
유명 패션지는 한서진이 차고 있던 시계를 원거리에서 정밀 촬영한 사진을 메인 특집으로 내보냈다. 몇 페이지에 걸쳐 분석 및 평론 칼럼을 썼다.
인지를 초월한 듯한 아름다움과 우아한 자태에 시계 애호가들은 금세 빠져들었다.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어떤 시계인지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심지어 런던왕립학회 학술회 주관부서에 ‘그 시계가 어디 제품이냐’라는 전화가 빗발치기도 했다. 덕분에 학회장 얼굴에 주름이 몇 줄 더 늘기도 했다.
―내가 나름대로 모르는 시계는 없다고 자부하는데, 저 시계는 처음 본다.
―어디 제품인지도 도저히 모르겠다. 로고 같은 건 일절 안 보이네.
―와…… 근데 시계가 진짜 아름답다. 저 정도면 시계가 아니라 그냥 예술품 아닌가?
―사진만 보는데도 빨려들어 갈 것 같아.
원래 유명 스타들은 움직이는 광고 간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중은 그들이 좋아하는 것, 즐겨 입는 것, 즐겨 먹는 것 등을 따라하며, 동경심을 충족한다.
국제 유명 인사인 한서진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할리우드 톱스타라 해도 그의 유명세에는 미치지 못한다.
대중은 그가 차고 나온 시계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국가를 가리지 않았다.
“그거 알아요? 우리 백화점에도 전화가 몇 번이나 빗발쳤어요. 게다가 거의 대부분 외국에서 온 연락이에요.”
“뭔가 낯서네요. 이까짓 에테르 감지기가 뭐라고…….”
“에테르 워치.”
“아, 네. 그렇죠.”
에테르 워치를 세계 시장에 선보인 첫날, 송지현은 부푼 자신감을 드러냈다.
“두고 봐요. 에테르 워치는 꼭 유일한 절대 시계가 될 테니까.”
런던왕립학회 학술회 일정이 모두 끝나던 날, 어떤 UCC 동영상 하나가 조회수를 휩쓸며 1위를 차지했다.
재생 시간은 10초도 되지 않게 짤막했다.
내부 미스릴 부품들이 수도 없이 맞물리며 움직이며 다양한 빛을 은은하게 내뿜는 모습은, 짧은 시간만으로도 보는 이의 마음을 강탈하기에 충분했다.
========== 작품 후기 ==========
절대 시계에 이상한 스카우터를 묻게 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