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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305화 (305/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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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발표를 지켜보는 이서나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사택 분위기는 싸늘했다.

거실에 모인 가족과 측근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채 그녀의 눈치만 살폈다.

비록 이창용 회장이 주요 지분을 쥐고 있지만 일선에서 물러난 지금, 이서나는 엄연한 그룹의 총수였다. 전자 부문의 반도체 사업 몰락을 무사히 수습한 공적 덕에, 그룹 내에서 그녀의 위상은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았다.

그녀의 작은 표정 하나하나에 계열사 사장들의 희비가 갈리는 것은 당연했다.

“최 실장님. 그리고 사장 여러분.”

덤덤한 목소리에 중년의 남자는 벌떡 일어나듯이 고개를 숙였다.

“예, 회장님. 말씀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룹의 총력을 기울여 검찰 수사를 대비하세요. 이미 일은 벌어졌습니다.”

“저어, H그룹이 가볍게 넘어간 것을 보면, 우리 진성그룹도 무난하게 지나갈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

이서나가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최 실장은 입을 다물고 마른 침을 삼켰다. 스산한 분위기에 다른 사장들도 제대로 발언하지 못하고 침묵만 지켰다.

“여러분들이 오해하시는 걸 짚어드리자면, 검찰은 특별히 H그룹을 봐준 게 아닙니다.”

“하지만 H그룹과 한서진 박사는…….”

“특별한 관계고, 어느 정도 봐줄 여지는 있겠죠. 그러나 검찰이 H그룹을 표적 수사할 만큼 재질이 나쁘지는 않다는 것, 이게 바로 본질입니다.”

“…….”

“설마 검찰이 530억 원이라고 언급한 비자금 액수가 축소 발표한 거라고 생각하세요?”

H그룹의 규모를 생각하면 530억 원의 비자금은 너무 적은 액수였다. 검찰이 고작 530억을 족치자고 칼을 뽑아들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도 H그룹의 총 비자금이 530억이라는 말을 믿지 않을 테니.

그런 시각을 가진 사장들은 이번 검찰 발표가 쇼일 거라고 생각했다. 재정 감시 TF팀이 발족했어도, 진성그룹 정도면 면죄부가 주어질 거라 여겼다.

“다들 큰 착각을 하고 계시네요.”

“…….”

“백철중 회장님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신 이후로 경영 방침을 전격적으로 바꾸셨습니다. 비자금 수십 조 원? 그것도 다 옛날이야기입니다.”

살벌함이 뚝뚝 흐르는 음색에 사장들은 진땀을 흘렸다. 이서나는 그들을 한 명 한 명 훑어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H그룹 같은 대기업이 모든 비자금을 정리하고, 미처 남은 잔액이 530억 밖에 안 된다는 건 사실 상을 줘도 부족한 일이에요. 김시형 검사가 아닌 다른 검사였다면 아예 수사 자체를 종결했을 겁니다. 그런데도 검찰은 전액 몰수를 결정했습니다.”

시퍼런 날이 선 목소리, 그제야 사장들은 자신들이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530억의 비자금이 이런 처벌을 받았는데, 수천억 대 이상의 비자금은 어떨까요? 수 조 원 이상의 비자금은요?”

“……죄송합니다, 회장님.”

최 실장이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자신들이 안일했음을 깨달은 계열사장들의 표정도 숙연해졌다.

이서나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비자금뿐만이 아닙니다. 무노조 정책, 미래기획실 등 우리 그룹은 TF팀이 공격하기 좋은 구실이 산적해 있어요. 검찰이 순순히 봐줄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법에 걸리는 모든 것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거라 생각하고, 대비하세요. 아시겠나요?”

“예, 회장님.”

계열사장들은 서둘러 물러갔다.

이서나는 수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앞으로 그룹에 본격적인 피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진성그룹뿐만이 아니다.

많은 이들은 TF팀이 재벌 집단을 타겟으로 삼았다고 오해하고 있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TF팀은 결국 이 나라 전체를 쥐어짤 거야. 재계든, 정계든, 학계든…….’

부정하게 새는 돈이라면, 어느 영역이든 간에 TF팀은 사정없이 들이닥칠 것이다. H그룹의 530억 비자금 몰수는 앞으로 벌어질 가차 없는 행보를 예고한 거나 다름없었다.

이 나라는 정부부터 기업인, 그리고 국민들까지 모두 몸으로 깨닫게 되리라. 사채가 얼마나 지독하고 무서운지를.

계열사장들이 모두 물러가고 최 실장만 남은 가운데, 이서나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용무 부회장한테 연락 해줘요.”

무노조, 강압적인 근로 환경, 협력업체에 대한 겁박 등 검찰이 물고 늘어질 만한 건수가 산적해 있지만, 무엇보다 100조 원에 육박하는 그룹 총비자금이 가장 큰 문제였다.

제대로 턴다면 비자금 하나만으로 그룹이 뿌리부터 뒤흔들릴 수도 있었다.

‘아버지가 어련히 알아서 처리하셨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야.’

비자금을 육성한 것은 부친 이창용의 지시, 이용무는 관리를 승계 받았을 뿐이다.

이서나는 쓴웃음이 나왔다.

부친은 자신의 경영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여성이라는 약점을 끝내 저버리지 못했다. 그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하니 저절로 입안에 쓴맛이 고였다.

그녀는 검찰이 비자금을 찾아내지 못하리라 믿었다. 부친이 그렇게 허술하게 일을 처리했을 리가 없다.

다만 불안한 것은 TF팀의 조사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표본이 없다는 점이다.

상당한 규모의 전문가 집단이지만 이제 발족한 점을 고려하면, 그룹 비자금만큼은 손쉽게 찾아내지 못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안심하고 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꺼림칙함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에는…….’

이용무 역시 검찰의 발표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연락이 간지 얼마 되지 않아 도착했다. 적어도 쓸데없는 기싸움을 할 의사는 없다는 걸 확인한 것으로, 일단 이서나는 만족했다.

“비자금 때문이야?”

이용무는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말을 꺼냈다. 이서나는 차분히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비자금은 확실하게 관리하고 있어. TF팀은 절대 찾아내지 못해.”

“문제는 우리가 TF팀의 조사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는 거야.”

“머리 좀 좋은 애들 여럿 모아놓는다고 사정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많은 그룹들이 그 고생을 해가며 사정팀에 투자를 할 리가 없겠지.”

이서나도 공감하는 말이었다.

전문가 수백 명을 모아놓는다고 단번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면, 뭐 하러 기관을 만든다고 그 고생을 하겠는가.

그러나 그녀가 신경 쓰이는 점은 따로 있었다.

“그래도 한서진 박사가 주도하는 일이잖아.”

“그게 왜? 한서진 박사는 반도체 전문가지, 회계전문가는 아니잖아.”

“한서진 박사 뒤에는 미국이 있지.”

“…….”

“미국의 정보력까지 속일 수 있겠니?”

이용무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눈빛을 보면 고려를 안 했던 것은 아닌 듯 하다. 아직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해 답답해하고 있는 듯했다.

“미국 첩보기관이 그간 우리 그룹 비자금을 어느 선까지 추적하고 있었느냐가 관건이겠지.”

“국정원 라인에서는 아무 조언도 없어?”

“걔들 수준을 알면서 물어? 결국 내가 직접 대처해야 할 일이야.”

“네가 아니라 우리지.”

이서나는 덤덤하게 그의 말을 고쳐 주었다. 이용무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으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지금 둘이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에서, 남매는 절절히 공감하고 있었다.

이용무가 담담히 말을 돌렸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최악의 경우가 닥치면, 그땐 날 버려도 상관없어.”

“그런 일은 없어야 해.”

“미리 최악을 상정하자는 것뿐이야. 자신 없다는 소리가 아니야.”

이서나는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세상을 다 가진 듯이 오만하던 황태자가 조금은 변한 듯이 느껴졌다. 이번 일에 어깨를 함께 하는 데 있어, 믿고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속마음을 조금 털어놓았다.

“조만간 하나를 만나볼 생각이야.”

“하나를?”

이서나가 꺼낸 말에 이용무는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놀랐다.

“누나가 걔를 왜? 백철중 회장님을 뵈는 게 낫지 않아? 나도 그럴 생각이었고.”

“아니야. TF팀에 있어서는 하나가 전적인 권한자야. 너도 알다시피 한서진 박사는 이런 일에 신경 쓸 사람도 아니고.”

“……하나가 설마 우리를 죽이려고까지 할까?”

이용무는 살짝 걱정이 담긴 음색으로 물었다.

지난 세월, 송하나는 H그룹 오너 일가에서 외톨이이긴 했으나, 이서나 남매와는 그럭저럭 친하게 지내왔다.

이서나하고도 언니 동생 하면서 자주 쇼핑도 하고, 그렇게 지내는 편이다.

“몰라. 그러니까 알아봐야지. 하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내가 만나볼게, 그럼.”

“아저씨보다는 언니하고 이야기하는 게 편하지 않겠어? 내가 만나볼 테니까, 너는 조용히 있어.”

이용무는 진심으로 불쾌한 듯이 말했다.

“근데 누나는 언니인데 왜 나는 아직도 아저씨야?”

이서나는 어렵지 않게 송하나와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둘은 뉴월드백화점 본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이서나는 약속시간보다 30분 일찍 와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그리고 드디어 송하나가 도착했다.

“하나야, 오랜만이네.”

“언니, 반가워요.”

“어쩜 더 예뻐진다니. 부럽다, 정말.”

“언니도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이서나와 송하나는 손을 맞잡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남들이 보기에는 나이 차이 나는 친한 자매처럼 보일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지내왔고.

“그나저나 너, 정말 많이 달라졌다.”

“어떻게요?”

“그냥, 두루두루. 되게 여유 있어 보여.”

“언니 같은 분이 그런 말씀하시니까 어색해요.”

“아니야, 정말인걸.”

옛날의 송하나는 예쁜 외모를 가진 백철중의 막내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룹의 승계 구도에서는 철저히 밀려나 있었고, 그래서 때때로 수척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느껴지는 이미지는 완전히 달랐다. 은은한 여왕의 향취가 느껴진다면, 너무 과장된 것일까.

“늦었지만 약혼 축하해. 회장님한테 들었어.”

“고마워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지 골라. 약혼 선물이야.”

“그럼 기꺼이 고를게요.”

둘은 손을 잡고 즐겁게 쇼핑했다. 웃으면서 매장을 돌아다니며 제품을 고르고, 특별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전담 매니저가 콜을 받고 신상품을 들고 라운지로 찾아와서 개별 쇼핑을 가지기도 했다.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 없는 듯한 관계, 그러나 이서나는 미묘한 거리감을 느꼈다.

“검찰 조사 때문에 회장님이 많이 심려가 깊으시지? 나중에 한 번 찾아뵈어야 하는데.”

적당한 타이밍을 찾던 이서나는 은근히 돌려서 말을 꺼냈다.

새로 산 팔찌를 차고 들여다보며 즐거워하던 송하나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무색의 눈빛에서 이서나는 묘한 압박감을 느꼈다.

“언니.”

“응.”

“괜찮으니까 그냥 솔직히 말씀하셔도 돼요.”

“…….”

“우리, 같은 과잖아요?”

화사한 미소가 생글거리는 입가, 그러나 눈동자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거울을 볼 때마다 곧잘 접하곤 하던 미소, 이서나는 손끝에서 가볍게 소름이 돋았다. 지금 거울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면, 저만 그렇게 생각했었나요?”

========== 작품 후기 ==========

“왜 나는 아직도 아저씨야?”

한 번 아재는 영원한 아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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