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304화 (304/609)

00304  탄생, Task Force  =========================================================================

마스크를 쓴 백철중은 휠체어를 탄 채 검찰에 출두했다.

재정 감시 TF팀이 발족하고 실행한 첫 고발이었기에, 그리고 상대가 오랫동안 재계 2위에 머무르다가 마침내 1위를 제친 H그룹 총수였기에,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기자단에 에워싸인 휠체어는 앞으로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경호원들이 몸으로 진입로를 뚫어보려 했지만, 기자들은 반쯤 막무가내였다.

언제 H그룹 총수의 이런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보겠는가. 그들도 반쯤 목숨을 걸고 인터뷰와 취재에 나섰다.

“회장님! 재정 감시 TF팀의 고발로 이번 소환 조사가 성사되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부정부패 척결로 유명한 김시형 검사가 담당검사라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H그룹 비자금 조사라고 들었습니다만,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요?”

“한 말씀만 해주시죠!”

세간에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재벌 총수,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마음껏 마이크를 들이댈 수 있을까. 기자들은 경호원들과 몸싸움을 벌여가며, 어떻게든 그의 한 마디라도 따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백철중은 초췌한 안색으로 끝내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쉬 세례를 묵묵히 받으며, 그는 경호원과 검찰청 직원들의 도움으로 겨우 입장할 수 있었다.

“앉으십시오. 김시형 검사입니다.”

젊은 남자 검사가 그를 맞이했다. 백철중도 익히 얼굴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직접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지만.

현직 대통령의 팔다리를 사정없이 잘라내고, 재계까지 세차게 뒤흔들어버린 스타 검사.

비록 아직 평검사이지만 그 정의감을 높이 산 한서진의 후원을 받고 있어, 검찰총장보다 더 무섭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김시형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시겠지만 저는 TF팀의 고발을 받고 소환 조사를 결정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530억의 그룹 비자금에 관해서 상세히 소명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

“H그룹이 다른 어떤 그룹보다 깨끗한 경영 체제로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 잘 알고 있습니다. 30조 원이 넘는 그룹 비자금도 순차적으로 줄여서 530억이 되었고요. 사실 그룹의 규모에 비하면 이 정도는 깜빡 잊은 용돈이나 다름없죠.”

의미심장한 말에 백철중은 차분히 물었다.

“혹시 내가 누군지 알고 있소?”

그가 H그룹 재벌 총수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의 질문이 뜻한 바는 그게 아니었다.

“송하나 양의 부친 아닙니까.”

“…….”

“그리고 송하나 양은 한서진 박사님과 깊은 사이기도 하고요.”

백철중은 덤덤히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자기 아비를 검찰에 팔아넘길 줄은 몰랐소. 내가 걔를 어떻게 키웠는데.”

TF팀이 자신을 검찰에 넘긴 뒤로, 아직까지 그는 딸을 만나보지 못했다. 딸은 철저히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너무 따님을 원망하실 것은 없습니다. 따님은 적당한 본보기를 세우려는 것뿐이니까요.”

“알고 있소. 다만 사전에 미리 귀띔이라도 줬으면, 이렇게 답답하지도 않았을 거요. 아비한테 너무하잖소.”

한서진은 H그룹과 각별한 사이다.

그런데 그의 산하에 있는 TF팀이 H그룹을 적당히 봐준다면, TF팀의 정체성 자체가 혼란이 생긴다. 오히려 TF팀이 H그룹을 엄히 추궁할수록 운신의 폭이 커진다.

다행히 H그룹은 꽤 오랫동안 그룹 체질 개선을 해왔기에 크게 처벌할 수 있는 빌미가 없다.

그에 비해, 다른 그룹들은 이번 소환 조사를 떨면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백철중도 그런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딸이 괘씸하다는 것도 진심이 아니고, 자기 남자 위하느라 부친을 소홀히 대하는 게 조금 한탄스러웠을 뿐이다. 딸자식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는 심정이랄까.

“검사님은 우리 그룹이 어떡하기를 바랍니까?”

“H그룹이 강하게 얻어맞을수록, 앞으로 TF팀이 벌일 수 있는 활약도 더 많아집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이 나라가 청렴해지는 게 아니라, 우리 H그룹이 번창하는 겁니다.”

“송하나 양은 그 두 가지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백철중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검사님은 내 딸이 검사님처럼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 TF팀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시오?”

무언가를 느꼈는지, 김시형은 입을 다물었다. 착 가라앉은 백철중의 미소는 야릇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너무 편안한 방식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구려.”

“…….”

“어쨌든 비자금 수사에는 적극 협조하겠소. 다만 실형만큼은 피해 주시구려. 그래도 친아버지인데 설마 하나가 실형까지 원한 것은 아니겠지?”

“그렇지는 않습니다.”

TF팀, 즉 송하나가 원한 것은 H그룹이 올바른 본보기가 되어주는 것이지, 아버지를 감옥에 넣는 게 아니다.

“남은 530억의 비자금은 국고로 몰수하되, 추가 추징금은 그동안의 경영 정상화 노력을 정상 참작하여 감면하겠습니다. 임직원을 기소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 그룹이 그 정도에서 그친다면, 다른 그룹들에는 피바람이 불겠군.”

백철중은 덤덤히 받아들였다.

“오늘 조사가 끝나고 나서 딸내미 얼굴을 볼 수 있으면 좋겠군요. 요즘 너무 이 아버지를 피한단 말이지. 그래도 미안한 마음은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인가.”

김시형은 묘한 눈으로 백철중을 주시했다.

딸과 사전에 약속을 나눈 것은 분명 아니다. 헌데도 딸의 마음, 그리고 딸이 그리는 그림을 이해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딸의 생각을 지지하고, 밀어주고 있다. 검찰청 포토라인에서 구겨지는 체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내 딸이 검사님처럼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 TF팀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시오?

김시형은 좀 전에 백철중이 한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TF팀이 올바르게 역할을 수행하면, 국가 재정이 청결해진다. 국고의 돈이 도둑들에게 새어나가는 일이 없어진다.

처음 그는 송하나가 정의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일을 기획한 거라 생각했다. 헌데 백철중은 그게 아니라고 넌지시 암시를 던져 주었다.

‘어디까지나 한 박사님을 위할 뿐이라는 것인가.’

아마 그게 맞을 것이다.

한서진이 국가에 빌려준 돈과 그로 인한 영향력 증대. 어쩌면 송하나는 그것 외에는 무관심한 것은 아닐까.

TF팀의 가동으로 국가 재정이 건전해져도 그것은 부수적인 결과일 뿐, 그녀의 목적은 다른 데 있는 것이다.

백철중은 그걸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김시형은 차분히 그를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송하나 양이 한서진 박사님만을 위할 뿐이라 해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

“어쨌거나 나라 곳곳에 있는 도둑을 때려잡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니까요.”

“검사가 정의감이 충만한 게 잘못된 일은 아니지. 검사님 같은 검사가 많은 게, 어쩌면 더 좋을 수도 있을 거요.”

백철중은 말했다. 자신이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H그룹이 번창하는 것이라고.

김시형은 그의 담담한 음색에서 선악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불꽃을 느꼈다. 재벌의 진짜 모습을 한 조각이나마 엿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백철중은 김시형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했고, 모든 것을 인정했다. 조서 작성을 완료한 뒤 백철중은 일어섰다.

“이제 가도 되는 거요?”

“물론입니다.”

“몰수 준비가 끝나면 언제든지 편하게 발표하시구려.”

악수를 나누고, 둘은 헤어졌다. 김시형은 조사실 밖까지만 그를 배웅했다.

검찰청 밖은 여전히 기자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생각보다 일찍 나선 백철중을 보고 놀라워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댔다.

“철야 압박 조사가 예상됐는데, 이렇게 일찍 조사를 마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혹시 검찰이 내민 모든 혐의를 인정하셨나요?”

“총 비자금이 수십 조 원에 달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타고 계시는 휠체어는 어디 제품입니까?”

백철중은 휠체어를 탄 채 쏟아지는 플래시를 받으며, 인파를 뚫고 겨우 이동했다. 그를 태운 세단은 속도를 높여 그곳을 벗어났고, 그제야 그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딸자식 키워봤자 소용없다더니.”

자기 아버지를 검찰까지 출두하게 만들어놓고, 죄송하다는 말 한 마디도 없어? 백철중은 이 일을 두고두고 잊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했다.

그때였다. 차가 속도를 줄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멈췄다. 신호등이 걸린 것도 아닌데.

“무슨 일인가?”

“회장님, 그게 사실은…….”

비서실장이 난처해하는 사이, 갑자기 왼쪽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탔다. 백철중은 느닷없는 침입자의 얼굴을 보고 눈을 찡그렸다.

“하나야, 너……!”

“죄송해요, 아빠. 고생 많았죠.”

송하나는 배시시 웃으며 팔을 잡고 살짝 매달렸다. 마주치기만 하면 혼을 내줄 거라고 벼르고 있었던 백철중은 그 환한 미소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여기 두부 드세요.”

“…….”

그녀가 내민 두부를 말없이 바라보던 백철중은 받아 쥐고는 한 입 깨물었다.

“아빠는 좀 서운하다. 미리 말했으면 얼마든지 이해해줬을 텐데, 이렇게 갑자기 골탕을 먹이는 게 어디 있냐?”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아서요. 죄송해요.”

“하여간 딸년은 키워봤자 소용이 없어. 지 약혼자 밖에 모르니.”

“아이, 왜 그러세요. 김시형 검사님하고 이미 이야기가 다 된 거라구요.”

“그래, 생각보다 분위기는 괜찮더구나.”

풀어진 얼굴로 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백철중은 입을 열었다.

“김시형 검사, 그 친구는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이다. 그런 인물은 타협이 힘들다.”

“그래도 완전히 꽉 막힌 분은 아니에요. 적당히 융통성도 있으신 것 같고, 사고방식도 유연해요.”

“언제부터 그렇게 사회정의에 관심이 많았어?”

조금 민망한 질문이었는지 송하나는 배시시 웃기만 했다.

“제가 신경 쓰는 건 그런 게 아니라…….”

“안다. 농담해본 거야.”

“역시 아빠는 예리하셔.”

“내 딸인데 누구보다 잘 알지. 네가 정의구현은 무슨.”

“저도 아빠가 크게 마음에 안 담아두실 줄 알았어요. 제 아빠니까요.”

“오랜만에 휠체어 타니 옛날 생각도 나고 좋았다. 이십여 년 전만 해도 일 년에 서너 번은 탔던 거 같은데.”

두 부녀는 집으로 향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그나저나 네 엄마가 뿔이 많이 났는데, 어쩔 거냐?”

“그러게요. 안 그래도 핸드폰에 불나려고 해요.”

“난 네 아버지이기 전에 네 엄마의 남편이야. 인석아, 넌 지금 네 엄마의 남자를 검찰에 출두시킨 거다.”

“싹싹 빌어야죠, 뭐.”

“난 중재 안 해줄 거다.”

“아이, 너무 그러시지 말고요.”

차는 시원스럽게 달렸고, 살짝 열린 차창 밖으로 두 부녀의 웃음소리가 흘렀다.

그날 저녁, 모 인터넷 신문사는 소환 조사 내용 분석에 집중한 다른 언론사와 달리, 백철중이 타고 온 휠체어 제품에 대한 집중 분석 기사를 냈다.

그리고 그 휠체어 모델은 직구 사이트에서 순식간에 매진이 되었다.

H그룹의 비자금 조사는 무난히 마무리 되었다.

검찰은 결과 발표 때, 그간 H그룹이 착실하게 그룹의 체질 개선을 해온 점 등 정상참작의 여지가 크다고 밝혔다. 그리하여 530억 원의 비자금을 몰수하는 선에서 모든 처벌을 종결했다.

같은 시각, 생방송으로 검찰 발표를 지켜보는 진성그룹 이서나 회장 일가의 안색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 작품 후기 ==========

“지금 타고 계시는 휠체어는 어디 제품입니까?”

그 순간 입이 근질근질한 것을 참느라 죽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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