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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306화 (306/609)

00306  Queens  =========================================================================

“우리, 같은 과잖아요?”

맑은 미소를 가만히 응시하며, 이서나는 천천히 생각했다. 이게 대관절 무슨 뜻일까.

자신과 송하나는 전공이 전혀 다르다. 자신은 경제를 전공했고, 그녀는 한서진을 따라 반도체공학을 선택했다. 아마 전공을 말하는 것은 아니리라.

그간 그녀가 알던 송하나는 복잡한 가정환경에서 적당히 마음고생을 하며 자란 재벌 아가씨였다. 그러다가 행운이 닿아 H그룹의 정식 후계자까지 되었다.

재벌 딸인 그녀에게는 우스운 표현이지만,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 TF팀을 맡은 것 등 최근의 행보는 조금 의아했지만, 약혼자를 조금이라도 내조하고픈 어린 아가씨의 기특함이라고 여겼다.

불현듯 이서나는 느껴지는 게 있었다.

“혹시 TF팀…… 처음부터 네가 생각한 거니? 한 박사한테 부탁해서 맡은 게 아니라?”

송하나는 대답 대신 작게 웃었다. 이서나에게는 그 제스처만으로도 충분했다.

“알고 보니 꽤 야심가였구나. 나는 네가 신사임당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얼마든지 병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

이서나는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한서진은 야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미국이 그의 옆에 있으니까.

그를 오롯이 내조하는 것만으로도 대한민국 최고통치자 이상의 야망을 충족할 수 있게 된다. 송하나의 말이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면, 자신이 지금까지 그녀를 단단히 잘못 본 것이다.

이서나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차가운 긴장감이 등을 타고 흘렀다. ‘로비’를 한다는 마음으로 나왔는데, 알고 보니 최고결정권자인 줄 모르고 들이댄 셈이 되었다.

그녀는 머릿속에 준비했던 멘트, 대가, 계획 등 일체의 생각을 폐기했다. 그런 것은 이제 와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우리 그룹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원하는 게 뭐냐. 대체 왜 이러는 거냐. 그런 질문은 애초에 결격, 이서나는 시원스럽게 본질을 찔렀다.

“그거야 검찰에 물어보셔야죠.”

“하지만 그 검찰을 휘두르는 건 TF팀이잖아.”

“우리는 조사 결과를 검찰에 넘길 뿐이에요. 타당성을 검토하고, 수사나 기소에 착수하는 건 검찰의 몫이지요. 거기까진 개입하지 않아요.”

“이 나라에서 한서진 박사의 고발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검사가 있다고 생각해? 더군다나 김시형 검사는 한 박사의 후원을 받고 있는데.”

“고발 내용이 타당하면 수사하면 되고, 불합리하면 무시하면 그만 아닌가요?”

쳇바퀴 도는 듯한 대화에 이서나는 가슴이 갑갑해졌다.

본질적으로 송하나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TF팀은 엄연히 공권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다.

이서나는 조금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확실히 우리나라는 문제가 산적해 있어. 하지만 그걸 단시간에 들어내겠다는 것은 위험해. 수술도 환자가 견딜 체력이 있을 때 들어가잖아.”

“그거야 정치권에서 판단할 일이고요. TF팀은 구체적인 병만 진단해줄 뿐이에요. 치료나 수술에 옮길 의지가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가 같은 과라고 했지?”

“네, 그랬어요.”

“그렇다면 이건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아닐 텐데? 이 나라가 깨끗하고 투명해지는 게 진짜 네가 바라는 거야? 그건 아니잖아?”

이서나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진성그룹의 팽창, 그리고 그 경영권을 자신이 쥐는 것이었다. 가장 선명하고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 욕망의 형태.

송하나는 절대로 정의의 사도나 사회 혁명가가 아니다.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순순히 긍정했다.

“네, 맞아요. 제가 혁명 투사는 아니죠.”

“…….”

“제가 바라는 게 뭐일 것 같으세요?”

차분한 눈빛에, 이서나는 그게 뭔지 알 것 같았다.

“한 박사의 성공…….”

“맞아요.”

“이미 한서진 박사는 어마어마하게 성공했어. 한국 역사상 이보다 더 성공한 인물은 나올 수 없을 거야.”

왕족, 독재자에 버금가는 어마어마한 재력, 과학자로서 쌓은 드높은 명성, 그리고 미국의 영웅이자 영원한 친구라는 위치.

천 년이 흐른다 해도, 이보다 더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 이서나는 단언컨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 정도로 만족해요?”

“…….”

“오빠는 지금보다 더 성공하실 수 있는데.”

불현듯 이서나는 오래 전 일이 생각났다. 바로 송하나와 단둘이서 나눴던 속마음의 일부.

―호텔과 물산 사업이면 충분하지 않아요? 그런데 언니는 만족하지 못하시는 것 같아요.

―어떻게 이 정도로 만족하니? 조금만 더 하면 그룹 회장이 될 수도 있는데.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이다.

혹시 송하나는 그때 대화를 기억하고 지금 말을 꺼낸 것일까, 아니면 정말 그녀의 말대로 ‘같은 과’이어서일까.

“그 성공의 수단이 꼭 이런 식일 필요는 없잖니.”

“굳이 불필요한 수익 쉐어를 할 필요도 없죠. 특히 국민 정서가 안 좋은 집단하고.”

“…….”

“오빠의 성공에는 재력만 포함되는 게 아니거든요. 전 명예도 중요하게 생각해요.”

“두루두루 쥐겠다는 거구나.”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으니까요.”

스무 살 미인의 웃는 얼굴에서 긴장을 느낄 줄이야.

본래 TF팀을 발족한 목적은 국가 재정에서 새는 돈을 감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야 한서진이 사들인 특별 국채를 상환할 수 있을 테니.

초기부터 재정 흐름을 단단히 단속하겠다는 의지로, 세상은 이해했다.

그러나 진정한 목적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이서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돈을 못 돌려받는 건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구나.”

“돈을 받지 못해도 빚은 영구적으로 남죠. 오히려 더 큰소리를 칠 수 있구요.”

만기 상환이 연장되면 연장될수록, 국가는 사채의 늪에 얽매여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TF팀의 영향력 증대라는 결과를 낳는다.

모두가 TF팀의 눈치를 보게 될 것이다. 중앙정부, 지자체, 공기업, 민간기업, 사학재단을 비롯한 각종 협회 등 단체, 그리고 국민 개개인까지.

심지어 명분마저 TF팀에 있다. 법리에 따라 비합법적인 재정 흐름을 감시할 뿐이니. 오히려 대다수는 ‘물이 투명해지는 것’을 매우 반길지도 모른다.

국가를 장악하는데 실리와 명분을 모두 쥐겠다는 것. 이서나는 조금 오싹해졌다.

“넌…… 한 박사를 이 나라의 왕이라도 만들 생각이니?”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말씀드렸잖아요.”

송하나는 실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전 그저 오빠가 더 성공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전부예요.”

“…….”

“만약 언니가 지금 저라면, 어떤 꿈을 품으실 것 같아요? 그리고 어떡하실 것 같아요?”

그 말에서 이서나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아서 왕은 이 세상이 가짜라고 했습니다. 아서 왕이 원하는 것은 이 세상의 소멸입니다.

스칼린은 무릎을 모아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서진의 깊은 당부가 머릿속을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박사님은 리온인데, 왜 리온이 지구가 없어지기를 바란다는 걸까?’

그녀는 가만히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의 향기, 드넓은 산맥과 벌판, 그리고 풀잎에 매달려 쉬지 않고 우는 작은 벌레들까지.

눈에 담기는 생생한 풍경은 그 어느 것 하나 거짓이라는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애초에 이곳을 그저 생생한 꿈이라고만 치부했던 것부터 오류였을지도 모른다.

‘레노지안…… 이곳은 대체 어디일까? 어느 곳에 존재하는 세상일까?’

다른 차원, 혹은 머나먼 우주.

이곳이 정말 허구의 꿈이라는 명제를 제외하면, 그녀의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그 정도 추측이 한계였다.

지구와 레노지안이 동시에 실존하는 세상이라면, 그 두 차원에 걸쳐 존재하는 자신과 한서진은? 심지어 그는 지구, 그리고 레노지안 두 곳에서 존귀한 존재이지 않은가?

그에 비해 자신은…….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시오?”

“아, 리온.”

‘약혼자’가 뒤에서 나타나자 그녀는 어설프게 웃으며 돌아봤다. 어느새 불쑥 내밀어진 두 팔이 그녀를 가볍게 안아 올리며 안아든다.

그의 스킨쉽은 거침이 없고, 자신만만한 품격이 배여 있다. 품안에 녹아드는 듯한 포근함에 그녀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만약 ‘리온’이 아닌 한서진이 안아준다면, 그것은 어떤 느낌일까. 지금과 비슷할까 아니면…….

“그런데 리온, 궁금한 게 있어요.”

“얼마든지 물어보시오.”

“왕이 이렇게 오랫동안 왕성을 떠나 있어도 되는 거예요? 그것도 수행원도 없이 혼자서…….”

“이 정도를 고행으로 여겨서야 군주의 자질이 있다고 할 수 없지. 그리고 초룡 포획은 너무 위험해서, 수행원을 거느리고 다닐 수 없소.”

리온은 가만히 먼 하늘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만약 지금 당장이라도 초룡이 나타난다면 몇 날 며칠에 걸쳐 쫓아야 할 텐데, 수행원을 거느리고 있으면 어떻겠소?”

“……아, 그렇군요. 그럼 제가 방해가 되면…….”

“그대는 절대 방해가 되지 않소. 내가 본 그 누구보다 강인한 기사요.”

여기사가 아닌 기사라고 칭해준다. 그것도 애정을 듬뿍 담은 눈빛으로.

그는 단지 여자로서 자신을 바라보는 게 아니다. 여자로서, 그리고 기사이자 인생의 동반자로서도 바라봐준다. 그가 품고 있는 유대감이 얼마나 깊고 넓을지, 스칼린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행복해. 이런 눈빛으로 날 봐주다니…….’

‘신효진’에게는 그런 사람이 한 번도 없었다. 리온처럼 모든 것을 포용해준 사람은. 그에 비해 ‘스칼린’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때였다.

별안간 리온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스칼린은 바짝 긴장해서 저도 모르게 전방을 몇 차례 훑었다. 이미 그녀의 몸에 배인 반사동작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수 따위가 등장했다면 당연히 그녀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감각을 한껏 끌어올리고 집중해도, 잡히는 기척이나 마력의 흐름은 없었다.

“리온, 무슨 일이에요?”

“쉿.”

목소리를 극도로 죽여 말했음에도 리온은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댔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초. 룡.’

그녀는 순간적으로 놀라서 입을 손에 댔다. 리온이 다시 입모양으로 말했다.

‘초. 룡. 이. 있. 소.’

초룡이 근처에?

스칼린은 경악해서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리온은 안고 있던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바닥에 글을 썼다.

‘먹이감도 없는 곳인데 초룡이 있소.’

‘전 아무것도 안 느껴져요.’

‘초룡은 일반 용과는 전혀 다르오. 제대로 기척을 숨기면 대마법사들도 찾아내기 어렵소.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되오.’

리온은 극도로 소리를 죽인 채 앞장을 섰다. 바짝 긴장한 스칼린도 걸음걸이를 조심하며 그를 따랐다.

‘초룡이 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지?’

여행을 하면서 용은 한 번 본 적 있다. 산맥을 자유롭게 오가며 서식하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순한 용이었다.

그 용만 해도 상당히 컸는데, 초룡은 그보다 훨씬 더 크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나타났다. 리온은 조심스럽게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스칼린은 숨을 멈추며 놀랐다.

‘저, 저게 초룡이라고?’

멀리 있는 존재는 그녀가 상상했던 모습과 전혀 달랐다.

늘씬한 발을 물에 담그고 첨벙거리고 있는, 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성숙한 소녀였던 것이다.

그 순간 소녀의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했다. 동시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광폭한 기운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모든 초목이 빠른 속도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리온은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켰다.

“이런, 들켰소.”

========== 작품 후기 ==========

여러분들이 무슨 말씀을 하실지 알아요.

“어떻게 이 정도에 만족해요, 실탄님은 지금보다 더 연참하실 수 있는데.” 이러시겠죠.

하지만 전 이 정도에도 만족합니다.

실탄의 ㅅ은 소박함의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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