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10 Queens =========================================================================
이용무는 구체적인 상황 파악을 위해 직접 전화를 돌렸다. 그러나 삼십 분이 넘도록 속 시원한 정보를 알아내진 못했다.
여당 인사들은 그를 어려워하면서도, 검찰을 압박하는 것에는 난감한 반응을 보였다.
「부회장님, 지금까지 저를 후원해주신 것은 감사하나 김시형계는 건드리기 어렵습니다.」
「압박 한 번 잘못했다가 오히려 역으로 당할 수 있습니다. 지금 김시형이는 검찰 내부에서 총장도 터치 못하는 괴물입니다. 한서진 박사가 그런 괴물로 만들었습니다.」
「저도 자중해야 할 처지라서…… 죄송합니다.」
누구 하나 속 시원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검찰 내부에 널리 퍼져 있는 ‘진성 장학생’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이용무가 직접 전화를 한 것에 영광스러워하면서도, 김시형 쪽을 건드리는 것은 두려워했다.
「박철재는 김시형이보다 더한 꼴통입니다. 그나마 김시형이는 최소한의 융통성이라도 있지, 박철재 그놈은 그런 것도 없습니다. 그냥 눈앞에 증거, 사건만 보이면 그 뒤는 생각하지도 않고 물어뜯습니다.」
「절대로 박철재와 직접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그럼 그놈은 좋다고 더 날뛸 놈입니다. 차라리 김시형이를 통해서 간접 의사 표시를 하는 게 낫습니다.」
그나마 소득은 있었다.
박철재를 섣불리 건드리면 손해라는 것, 오히려 김시형이 이야기가 통할 여지가 있다는 것.
그러나 그 김시형도 현직 대통령마저 주저 없이 공격한 인물이 아닌가.
이건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 아닌가.
“전혀 도움 안 되는 것들!”
이용무는 결국 전화기를 내팽개쳤다.
박철재가 왜 진성화학을 노렸는지, 그가 쥔 카드가 어느 정도인지, 기소 가능성은 어느 정도나 되는지만이라도 알아보려 했다.
그런데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김시형 파벌을 적대하지 말라는 말만 하고 있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검찰 내부, 그리고 정치권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인 건 확실했다.
‘회계 처리는 완벽하다. 그리고 오래 전 일이, 이제 와서 검찰이 물증을 확보할 수 있을 리도 없어. 하물며 TF팀의 고발이라면…….’
이용무는 애써 자신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낼 수는 없었다.
“초룡은 고대에 카드리온 가문의 동반자였던 신수의 후손이오. 일반 용과 달리 신수의 피가 진하게 남아 있소.”
초룡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는 리온의 눈빛에는 깊은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신좌 탈환은 카드리온 가문의 염원, 그를 위해서는 초룡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오.”
“신좌……. 그럼 당신의 조상은 신이었다는 말이네요?”
“그런 셈이지.”
“그럼 현재 신좌를 차지한 신은 어디에 있나요?”
“하늘 밖의 세상 어딘가에 있을 거요. 아마도 이곳 레노지안을 지켜보고 있겠지.”
“신이…… 당신을 방해하지는 않을까요? 초룡을 찾으면 자신의 신좌가 위험해지니…….”
“그건 알 수 없소. 신좌의 인물이 어떤 인지로 세상, 그리고 레노지안을 바라보는지는 알 수가 없으니.”
“…….”
“나 또한 가문 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통해 알고 있을 뿐이오. 심지어 많은 부분이 소실되기도 했소.”
까마득한 고대부터 전해진 가문의 염원. 당연히 대를 이어 전해지는 과정에서 사라지거나, 변질되거나, 오역되는 부분도 많을 것이다.
리온도 아마 오롯하게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않으리라.
스칼린은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가문의 비원, 신좌의 존재를 정말로 진실로 믿고, 바라고 있을까?
이윽고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근심은 사라지고 더 없이 밝은 표정이었다.
“갑시다, 왕성으로.”
“네? 초룡은 어떻게 하고요?”
“이미 놓쳤는데 또 다시 기약 없는 여행을 할 수는 없지 않겠소.”
“하지만 초룡을 잡으러 나오신 거잖아요.”
“괜찮소. 다음에 또 나오면 되지.”
리온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 레노지안 대륙에는 더 중요한 일이 생겼소.”
“뭔데요?”
“왕비를 맞아들여야 하잖소.”
“……아.”
스칼린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리온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조용히 웃었다.
“모두가 당신을 사랑할 거요, 왕비.”
박철재는 드디어 칼을 빼들었다.
수색 영장을 발부받은 그는 진성화학을 압수수색했다. 서류 한 장, 하드 디스크 한 장도 남김없이 들고 왔다. 덕분에 진성화학은 업무에 비상이 걸렸다.
다른 계열사들도 바짝 긴장한 채 진성화학이 어떻게 되는지를 주시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진성화학 하나만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매스컴도 호들갑을 떨었다.
―검찰, 마침내 진성그룹에 칼을 빼들다!
―재벌 개혁, 실현되나?
―검찰이 노리는 건 그룹 비자금? 아니면 또 다른 비리?
언론과 대중이 시끌시끌한 가운데, 박철재 검사는 묵묵히 압수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조사했다. 그리고 전현직을 가리지 않고, 진성화학 임원들을 소환해서 조사에 나섰다.
진성그룹은 바짝 웅크린 채 검찰의 공개 조사에 대응할 준비를 했다. 이서나는 벌써 사흘째 퇴근도 하지 않고, 회장실에서 숙식을 반복했다.
“진성화학은 초기 비자금의 몸통과 연결 되어 있습니다. 오래 전 일이니 남아 있는 자료는 거의 없을 겁니다만, 혹시라도 몸통에 닿는 길을 검찰이 알아내게 되면…….”
“비자금 전체가 낱낱이 드러나게 되는 거군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룹의 존망이 걸린 중요한 일이다 보니 이서나는 비서실장 등 극소수의 믿을 만한 측근들하고만 직접 대책을 의논했다.
그룹 비자금은 그녀의 총괄이 아니었지만, 그 존재가 드러나면 그녀에게까지도 영향을 끼친다. 남동생의 일이라고 팔짱 끼고만 앉아 구경할 게 아니었다.
“TF팀이 H그룹을 본보기로 삼은 이유를 생각해봐요. 한 박사와 연관이 깊은 기업도 이렇게 봐주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보여준 거라고요.”
100조 원의 비자금이 드러나면, 과연 몰수당하는 것으로 끝날까? 차라리 그렇다면 다행이리라.
전무는 비서실장의 말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회장님, 그러나 진성화학이 비자금 조성에 관여한 건 오래 전 일입니다. TF팀이 과연 무슨 수로 관련 증거를 찾아냈겠습니까? 이제 생긴 지 한 달도 채 안 된 조직인데요.”
“하지만 뭔가 있기 때문에 검찰이 움직인 게 아닐까요? 박철재 검사 그 친구, 제가 알아봤는데 저돌적이긴 해도 무모하지는 않습니다. 최소한 증거가 전혀 없이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둘 다 일리가 있는 말이기에 이서나는 입술을 깨물며 깊이 고민했다.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한서진 박사를 만나봐야겠어요.”
대학 연구실에서 한창 몰두하고 있던 한서진은 이서나가 찾아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녀와는 근래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한 터라 그는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금속 탐지, 도청 탐지 등 경호실의 철저한 수색을 받은 뒤에야 이서나는 한서진과 마주할 수 있었다.
“일 년 사이에 많은 것이 달라졌군요. 대통령을 만날 때도 이렇게 철저하지는 않을 거 같은데요?”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제가 대통령보다 덜 중요하지는 않죠.”
“하긴 그렇네요. 대통령은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지만, 한 박사는 지구상에 딱 한 명이니까. 얼마나 유니크한가요?”
이서나는 가벼운 화두로 분위기를 느슨하게 푼 뒤, 일상적인 대화로 물길을 이어나갔다.
“실은 TF팀이 우리 진성그룹을 목표로 삼은 것 같아요.”
“그랬습니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 텐데, 한서진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철저한 무관심, 이서나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하나가 아무래도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 같아요.”
“하나와 사이가 좋으신 걸로 알고 있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요?”
“사이좋은 건 맞아요. 하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오늘 한서진이 또 300조 원의 국채를 매입했다고 들었다. 벌써 8,000억 달러를 특별 국채 매입에 쓴 것이다.
한서진은 알고 있을까? 국채를 이용해 한국 사회를 그의 손아귀에 쥐게 하고 싶어 하는 약혼녀의 야망을?
‘그나마 하나보다는 한서진 박사가 말이 통할 가능성이 있어.’
이서나는 다시 한 번 결심을 다졌다.
뼛속까지 연구자 기질이 충만한 한서진은 다른 이에 비해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기 수월하다. 그에게 비즈니스, 경영, 권력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은 듯 보이니까.
심호흡을 하고, 이서나는 질문을 던졌다.
“혹시 TF팀의 구성에 한 박사님도 관여하셨나요?”
“…….”
“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대학 동문인데, 그 정도는 말씀해주실 수 없나요?”
“하나가 말을 안 하던가요?”
이서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문득 자신에게도 저런 남편이 있었으면 세상 무서울 게 없었을 텐데, 하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나이 차이가 10년이 훨씬 넘게 나는데.
새삼 그가 남자로 보인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송하나가 잠깐 부러웠을 뿐이다.
“하나한테는 못 물어봤어요. 물어보면 말해줄 것 같긴 한데, 솔직히 하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저도 헷갈려요. 요즘 들어 하나가 은근히 무섭더라고요.”
“…….”
“그거만 살짝 알고 싶어요. 어려울까요?”
한서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서나는 혹시 그가 송하나한테 물어본다고 연락하지 않을까,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이윽고 그가 똑바로 주시했다.
“TF팀 구성에 제가 관여한 건 없습니다. 저는 TF팀장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
“적어도 정보 수집에 있어서 TF팀의 능력은 세계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미 국방부, CIA 등은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정보 수집이라면, 금융 관련 거래 정보도…….”
“당연히 포함되죠.”
이서나는 퍼뜩 Z7을 떠올렸다. 에테르 반도체를 토대로 만들어진, 세계 최고의 수퍼컴퓨터.
그러나 한서진은 그와는 비교도 안 되는 뛰어난 수퍼컴퓨터를 갖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이서나는 그것이 분명 사실이라 믿고 있었다.
한서진이 흘린 암시는 분명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서나는 그것만으로도 몹시 고마웠다.
그가 아니었으면 애초에 진성그룹에 불리한 이런 판이 짜이지도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어쨌든.
“고마워요. 제가 언제 밥 한 번 살게요.”
“괜찮습니다.”
“제가 고마워서 그래요. 나중에 연락하면 부디 사양하지 말아줘요.”
인사를 마치고 연구실을 나서는 이서나의 얼굴은 어두운 빛으로 굳어 있었다. 세단을 타고, 한국대학교를 빠져 나갈 때까지 그녀의 번민은 풀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검찰은 진성그룹의 원로 고문인 채윤석 씨, 방일호 씨, 조태준 씨 등 3명의 신병을 확보하는 한편 구속 영장을 신청했습니다. 나아가 인터폴과 협조, 해외에 있는 다섯 명의 전 진성그룹 임원들에게 수배령을 내려…….」
이서나의 안색이 더욱 굳어졌다.
지금 열거 된 이름은 진성그룹에서 일찌감치 은퇴한 원로들로, 부친인 이창용 회장을 수십 년 동안 모셨던 고문들이다.
이 시기에 검찰이 그들을 왜?
그때 이용무에게서 연락이 왔다.
「체포 소식 들었어?」
“지금 뉴스로. 무슨 일이야? 이 분들은 오래 전에 경영에서 손을 뗐는데, 검찰이 왜?”
「그 사람들…… 차명으로 비자금을 관리해온 사람들이야.」
검찰이 그룹의 몸통에 칼을 댔다.
========== 작품 후기 ==========
죽창 한 발 장전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