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03 탄생, Task Force =========================================================================
TF팀은 첫 목표물로 H그룹을 선택했다.
송하나가 막강한 권한을 쥐었다고 희희낙락하고 있던 백철중 이하 H그룹 고위 관계자들은 화들짝 놀랐다. 그야말로 아군이 포구 방향을 180도로 돌린 상황이 아닌가.
앞으로 한국에서 H그룹이 차지할 위상을 상상하며 즐겁게 업무를 보고 있던 백철중은 보고를 받고 엉덩이에 불이 붙은 듯이 놀랐다.
“재정 감시 TF팀이 우리 그룹을 목표로 삼았다고? 아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저, 저도 그것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TF관계자가 행정부에 넣은 고발 내용을 입수했는데, 거기에…….”
“구체적인 불법 내용이 뭔가?”
“그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은 우리 그룹을 목표로 삼고 조사에 착수했다는 정도인 것 같습니다.”
백철중의 안색은 흙빛이 되었다.
비서실장은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간언했다.
“회장님께서 직접 따님과 통화를 해보심이……. 어쩌면 TF팀에서 따님과 우리 그룹의 관계를 모르고 있어서 이러는 걸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겠어.”
백철중은 당장 송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이 이뤄지지 않았다. 한 번 더 전화를 시도한 뒤 그는 연락 좀 달라고 장문의 톡 메시지까지 남겼다.
‘애가 지금 바쁜가?’
메시지를 확인하면 곧 연락이 올 것이다.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아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으리라. 제아무리 야무져도 아직 어린 나이니까. 어서 빨리 이 심각한 상황을 딸에게 알려야 했다.
한참 후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다급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하나야, TF팀에서 일이 생겼다.”
「무슨 TF팀이요?」
“한 군 밑의 재정 감시 TF팀 말이다. 거기 팀에서 첫 조사 목표로 우리 그룹을 잡았다더구나.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그거 제가 지시한 건데요.」
순간 백철중은 머리가 멍해졌다. 마치 쇠망치로 두개골을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믿는 도끼에 발목을 절단당하는 일이 자신에게 생기다니.
백철중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하나야. 그게 대체 무슨…… 지금 이 아빠가 잘못 들은 거 맞지?”
「국고가 새는지 안 새는지 제대로 감시하려면 특히 기업 납세나 회계 같은 것도 다 봐야 해요. 비자금 같은 거요. 그게 원래는 다 국고로 들어와야 할 돈이었잖아요? 안 그래요?」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거기서 인정하고 넘어갈 순 없었다.
“그, 그래도 왜 하필 우리 그룹이냐? 아니, 하다못해 아빠와 사전에 의논이라도…….”
「제가 H그룹 총수 딸이니까 더욱 먼저 조사해야죠. 그래야 다른 기업이나 조직 기관을 파헤치기 쉬워요. 제대로 본보기가 서잖아요.」
“본을 세우자고 이 추운 날씨에 아빠를 검찰청에 출두시키려는 거냐!”
「아직 추워지려면 멀었어요.」
“하나야!”
「걱정 마세요. 전 아빠를 믿어요. 늘 아빠처럼 합리적으로 경영하는 재벌은 없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이건 천연덕스러운 아이의 순수함인가, 아니면 지 남자 밖에 모르는 교활하고 이기적인 딸인가.
백철중은 지금 통화하는 게 자신이 20년 넘게 애지중지 키워온 딸이 아닌 것 같았다. 혹시 다른 사람이 딸 목소리로 위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막내딸이 이럴 리가 없어!
“집에서 이야기하자. 일찍 들어오너라.”
「오늘 오빠 집에 갈 거예요.」
아무리 약혼한 사이라지만, 안 들어온다는 말을 아비한테 이렇게 노골적으로 해도 되나?
“너 아직 결혼한 거 아니다. 애비 말을 들어야지.”
「아빠가 저랑 평생 살아주실 것도 아니잖아요.」
“하나! 하나야!”
백철중은 애타게 목을 놓아 딸을 불렀지만, 이미 통화는 냉정하게 끊긴 뒤였다.
H그룹은 비상이 걸렸다.
“회계 내역, 다시 샅샅이 훑어 봐! 시효를 안 넘어간 것들은 모조리 찾아내!”
“그룹 비자금은? 안전한가? 그게 제일 중요해!”
“사소한 비리고 뭐도 남김없이 싹 훑어! 걸릴 만한 건 모조리 찾아내!”
백철중 회장의 호통 같은 지시에 그룹 임직원들은 밤을 새워 그룹 전체 자금 흐름을 점검했다. 특히 비자금을 관리하는 비선은 발에 불이 붙은 듯이 뛰어다녔다.
“현재 그룹 전체를 통틀어 530억의 비자금이 남아 있습니다. 회계 처리 자체는 완벽하게 했습니다.”
“그래, 잘 했구만.”
한때 재계 1위였다가 2위로 밀려난 진성그룹의 총 비자금은 100조 원이 넘어갈 것이다. 정확히 말은 안 하지만 이 바닥 장사가 어디 하루 이틀인가? 척 보면 안다.
그에 비해 재계 1위인 H그룹의 총 비자금은 530억 원. 그룹의 규모에 비하면 비자금이라고 하기도 부끄럽다.
말 그대로 쌈짓돈, 아이가 과자를 사먹고 싶어서 학용품 값을 조금 빼돌린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회장님 지시대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비자금을 털어내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직원 복지 증진과 자진 납세, 그리고 자선사업 등에도 특히 중점적으로 털었습니다. 나중에라도 발각되더라도 참작의 여지를 위해서요.”
“잘했네. 530억 밖에 안 남았다니…… 자네가 그동안 정말 열심히 작업했구만.”
원래 H그룹도 상당한 규모의 비자금이 있었다. 어느 재벌 기업들이 그러하듯이.
그러나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다시 살아난 뒤, 백철중은 그룹의 전반적인 체질 개선을 꾸준히 해왔다. 송하나를 후계자로 지정한 후, 깨끗하고 건실한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비자금도 꾸준히 털어버리고, 기업 내부의 불합리한 문제도 차근차근 없애 왔다.
530억은 아직까지 정리 못하고 미처 남은 액수일 뿐이다.
이틀에 걸쳐 그룹 전체를 진단한 백철중은 안심했다.
재계 1위의 대기업이 이렇게나 깨끗할 수 있다니. 만약 세간에 알려지면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것이다.
‘태풍 재해 때 기부도 많이 했고.’
잦은 기부 활동 덕분에 그룹의 이미지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백철중은 느긋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하나는?”
“안 왔어요. 오늘도 안 들어오려나 봐요.”
“이놈의 딸년이! 어디 스무 살 밖에 안 된 게 벌써부터 외박이야!”
“아유, 그냥 놔둬요. 한창 좋을 때라서 붙어 있는 거잖아요. 손주라도 덜컥 생기면 얼마나 안심이에요?”
“손주?”
백철중은 그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안 그래도 한서진을 탐내는 여식이나 가문들이 국제적으로 널려 있는 터라, 이따금씩 불안해질 때가 있었다.
그런데 손주라도 덜컥 들어서면? 그런 불안감이 씻은 듯이 날아갈 것이다.
“흠흠, 그것도 나쁘진 않군.”
“그렇죠? 솔깃하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직 출가도 안 한 딸이 너무 밖으로 나도는 것도 좋지 않아. 한 군이 우리 가풍을 어떻게 생각하겠어? 내일은 꼭 들어오라고 해.”
TF팀이 부친을 공격하게 생겼으니 불안한 마음에 얼굴을 맞대지 못하는 것이리라. 백철중은 너그럽게 딸을 이해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룹은 완벽하다.’
지난 문제들에 시효를 들먹이면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겠지만, TF팀의 목적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이미 자발적으로 청소한 불법성을 들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회, 회장님! 검찰에서 소환장이 날아왔습니다!”
“뭐야?”
“네, 참고인 조사라고 소환령을……!”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한 백철중은 비서실장의 보고에 기절할 듯이 놀랐다.
소환장에는 ‘검사 김시형’이라고 똑똑히 적혀 있었다.
평검사지만, 누구도 평범한 평검사로 보지 않는, 지금 검찰에서 가장 유명한 검사.
정일재단의 비리를 샅샅이 밝혀내고, 대통령의 손발을 사정없이 공격한 정의로운 검사.
그리고 한서진의 후원을 받는 검사.
그가 자신에게 참고인 소환령을 내린 것이다.
TF팀의 고발과 부탁을 받고 자료 검증에 돌입한 김시형은 매우 난처해졌다.
“조사 결과만 봐도 H그룹은 매우 깨끗합니다. 재계 1위 기업이 이 정도로 투명하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아니에요. 이건 최근에 기업 체질 개선을 해서 그런 거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H그룹은 다른 재벌 기업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아직 시효가 지난 것도 아니고요.”
“그래도 자발적으로 많이 개선을 했군요. 그룹 비자금도 천억 원도 채 안 되고요. 제가 알기로는 진성그룹 총 비자금이 90조 원이 족히 넘는다고 합니다. 50대 대기업 비자금을 모두 합치면 900조 원이 넘는다는 말까지 있는데요.”
재계 1위 그룹의 총 비자금이 겨우 530억 원이다?
사실이라면 정말 회계 처리가 투명하다고 오히려 상을 줘야 할 것이다. H그룹의 규모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말 그대로 주머니에 넣고 깜빡 잊어버린 동전 같은 것이다.
동전이 들어있는 걸 몰랐다고 해서, 횡령이라고 밀어붙일 수는 없지 않은가? 누가 봐도 실수인 게 명백한데.
“아니에요. 원래는 30조 원이 넘었는데 다 줄이고 쳐내서 이렇게 된 거예요.”
“그렇다 해도, 불법 세탁한 비자금을 다시 합법적으로 소모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 내역을 보면 자진 납세, 직원 복지, 그리고 사회 기부 등 좋은 일에만 지출했군요. 이 정도면 정상 참작의 여지가 너무 확고합니다.”
“하지만 불법을 처벌하는 게 검찰이 할 일이잖아요. 그룹의 불법성을 조사하고, 밝혀내주셔야죠.”
김시형 검사는 야무지게 말하는 여자를 주시했다. 눈을 마주치기 살짝 부담스러울 정도로 너무 예쁜 얼굴이다. 남심을 사정없이 공격하는 볼륨감도 그렇고.
그는 쑥스러운 마음을 감추려 헛기침을 했다.
“왜 그렇게 H그룹을 공격하시려는 건가요?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검사님은 타협을 모르는 정의로운 검사이시니까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융통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김시형은 의아함과 당혹스러움을 동시에 품은 채, 그녀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물론 530억 원 역시 불법 비자금은 맞습니다. 하지만 H그룹의 규모, 그리고 H그룹이 비자금을 꾸준히, 그리고 정상적으로 처분해온 것을 보면 반성의 기미가 역력합니다. 불법을 탈피하고 합법을 추구하는 게 대견할 정도로 눈에 보이지요.”
송하나는 대답 대신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김시형은 그 시선에 쑥스러움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다른 10대 재벌들의 불법성은 그 규모가 방대하고 심각할 정도입니다. H그룹을 칠 시간에 차라리 다른 재벌 기업들을 공격하는 게 낫습니다. 형사한테 잘 좀 봐달라고 5만 원도 안 하는 떡을 선물한 소시민보다는 공사비로 100조 원을 횡령한 정치인을 쫓아야지요.”
“H그룹이 소시민은 아니잖아요.”
“불법성의 크기와 재질을 따져서 말한 겁니다. H그룹은 지금 이대로 놔두고, 다른 기업을 치는 게 효율적입니다.”
김시형은 의아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싸웠나? 아니면 경영권을 놓고 부녀지간에 피 말리는 다툼이 일어나는 중인가?
“아시다시피 전 H그룹의 딸이에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제대로 본보기를 세워야 해요. H그룹의 작은 불법을 제대로 처분할 수 있다면, TF팀은 앞으로 제대로 된 활약을 펼칠 수 있어요.”
김시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동시에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착각이겠지만 눈앞의 그녀에게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흥분으로 몸이 바르르 떨렸다.
“알겠습니다. 제대로 협조해드리지요.”
“여보, 내 휠체어 어딨지? 5년 전에 썼던 그거, 그게 승차감이 괜찮아서 좋았는데.”
“몰라요. 찾아봐야 해요.”
“내가 버리지 말랬잖아. 그거 메이커라고.”
========== 작품 후기 ==========
회장님께서 가시고기 드라마 한 편 찍습니다.
아아, 부정은 위대하여라...
ps : 가결을 기념하여 연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