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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312화 (312/609)

00312  에테르 워치  =========================================================================

“시효, 법리 등을 일체 따지지 않고 전액을 국민복지사업에 내놓겠습니다. 저는 그 어떤 책임도 회피하지 않고, 그룹 회장으로서 모든 것을 떠안겠습니다.”

이서나는 카메라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플래시가 수도 없이 터지며 그 모습을 담았다.

여론은 그녀의 결단을 뜨겁게 응원했다.

―사실 이서나가 무슨 잘못이냐. 그룹 비자금 조성에 전혀 관여한 바가 없는데.

―원래 물산과 호텔 사업 쪽에 있었잖아.

―따지고 보면 전부 이창용 회장 과실이지. 그걸 왜 딸이 책임져야 해?

어느 순간부터 여론의 질타는 전대 회장인 이창용에게 화살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룹이라는 유산을 받았으면 그 과오도 함께 안아야 되는 거 아니냐는 불만이 이서나를 향하기도 했으나, 대세는 이창용 비판론으로 변한 뒤였다.

―이창용 회장이 대단하긴 대단해. 십 년 넘게 그 많은 비자금을 육성하다니. 재주도 좋다.

―거의 일 년에 십 조 원씩 빼돌린 거 아니야? 진성그룹이 그 정도 규모였구나.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대단하다.

―시효나 처벌요건 문제가 만만치 않을 텐데, 이창용 회장이 제대로 책임지려고나 할까? 검찰이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하다.

―아버지가 싸지른 일 수습하느라고 이서나 회장도 참 고생이 많다. 경영권 문제에서도 딸이라고 차별 꽤나 받은 걸로 아는데.

―여자 몸으로 회장까지 간 게 대단하지.

자기가 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룹 회장으로서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태도에, 대중은 이서나에게 큰 호의를 품었다.

동시에 그만큼 비판적인 시선이 이창용에게 향했다.

―이창용 요즘 뭐함?

―회장직 물러나서 제주도에서 요양 중. 원래 심장이 안 좋았는데 전에 쓰러진 이후로 건강 많이 해친 듯.

―나이 많고 몸 아프다는 이유로 죄다 처벌 피하면 법이 대체 왜 있는 거냐? 법대로 처벌해라!

―이창용은 국민 앞에서 사죄해라!

철혈의 경영자.

진성그룹을 글로벌 대기업으로 세운 주역.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기업가.

찬란했던 이창용의 명예는, 100조 원이 넘는 비자금이 촉발한 국민의 거센 비난 앞에서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제주도 별장.

이창용은 정원에서 휠체어에 앉은 채 신문을 보고 있었다. 헤드라인에 대서특필된 진성그룹 비자금, 이서나의 대국민 사과, 그리고 자신을 향한 비판, 그는 하나 남김없이 읽었다.

신문 구독에만 그치지 않고, 그는 노트북으로 인터넷에 접속해서 여론을 확인했다.

네티즌의 반응은 하나같았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떠안은 이서나가 안 됐고,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줘서 기쁘다는 쪽이었다.

그는 돋보기에 의지해서 낱낱이 훑어봤지만, 그 누구도 자신을 두둔하지 않았다.

“회장님, 그만 보시지요. 상스러운 말들만 보시다가 심려에 누가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오랫동안 섬겼던 비서실장이 보다 못해서 만류했다. 이창용은 감정을 알 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경영 신화의 산증인 이창용이가, 하루아침에 천하에 둘도 없는 개자식이 되었군. 허허.”

“회장님,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익명 여론이란 원색적이고 저급한 것입니다! 너무 귀담아 두실 필요는……!”

“서나는 언제 오는가?”

이창용은 말을 자르고 물었다. 비서실장은 굳은 목소리를 다듬고 대답했다.

“지금 이 별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10분 안으로 도착할 것 같습니다.”

이서나에 대한 묘한 적의가 묻어나는 목소리다. 평생 몸 바쳐 섬긴 주인을 그 딸이 물어뜯었으니, 충신으로서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다.

“서나한테 너무 그러지 말게.”

이창용은 덤덤히 충신의 마음을 달랬다. 딸에게 조금도 원망을 품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회장님, 이서나 회장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잠시 후 이서나가 도착했다.

수행원에 둘러싸여 걸어오던 그녀는 이윽고 부친을 발견하고, 혼자서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몇 걸음 앞까지 당도한 이서나는 인사 대신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이창용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

“이 아비한테 이렇게까지 해야 했느냐?”

“죄송해요, 아버지. 이게 그룹을 살리는 길이었습니다.”

“그룹을 그저 그런 중견기업에서 지금의 대재벌로 탈바꿈시킨 것은 바로 나다. 이창용이란 이름은 진성의 상징이다.”

살짝 엄한 목소리, 이서나는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들었다.

여론은 비자금에 관한 모든 책임을 이창용에게 돌리며, 온갖 비판을 퍼붓고 있었다. 다행히 전액을 사회에 자진 납세한 것 덕에, 검찰도 독하게 손을 쓰기가 어려워졌다.

요건을 충족하는 범위에서 기소한다 하여도, 벌금형과 몰수형 정도만 떨어질 것이다. 이창용의 나이와 건강까지 생각하면 구속이나 법정 출석도 생략될 수 있다.

실리는 충분히 챙긴 상황, 그러나 대신 이창용이란 이름은 거침없는 포화에 지금 이 순간도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넌 그룹의 신화, 그리고 상징을 무너뜨린 것이다.”

노기가 조금 묻은 목소리, 이서나는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도 기가 죽은 기색이 없이 당당했다.

“그래서였어요. 아버지란 이름이 그룹의 상징이기 때문이죠. 그만큼 물어뜯기 좋잖아요? 그래서 전면에 내세운 겁니다.”

“…….”

“여론을 보세요. 모두 이미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아버지를 비난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대신 그룹 현직 인사들은 동정표를 받고 있고요.”

“서나야.”

“그룹의 상징을 포기하고, 대신 그룹을 지켰습니다. 이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요, 아버지?”

비자금을 포기하더라도, 누군가는 그 책임을 져야 했다. 그리고 ‘이창용이란 이름’은 그 책임을 짊어지기에 충분했다.

이서나는 부친의 이름을 팔아서 그룹을 지켜냈다. 앞으로 전면적으로 그룹 살림이 흔들리고 어렵겠지만, 밝은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한 것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아버지 자식입니다. 처벌 문제로 고초를 겪지 않으시도록 하겠습니다. 그 정도 힘은 있어요. 아버지는 그냥 여기서 편히 요양하시면 돼요.”

이창용은 아무 말 없이 이서나를 직시했다. 그녀는 부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냈다.

그 시선에는 특이하게도 적의가 없었다. 오히려 어떤 대견함마저 묻어나고 있었다. 이서나는 그걸 느끼고, 눈시울이 조금 가늘어졌다.

“그룹을 위해서라면 친아버지라 해도 가차 없는 것……. 네게 그런 결단력까지 있는 줄, 진작 알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아버지.”

“잘한 일이다.”

진심이 담긴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서나는 문득 눈물이 핑 돌았다. 그룹 오너로서, 혈육이라 해도 지킬 선은 확실히 지키던 분, 그런 사람이 진심 어린 칭찬을 전해왔다.

“너야말로 진성그룹의 왕좌에 어울리는 제왕이다. 그 외에는 누구도 있을 수 없구나.”

“……아버지.”

“내가 가진 그룹 주식, 모두 증여하마. 이제 내게는 필요 없는 것들이니.”

“아버지!”

이서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불렀다.

경영에서 은퇴했음에도 끝까지 움켜쥔 채 놓지 않던 지분을 증여하겠다니? 이건 앞으로 이용무에게 더 이상의 가능성을 남겨주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그녀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큰 선물, 그러나 그녀의 안색은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앞으로 그룹을 잘 부탁한다. 이서나 회장.”

“……아버지.”

그녀는 조용히 부친을 불렀다.

아버지의 완전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꿈인 듯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가늘게 떨던 그녀는 눈빛을 단단히 잡고, 부친을 똑바로 응시했다.

“지켜봐주세요, 아버지.”

“됐다!”

한서진의 외침이 터지자 연구실 내의 모든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특히 박효산 교수는 하던 일도 손 놓은 채, 재빨리 그를 향해 달려갔다.

“된 거냐?”

“네, 됐습니다. 보세요.”

“호오, 호오.”

박효산은 완성된 조그만 모형물을 보고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언뜻 보기에는 팔찌 같구나. 손목시계 같기도 하고.”

“늘 몸에 휴대해야 하니 일부러 이런 형태도 만들었습니다. 반지처럼 만들면 더 편했겠지만, 그 정도 사이즈는 제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도 이만 해도 훌륭하다. 네게 이런 손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완성품은 언뜻 보기에는 마치 메탈 손목시계처럼 생겼다.

그러나 일반 시계와 다른 점은, 분침이나 초침 같은 바늘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전면부가 유리 등으로 막혀 있지 않고 훤히 뚫려 있어, 내부의 부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이건 정말 걸작인데.”

시계알에 해당하는 중심체의 내부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박효산이 감탄을 터트렸다.

수많은 자그마한 부품들이 정교하게 결합해서 맞물려 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혼이 빨려 들어갈 듯한, 조형미의 극치가 느껴진다.

신기한 것은 밀집된 톱니와 부품들이 개별적으로 회전하거나, 각각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수십 개가 넘는 작은 부품들이 저마다 독립적으로 회전하거나, 위치를 서로 바꾸거나, 서로 맞물린 채 이동한다. 개별 움직임끼리 서로 결합하여 새로운 움직임을 낳고, 그 흐름이 중심체 전체의 회전까지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작은 부품들이 다양한 색상을 은은하게 발산한다. 마치 살아서 호흡하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색상이 바뀐다.

그야말로 하나의 위대한 예술품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박효산은 정신없이 빠져들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한서진을 돌아봤다.

“나 하나 주면 안 되냐?”

“안 됩니다.”

“두 개나 있잖아! 하나 정도는 줄 수 있지!”

“다른 하나는 여유분이라고요. 비상 상황을 대비해야죠.”

“서진아, 나 진짜 이 시계가 갖고 싶다.”

“이거 시계 아니라니까요.”

한서진은 냉정히 말하며, 완성품 하나를 손목에 찼다. 그렇게 하니 정말 메탈 워치를 보는 듯한 자태였다.

“연구 목적으로 만든 에테르 감지기인 거, 교수님도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서진아! 나 하나만 만들어주라! 제발!”

“죄송해요. 이거 시제품 두 개 만드는 데도 머리 부서지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 안 만들 거예요.”

메탈 워치를 닮은 완성품, 그것은 다름 아닌 에테르의 흐름을 감지하는 장치였다.

에테르의 농도와 강도, 그리고 흐름에 따라 각 부품들이 힘을 전달받아 빛을 내며 움직이는 원리였다. 그 광대한 측정값이 실시간으로 타르타로스 2에 전송된다.

물론 감지기에 특별한 전자부속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금속 부품에 빽빽하게 새겨진 에테르 회로 덕분에 감지 기능이 발휘되고, 타르타로스 2는 그 활동성을 포착하여 데이터를 기록하는 것이다.

“서진아! 나도 한 개만! 제발!”

“안 됩니다.”

한서진은 냉정히 자르고, 연구실을 나섰다. 저녁에는 송하나의 집에서 다 같이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차에 오르는데 페이 차일드가 다가왔다.

“박사님, 중국에 관해서 전해 드릴 말씀이 있어서…… 어, 그런데 그 시계는 웬 건가요? 처음 보는 모델입니다만?”

“시계는 아닙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워치가, 시계가 아니라고요?”

페이 차일드의 눈빛을 본 순간 한서진은 묘하게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왠지 저 눈빛을 맞대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저, 저는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이만.”

“잠시만요, 박사님! 그 시계에 관해서 조금만 여쭤보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한서진은 도망치듯이 페이 차일드를 떼어놓고, 한남동 저택으로 향했다. 왠지 안도감이 밀려왔다.

“어서 와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모님.”

백철중과 송하나는 저택에 없었다. 대신 저녁 식사를 준비 중이던 송지현이 반갑게 맞이했다.

응접실에 마주 보고 앉아 담소를 나누는데, 문득 송지현이 관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의 손목을 주시했다.

“그 시계, 어디 제품이에요? 정말 예쁘네요.”

============================ 작품 후기 ============================

“시계 아니라고욧! 이 역사적인 에테르 발명품을, 어찌 한낱 시계 따위에…….”

“백만.”

“이백만.”

“머, 멋대로 경매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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