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08 Queens =========================================================================
통찰안이 부활했다.
본래 통찰안이 사라진 것은 아주 잠깐이었고, 금방 다시 돌아오긴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통찰안을 다시 얻었다고는 볼 수 없었다.
지나치게 강화된 통찰안은 사물이 담고 있는 진실을, 그가 해석할 수 없는 형태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도 통찰안을 닫아둔 채로 지냈다.
가끔 통찰안을 열어서 상태를 확인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강화된 통찰안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형태로 세상을 보여주었으니까.
그랬던 통찰안이 완전하게 돌아왔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진실을 ‘전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왜 ‘보여주는’ 게 아닌, ‘전달하기’ 시작했다고 표현하느냐면, 그 이유는…….
‘젠장, 끝도 없이 밀려들어 오네.’
사물을 보면 그 사물이 담고 있는 진실이 머릿속에 저절로 흘러들어온다.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고, 마치 데이터를 두뇌에 입력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머릿속 어딘가에서 진실에 관한 정보가 저절로 생겨나는 것 같기도 했다.
눈이 매개체인 것은 확실했다.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통찰안이 변했어. 이러면 뭐라고 불러야 되지? 그대로 통찰안이라 불러도 될까?’
어차피 타인에게 알릴 수 있는 비밀도 아니고,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면 그만이다.
한서진은 정신을 집중하고 책을 들여다봤다. 원어로 된 의학 서적이었다.
의학 용어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의미는 물론, 서적 내용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이 머릿속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저 보기만 하는 것으로, 의학 서적에 담긴 내용을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다.
물론 시선을 거두면 머릿속의 내용은 바로 사라졌다. 기억 삭제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쓰지 않은 언어를 까먹은 듯한 느낌이랄까. 그래도 드문드문 기억이 남았다.
책에 시선을 두면 다시 그 내용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온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마치 시각을 통해, 책의 내용이 담고 있는 진실에 뇌를 동기화시킨다고 할까.
꼭 그런 느낌이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한서진은 하루 종일 신(新) 통찰안의 스펙을 확인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통찰안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는 것이다.
먼저 문자나 기호 형태로 떠오르던 것이 사라졌다. 그 대신 마치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르듯이, 뇌리에서 저절로 사물의 정보가 떠오른다.
예전처럼 통찰안이 보여주는 기호 따위를 읽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슥 보기만 하면 머릿속에 저절로 떠오른다. 그래서 활용하기에 무척 편안했다.
두 번째로, 투영 가능한 진리의 폭이 넓어졌다. 아니, 사실상 제한이 거의 사라졌다.
일전에는 일정한 제한이 있었다. 통찰안은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진실을 보여 주었다. 유치원생에게 대학 수학을 보여 줘봤자 소용없는 것처럼, 그의 수용 범위 안에서 진실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잘 아는 분야에 비해 전혀 모르는 분야는 통찰안이 제대로 발동하지 않거나, 효율이 떨어지기도 했다.
처음 암을 치료할 때 치유 주문 습득 공식을 이해 못하는 바람에, 현대 용법으로 엘릭서를 제조할 수 있게 알려준 것이 가장 좋은 예이다.
그러나 그런 제한은 완전히 사라졌다.
한 번도 접하지 않은 영역에 관한 진리나 진실이라도, 그저 슥 보기만 하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영구적으로 머릿속에 남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나지 않은가.
진리가 문자로 보이는 대신 머릿속에 직접 새겨진다는 점, 영역의 제한 없이 진리를 알 수 있다는 점.
이 두 가지만 해도 이미 대단한 발전이었다.
‘진리의 「깊이」까지 무제한으로 풀린 건 아닌 것 같네.’
통찰 가능한 진리의 질적 퀄리티는 반도체공학을 기준으로 했을 때 그보다 조금 더 깊어진 것 같았다. 끝없는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건 아닌 듯했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해진 권능에 전율했고, 가슴이 설렜다.
‘골치 아픈 문제는 이제 다 해결되겠다.’
이제 에테르의 흐름도 볼 수 있고, 몰랐던 사물의 진리도 읽을 수 있다.
이 힘으로 무얼 더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두근거리던 한서진은 다른 생각에 픽 웃고 말았다.
‘근데 여기서 뭘 더 하지? 이미 가진 것만 해도 못할 게 없는데.’
지금 가진 힘과 영향력만으로도 이루지 못할 게 없다.
여기에 신 통찰안이 보태진다 한들, ‘할 수 있는 일’의 범주에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을 것 같다. 세계를 정복하거나 파멸하려 드는 게 아닌 한은.
그런 생각을 하며 한서진은 피식피식 웃었다.
‘숙련 제한도 없어졌는데, 반도체 말고 다른 것도 해볼까? 화학? 항공학? 기계공학? 아니면 의학?’
그러나 트로피 늘리듯 다른 부전공을 늘린다 해도, 크게 변할 건 없을 듯했다.
현재는 에테르학이 시대를 선도하고 있었고, 에테르를 들여다보는 깊이는 예전보다 조금 깊어진 것에 불과하니까. 다른 학문에 손대면 학위야 여럿 늘릴 수 있겠지만, 그게 에테르학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숙련 영역 제한이 없어진 건 정말 좋네.”
이 기쁨을 송하나와 함께 나눌 수 없다는 것에, 한서진은 아쉬웠다.
큰마음 먹고 말해줄까도 생각해봤지만, 이미 오래 전에 맹세한 일 아닌가. 통찰안은 자기 가슴 안에만 묻기로.
“그래도 축배는 들어야겠지?”
한서진은 퇴원하자마자 방문할 레스토랑 예약을 잡았다.
재무 보고서를 확인하는 이서나의 얼굴은 심각했다.
‘그룹 전체 유보금…… 이 정도면 내 지시를 착실하게 따랐네.’
본래는 통일 후 북한 개발 사업에 대대적으로 투자하기 위해 준비한 실탄이다. 그룹 전체를 마른 걸레를 쥐어짜내듯이 해서 만들어낸 자금.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는 돈이지만, 그래도 곳곳에 무리를 한 점이 눈에 보인다.
걸고넘어지면 결격 사유쯤이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 불법성은 그리 크지 않지만.
‘문제는 유보금 따위가 아니야.’
그룹에는 유보금 말고도 더 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강압에 의한 무노조 정책. 백혈병 피해자들에 대한 압박과 강요, 무시. 협력업체들을 상대로 관행처럼 굳어진 강압적인 밀어붙이기 계약. 약탈하듯이 뺏어온 특허 기술들. 그리고 관공서와 밀착된 관계.
그 하나하나가 제대로 터지기만 한다면, 그리고 처벌된다면 그룹을 크게 흔들 수 있는 것들이다. 김시형 검사는 결코 봐주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TF팀이 어디까지 조사했고, 어디까지 고발하느냐가 관건이다.
‘아니, 아니야. 지금 중요한 건 이따위 자잘한 것들이 아니잖아!’
그러나 이서나는 그 모든 것들마저 자잘한 것으로 치부했다.
경영자로서 자기합리화나 도피를 하려는 것과는 달랐다. 그 모든 것들을 자잘하게 보이게끔 만드는, 정말 큰 문제가 바로 존재했던 것이다.
‘100조 원의 비자금…… 이걸 제대로 건드리면 그룹은 흔적도 없이 분해되고 말 거야.’
예전 같으면 감히 그런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H그룹에 1위를 내주었어도, 대한민국 최고 클래스의 재벌 그룹이니. 대마는 절대로 죽지 않는 법이다.
―어떻게 이 정도로 만족해요? 오빠는 지금보다 더 성공하실 수 있는데.
―전 그저 오빠가 더 성공했으면 좋겠어요.
―만약 언니가 지금 저라면, 어떤 꿈을 품으실 것 같아요?
그러나 송하나의 눈빛을 떠올리자 그런 자신감은 급격하게 흔들렸다.
송하나는 오로지 한서진의 성공만을 원한다. 그녀가 가진 힘은 보잘것없을지 몰라도, 한서진의 힘을 끌어다 쓴다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으리라.
지금으로서는 한서진보다 송하나가 더 무서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 아무 문제가 안 된다.
넓은 시야, 배짱, 그리고 야심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모든 실무는 TF팀이 철저히 해줄 것이고, 법질서의 실행은 검찰과 사법부가 대신 해줄 테니까.
「회장님, 이용무 부회장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이용무가 비서의 안내를 받아 회장실에 들어왔다. 그는 묘한 눈으로 회장실을 둘러본 뒤 객석에 앉았다.
“누나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걸 보니 기분이 묘하네.”
“그러고 보니 내가 회장이 되고 여기서 보는 건 처음인가?”
“처음이지. 조금 어색해도 이해해.”
“이해할게.”
한때 이 회장실은 이용무의 것이 될 예정이었다. 누구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서나 본인조차도.
그러나 운명은 이렇게 변했다.
“하나를 만났어.”
“어땠어?”
“TF팀의 능력은 확인하지 못했어. 하나가 잘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마 일부러 말해주지 않았을 수도 있어. 어차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TF팀을 이끄는 머리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지.”
“그래, 하나가 바라보는 방향이 어딘지가 중요하지.”
“…….”
어색한 침묵이 두 남매를 잠시 감쌌다. 이서나의 묵직한 어조에서 이용무도 뭔가를 느낀 것이다.
“타협은 힘들 것 같아.”
“하나가 아무리 그래도.”
“하나는 우리뿐만 아니라, 누구와도 타협을 할 생각이 없어. 걔 목적은 한 박사가 매입한 국채가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는 거야. 그래서 국가 재정을 감시한답시고 TF팀도 만든 거고.”
“그건 이해되네. 500조 원을 무사히 돌려받으려면 재정이 허투루 새지 않게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겠지. 나라도 그랬을 것 같아.”
이서나는 일부러 송하나가 품은 진정한 야망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했다.
“500조 원은 1차적 지원금이고, 앞으로 1, 2조 달러는 거뜬히 내놓을 기세야. 그 외에도 추가적으로 얼마든지 더 내놓을 수 있다고 봐.”
비교적 태연하던 이용무도 그 금액에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놀라워했다. 일개 개인이 보유한 돈이라는 것도 놀랍지만, 그런 거액을 선뜻 재건사업에 내놓겠다니.
“엄청난데. 그런 큰돈을 내놨으니 국가 재정을 떡처럼 주무르고 싶긴 하겠어. 심지어 명분까지 있잖아? 가만, 재정 감시를 핑계로 산업계와 재계를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의도 아닌가?”
비록 회장직에서 밀려났지만, 이용무는 나름 번뜩이는 판단력을 보였다. 이서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어쨌든 간에 TF팀은 양보나 타협이 없을 거야.”
“철저히 대비해야겠군. 누나가 고생이 많겠어.”
“비아냥거림으로 들리는데.”
“회장직도 뺏겼는데, 이 정도 투정은 들어줄 만하지 않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잖아.”
“누나 같으면 그게 되겠어?”
“…….”
이서나는 말없이 그를 주시했다. 어차피 그와 다툼을 벌이기 위해 만든 자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말을 돌렸다.
“비자금은 정말 안전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물론 그룹 내에 산적한 문제도 많아. 김시형 검사도 만만치 않게 정의감이 높은 남자고. ‘진짜’ 본보기이니 그룹을 뿌리부터 뒤흔들겠지.”
이서나는 한 호흡 쉰 뒤, 자신을 노려보듯 주시하는 이용무를 직시했다.
“그래도 비자금만큼 큰 문제는 없지. 김시형 검사가 그걸 물고 늘어지면, 그룹은 파멸이야.”
“…….”
“정말 안전해?”
이용무는 여전히 노려보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자존심이 몹시 상한 맹호의 눈빛이었다.
“100% 안전해. 장담할 수 있어.”
“…….”
“아버지께서 직접 만드신 거야. 누나는 아버지를 못 믿어?”
이서나는 묵묵히 주시하다가 차분히 끄덕였다. 그것은 수긍이라기보다는 타협에 가까웠다.
“믿어볼게.”
========== 작품 후기 ==========
통찰안이 결국 돌아왔습니다!
주인놈이 풀파워 레벨에 도무지 적응을 못하자 레벨을 대폭 낮춰서 돌아왔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