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301화 (301/609)

00301  결정이 필요한 때  =========================================================================

정부가 발의한, 통일기금 조달을 위한 법률은 약간의 진통을 겪은 끝에 어렵지 않게 국회의 의결을 받고 공포되었다. 사전에 어느 정도 협의가 돼 있던 터라 어렵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난 법의 목적은 천문학적인 통일 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특별 국채 발행 및 절차, 상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중앙정부가 한서진으로부터 돈을 빌리기 위한 명분이자 절차였다.

국가가 개인으로부터 돈을 빌리기 위해 만든 법, 대한민국 역사에서 이렇게 태생이 독특한 법률은 없을 것이다.

북한 난민들 처우에 소요되는 국가 재정 지출이 천문학적이라는 점 때문에, 일반 국민들도 이 법률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근데 여기 이 감사 고발권이라는 게 뭐야?”

“특별 국채를 일정액수 이상 보유한 채권자는 정부 예산이 부당하게 쓰이지 않는지 확인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뭐, 취지는 괜찮은 것 같은데? 큰돈 내고 국채 사줬는데 정부가 예산 허투루 안 쓰는지 감시 정돈 할 수 있게 해줘야지.”

“맥락을 보면 국채에 투입된 자금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예산 흐름을 감시할 수 있다고 돼있네. 이래도 되는 건가?”

“돈은 어차피 섞이면 다 똑같아. 당연히 채무자가 허튼 데 돈 쓰는지 안 쓰는지 감시해야 나중에 내 돈 돌려받지. 사업한다고 큰돈 빌려간 놈이 명품관 쇼핑이나 흥청망청 하고 있으면 채권자 입장에선 당연히 막고 싶지. 나 같아도 윗대가리들이 서로 짜고 헤쳐먹지 못하게 감시하고 싶겠다.”

감사 고발권은 채권자의 채권 회수를 위해 정부가 보장해주는 권리였다.

정부가 돈을 흥청망청 쓰거나, 부당한 거래로 은닉하거나, 혹은 어처구니없게 돈이 새지 않도록 감시하고, 불법이나 부당함이 발견되면 고발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내용이었다.

국채를 구입한 이 모두에게 보장하는 것은 아니고, 1조 원 이상의 액수를 구매한 사람이나 단체, 기업에게만 보장한다는 제한이 있었다.

또 상환 기간을 별도로 정하지 않도록 선택할 수도 있었다. 대신 이 경우는 수익률이 더 낮아진다.

국채증서의 기본 발행액수는 100억 원 혹은 1천만 달러부터 시작했다.

애초에 한서진으로부터 특별 기금을 빌리기 위한 법률이었으니, 일반 개인의 자금이 투입돼봤자 번거롭기만 할 뿐이었다. 일반 자금 조달은 기존 국채로 대신하면 된다.

어차피 대기업이나 부호들은 일반 국채보다 수익률이 낮은 특별 국채를 매입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특별 국채를 매입할 사람은 한서진 혼자가 된다.

한국이 한서진 한 명한테 돈을 빌리기 위해 만든 법, 그 말은 결코 과장된 게 아니었다.

「특별 국채 발행 법률! 드디어 발효!」

「중앙정부, 1차로 100조 원에 달하는 국채 증서 발행!」

「대박 터트린 정부, 특별 국채 발행하자마자 매수!」

정부는 1차로 10년 만기의 100조 원짜리 국채 증서 한 장을 발행했다. 국채는 송하나가 한서진의 명의로 즉각 매입했다. 한서진은 1,000억 달러의 미화로 매입 대금을 지불했다.

한서진의 덕망이 더 높아지는 것을 원치 않은 보수 신문사들은 보도에서 그의 단독 매수를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 하지만 인터넷 시대에서 그런 특종을 계속 감출 순 없었다.

특히 H그룹에서 한서진의 단독 매입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덕분에 눈과 귀가 열린 사람이라면 한서진 혼자서 국채를 매입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아가 사리분별이 있는 이들은, 이번 국채 발행이 국가가 개인으로부터 통일자금을 빌리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까지 이해하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무려 1,000억 달러의 예산을 확보한 정부는 일단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원화가 아닌 미화로 지불했기 때문에 국내 금융 시장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도 쏟아졌다.

정부는 협의 끝에 첫날부터 일주일 간 총 500조 원의 특별 국채를 발행했고, 한서진이 전량 인수했다. 모든 대금은 미화로 지불되었다.

5,000억 달러의 추가 예산이 생긴 정부는 거칠 것이 없었다.

국회는 예산 편성을 위해 임시회기를 열었고, 각종 행정기관들은 최대한 관련 예산을 타내기 위해 제출용 보고서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별법에 의해 조달한 예산이니만큼 전액을 북한 주민 및 북한 지역 재건 사업에 써야 할 것입니다.”

“어차피 북한 지역 재건은 에테르 밀집 현상이 완화되기 전까지는 어렵습니다. 언제까지 북한 주민들을 임시 수용소에 둘 순 없으니, 그들에게 공급할 집단 주택 건설을…….”

5,000억 달러, 즉 500조 원의 추가 예산이 한꺼번에 생겼다.

당연히 중앙정부, 지자체는 물론이고 모든 행정기관 및 사기업까지 눈이 훼까닥 돌아가서 덤벼들었다.

500조 원의 예산이 하늘에서 떨어졌지 않은가? 먼저 줍는 게 임자라는 생각에서 그들은 모든 일을 뒤로 한 채, 북한 주민 지원 사업에 뛰어들었다.

“장기적으로 2,200만 명의 북한 주민들을 수용할 수 있는 거주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아파트 건설 업체들은 하늘에서 떨어질 거대한 일감에 신바람이 가득 들어갔고.

“언제까지 주민들에게 군용 전투식량과 인스턴트 음식만을 제공할 겁니까! 더 좋은 음식, 더 좋은 영양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각종 가전제품과, 생필품을 대량으로 공급하면 단가 인하를 노릴 수 있습니다.”

“당사에서는 북한 주민들을 위한 특별한 보험 상품을 출시할 계획으로…….”

500조 원이나 되는 거액을 북한에만 쓰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불만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주로 생활이 빠듯한 서민층 이하에서였다.

“북한 주민들만 국민인가? 정부는 힘들어하는 서민들의 생활은 눈에 보이지도 않나?”

“그들이 삶의 터전을 잃은 건 안 됐고, 앞으로 막막한 것도 알겠지만, 그래도 더 힘든 사람들도 남한에 많다. 한서진 박사가 부디 이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500조 원의 ‘꽁돈’을 놓고 벌어지는 각종 아귀다툼과 갈등, 그리고 불만과 탐욕.

한국은 혼란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여론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해서 일부만이라도 남한에 분배할 수는 없을지…….”

경제부총리는 송하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목소리는 냉담했다.

“박사님께 포괄적인 감사권이 있는 건 아시죠?”

“알고 있습니다만, 다만 여론이 너무 좋지 않은지라…….”

“국채로 조달한 자금을 조달 목적 외에 다른 목적으로 쓰면 엄연한 횡령이 되는 거 아닌가요?”

정부는 현재까지 특별 국채로 500조 원을 조달했고, 장기적으로는 더욱 많은 자금을 조달할 예정이다.

기획재정부는 최소 1, 2조 달러의 자금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렇게 한서진의 자금으로 초기에 터를 닦아 놓으면, 그 뒤는 어떻게든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으리라.

현재 상당수 국민들은 500조 원을 북한 주민들을 위한 복지 및 생계 예산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 돈은 북한 지역을 재건하기 위한 통일 자금이다.

즉 통일에 필요한 천문학적인 비용을 특별 국채를 통해 조달한 것인데, 그 돈이 북한 주민들의 입으로 들어간다고 여기고 반발심을 품은 것이다.

“시위하는 분들은 무시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떼를 쓴다고 무조건 들어줘서는 안 되잖아요.”

정부청사 앞에서는 시위가 한창이었다. parents협회, 노인 단체 등에서 북한 주민들을 위해서 그 많은 돈을 다 쓸 작정이냐고 들고 일어선 것이다.

애초에 한서진이 통일 기금을 위해서 쓰라고 빌려줬다는 사실관계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귀로 들어도 마음으로 거부한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남한 쪽 복지는 기존 예산을 올바르게 분배하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거 아닌가요? 전문가들이 예산 분배를 검토해봤는데 불필요하게 새는 예산이 어마어마하더군요. 그것만 잡아도 그 사람들이 원하는 건 들어줄 수 있을 거예요.”

간단하게 말했지만, 결국 한서진이 낸 돈은 북한 재건과 통일 기금으로만 쓰라는 소리였다.

경제부총리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기존 예산도 그렇게 여유 있는 건 아닙니다만. 오히려 상당히 빠듯합니다.”

“이제 북한도 없는데 국방비부터 줄이셔야죠. 그 돈만 해도 그 시위하시는 분들이 원하는 건 충족하고도 남겠네요.”

“…….”

송하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경제부총리는 경기라도 들린 것처럼 흠칫 놀랐다.

국방 규모 감축. 현재 정부에서 가장 뜨겁게 떠오르고 있는 핫 이슈 중 하나였다.

한국은 북한을 의식해서 60만 육군을 구축, 유지해왔다. 오죽하면 국방부가 아니라 육방부라고 불릴 정도일까.

그런데 그 거대한 육군이 하루아침에 쓸모가 없어졌다. 북한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국경을 맞대게 될 중국은 여러 국가로 쪼개지며 약화될 운명이었으니까.

육군의 대대적인 감축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것 때문에 육군 장성들은 엉덩이에 불이 붙은 듯 가만히 있지 못하고 국방부와 정부기관을 들락거렸다.

결국 경제부총리는 말을 회피했다.

“그것은 이 자리에서 논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국방부에 어떤 변화가 닥칠 것은 분명한 듯 보입니다.”

그로서는 최대한으로 물러선 양보였다. 그 이상의 확답은 위험했다.

송하나는 팔짱을 낀 채 차분히 그를 주시했다. 스무 살 어린 여자의 눈빛에서 경제부총리는 묘한 압박감을 느끼고 마른침을 삼켰다.

마치 재벌 총수와 독대하고 있는 신입사원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는 것일까.

“박사님께서 국가에 그런 거액을 선뜻 빌려주시고 또 앞으로도 대출을 보장하신 것은, 북한 붕괴로 인한 한반도의 혼란을 막아보고자 하는 측은지심에서예요.”

“……높으신 뜻은 잘 알고 있습니다.”

“거의 무상에 가까운 조건으로 빌려드린 건데, 벌써부터 헤프게 쓰실 생각을 하면 안 되죠.”

“헤프게 쓰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시잖아요. 대출 목적 외에 다른 목적으로 대출 자금을 쓰려고 하면, 대출 회수를 할 수밖에 없어요.”

경제부총리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어린 여자가 어쩜 이렇게 뜻이 확고할까.

송하나는 비스듬하게 몸을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조만간 저희 그룹에서 국정 예산 감사를 전문으로 하는 태스크포스 팀을 구성할 거예요.”

“예?”

경제부총리는 깜짝 놀랐다. 아무리 감사권을 부여했다지만, 아직 특별히 문제가 터진 것도 아닌데?

“다소 빽빽하게 감사 활동을 시작할 테니, 미리 알고 계시라구요.”

“하, 하지만 특별한 일도 없는데 어째서…….”

“감사라는 건 일이 터지면 하는 게 아니고 일이 터지지 전에 미리 하는 거라 생각해요. 그게 효율적이죠.”

경제부총리는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렇다면 대출 상환이 완료되는 그 날까지 국가 예산 흐름을 감시하겠다는 것?

그는 특별법에서 보장한, 감사권의 범위에 관한 내용이 퍼뜩 떠올랐다.

‘통일 기금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모든 예산의 흐름을 감시할 수 있는 권한…….’

―정부가 빌려간 돈을 제대로 갚을 생각이 있는지, 어디 새는 예산이나 세금은 없는지, 남들에게 못 받고 떼이는 돈은 없는지.

―그래야 제대로 빚을 돌려받죠.

그때는 통일 기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안전장치를 두고 싶다는 뜻 정도로 이해했다. 그래서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송하나가 말하는 내용이 영 심상치 않았다.

“박사님께서 빌려주신 통일기금뿐만 아니라, 허투루 쓰는 국가 예산이 없는지 앞으로 TF팀에서 철저히 감시할 거예요. 국세 역시 합법적으로 잘 거둬들이고 있는지 지켜볼 거구요. 납세자나 납세 기업 단속도 잘 하셔야 할 거예요.”

“그, 그건…….”

“앞으로 정부는 허리띠 졸라매고 건전한 재정 활동을 해야 할 거예요. 어려울 거 하나도 없어요. 그냥 법대로만 하면 돼요.”

화사하게 웃는 얼굴이 그렇게 무서워 보일 수가 없었다.

“우리도 빚 받아야 하잖아요.”

========== 작품 후기 ==========

국가와 국민, 그리고 기업들은 알게 될 겁니다.

사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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