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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300화 (300/609)

00300  결정이 필요한 때  =========================================================================

“황 총리님, 총리님의 말은 일리가 있지만, 문제는 한서진 박사가 우리 정부와 별로 친하지 않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두박 대통령의 눈치를 보던 통일부 장관이 슬쩍 물었다. 속으로는 저 양반이 미쳤나, 하고 생각했다.

대통령이 한서진을 얼마나 불편해하는지 알면서, 측근이 돼서 어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경제부총리는 대통령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주장을 바꾸지 않았다.

“난민들에게 하루에 수백억 이상의 예산이 지출됩니다. 덕분에 물가는 요동치고, 시장은 끝없이 혼란스럽습니다. 문제는 현재 우리가 책임지는 북한 난민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현재는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공동으로 도와주고 있지만 결국에는 우리가 책임져야 할 겁니다.”

“…….”

“지금 이 순간에도 천문학적인 빚이 쌓이고 있습니다. 이미 경제 파탄이 예고 된 상황입니다. 오직 돈만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고, 그럴 재정 능력이 있는 부자가 다행히도 우리나라 사람입니다.”

조곤조곤한 경제부총리의 설명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그들의 경각심을 날카롭게 일깨웠다.

회의가 길어지는 동안, 대통령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국무위원들은 간략한 보고서와 지표를 통해, 대한민국 경제가 얼마나 심각한 위기를 목전에 두고 있는지 절실히 느꼈다.

지금 한국은 파열된 대동맥에서 쏟아지는 출혈처럼, 무시무시한 속도로 재정이 새고 있었다. 실무진 사이에서는 한 달 안에 망하지 않는다면 기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총 2,200만 명의 난민, 하지만 현재 우리가 책임지고 있는 수는 겨우 800만 명에 불과합니다. 본 게임은 아직 시작도 않은 채 튜토리얼에서도 허덕이고 있는 겁니다.”

인구 5,000만의 국가가 갑작스럽게 하루아침에 수백, 수천만 명의 난민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 지독한 고통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통령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한서진은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사람이 돼버렸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판단 능력마저 없지는 않았다.

“그 친구가 우리를 도와줄까?”

“……말을 꺼낸 게 저이니, 제가 한 번 직접 찾아가서 설득해보겠습니다. 무릎이라도 꿇겠습니다.”

경제부총리의 각오는 비장하기까지 했다. 대통령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럼 일단 부총리가 먼저 이야기를 해봐. 이 문제는 그 다음에 다시 논하기로 하지.”

어차피 한국의 재정 능력으로서는 뾰족한 해결책이 없었다. 결국에는 어디에서든 빚을 내야만 할 일, 그러나 그런 거액을 빌려줄 채권자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한서진을 제외하면.

“오빠, 저 할 말이 있어요.”

피부에 아직 촉촉한 물기가 남은 채로, 송하나가 옆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조금 전 애정을 확인했던 터라, 기분 좋은 탈력감에 잠겨 있던 한서진은 눈을 뜨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무슨 말?”

“실은 행정부에서 사람이 찾아와서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오빠한테 돈을 빌릴 수 없겠냐고 하더라고요.”

“나한테 돈을 빌려? 누가?”

“정부가 돈을 빌리고 싶대요.”

뜬금없는 말에 한서진은 살짝 어리둥절했다.

“북한 주민 수용 때문에 요새 재정이 어려운가 봐요. 그래서 오빠한테 빌리고 싶어하는 눈치던데.”

“그것 때문이라면야…… 네 생각은 어때?”

“제 생각이요? 음……. 전 담보를 확실히 잡고 빌려줘서 이권을 챙기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잘 모르겠어요. 그냥 오빠한테 말만이라도 전해달라고 해서요.”

한서진은 잠시 생각했다.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도 그에게는 무방한 일이지만, 요즘 들려오는 말이 있었다. 북한 주민들 먹여 살리다가 한국 재정이 파탄 나게 생겼다는 소문이었다.

경제는 잘 모르지만, 지금 그 많은 주민을 아무런 대비 없이 있다가 떠맡게 되었으니, 지갑에 심각한 타격이 가해졌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H그룹은 어떻게 할 생각이래? 회장님한테 뭐 들은 거 없어?”

“아빠는 그런 중요한 사업 이야기는 아직 저한테 잘 말씀 안 해주세요.”

“그렇구나.”

“제 생각에는 이건 우리 그룹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소모되는 돈이 너무 커요. 단순 고정 지출이라, 투자도 아니고 그냥 완전히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거예요. 재계 전체가 나서도 안 될 거예요. 아마 나서려고 하지도 않을 거구요.”

그 점은 한서진도 동감했다.

난민들한테 들어가는 돈은 재계 전체가 사재를 털어도 감당이 안 될 것이다.

그들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만 연간 최소 200조 원의 돈이 들어갈 텐데, 그걸 무슨 재주로 충당할까.

‘나라면 모를까.’

한서진은 그렇게 생각하고 피식거렸다.

SJ인더스트리에서 받는 상반기 반도체 특허료만 6,000억 달러다. 일 년으로 치면 1조 2,000억 달러. 앞으로도 증가하면 했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특허료는 회사가 벌어들일 수익의 50%, 즉 그만큼의 돈이 회사 수익금으로 귀속된다. 그 수익금에 관해서 86.5%의 권리가 또 있는 셈이다.

더군다나 미국은 그가 국가를 구한 영웅인 점을 들어, 그 개인에게는 소득세를 물리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SJ인더스트리만 기업소득세를 낸다.

“네가 알아서 해.”

“제가요?”

“나중에 나를 위해서 국제정치 해보고 싶다며. 이것도 예비 테스트라 생각하고 한 번 해봐. 거절을 하든 승낙을 하든.”

송하나는 배시시 웃으며 옆에 찰싹 달라붙듯이 누웠다.

“사실 전 빌려주고 싶어요.”

“그래?”

“네, 담보만 확실하게 잡으면 떼먹힐 염려 없고, 떼먹히더라도 그만큼 다른 걸 받아낼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가 나 거지되면 책임질 거지?”

“아이, 제가 그렇게까지 대책 없이 빌려주겠어요?”

한서진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원래 큰 부자는 큰 흉년에 난다잖아요. 전 이번이 진짜 큰 기회인 것 같은데, 오빠 생각은 어떠신가 해서…….”

“회장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까?”

“아마 비슷하게 바라보시지 않을까요? 아빠는 돈이 없으시니까 손가락만 빠셔야겠지만요.”

H그룹 총수가 돈이 없으니 손가락이나 빨아야 한다고 가차 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이나 될까?

“그럼 한번 해봐. 얼마나 줄까? 얼마면 돼?”

“얼마나 주실 거예요?”

송하나는 기대감에 차서 물었다. 한서진은 잠시 생각한 뒤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특허료하고 배당금 들어오는 통장 있는데, 그거 그냥 네가 관리하면 되겠다.”

“네? 오빠, 설마…….”

“현금 들어오는 건 그냥 다 써도 돼. 어차피 샘물 같은 거니까.”

막말로 한서진은 통장에 든 모든 현금을 잃어버려도 타격이 없었다. SJ인더스트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천문학적인 돈을 벌고 있으니까.

그렇다 해도 연간 1, 2조 달러씩 꽂히는 통장을 전적으로 맡긴다는 것은, 여간한 신뢰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도 이제 스무 살 된 약혼녀에게.

송하나는 깊은 감동을 받은 듯이 말을 잇지 못하다가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오빠는 골치 아픈 일 하나도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하고 싶은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게끔, 제가 주변 조용하게 해드릴게요.”

“내 마음을 꼭 들여다본 것처럼 말한다, 너?”

그녀는 맑게 웃으며 뺨에 입을 맞췄다.

“제가 꽃길만 걷게 해줄게요. 그 길만 가세요.”

고풍스러운 고급 한식 레스토랑 별실에서, 경제부총리는 잔뜩 긴장한 채 앉아 있었다.

이윽고 또각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너무 안 그러셔도 돼요. 제 아버지뻘 되시는데.”

“차기 H그룹 회장님께 어떻게 제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공직자이시잖아요. 너무 그러시면 제가 부담스러워요.”

송하나는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며 앉기를 권했다.

그제야 경제부총리도 한숨을 돌리며, 은근슬쩍 그녀를 살폈다.

무광택의 남색 스커트에 베이지색 블라우스가 차가운 인상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화려한 치장이나 화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 자체로 빛이 난다.

처음 그녀와 대면했을 때의 강렬함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비록 한국에 왕가는 없지만, 왕족의 품위란 바로 저런 게 아닐까 싶었던 여자였으니까.

“다행히도 대통령님은 어느 정도 의지를 받아들이신 듯합니다.”

“부총리님께서 힘을 많이 써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부회장님께서 먼저 나서서 국가를 도와주신다니, 이 나라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입장에서 마땅히 감사드려야 할 따름입니다.”

막대한 예산을 단기, 그리고 장기에 걸쳐 투입하지 않는 한 북한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그리고 상대는 한서진과 가장 가까우면서, 차기 H그룹의 총수가 아닌가.

누가 경제부총리직에 있었어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한 박사님께서 허락하셨어요. 그리고 재정 지원 문제는 저에게 일임하셨구요. 앞으로는 제가 책임지고 맡게 될 테니, 그에 관련된 일은 저에게 말씀하시면 돼요.”

“그러시군요.”

경제부총리는 초조함에 마른 입술을 다시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그런데 지원 규모는 어느 정도나 예상하시는지요?”

“우선 1차적으로 1,000억 달러를 마련해드릴 거구요. 장기적으로 매년 연간 1조 달러까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음색이었지만 그 내용까지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돈 액수에는 닳고 닳은 경제부총리조차 저절로 입을 떡 벌릴 규모였다.

한국 일 년 치 예산의 두 배가 훌쩍 넘는 금액을 한 명의 개인이 지원해주겠다니. 바보스러운 질문인 줄 알면서도, 경제부총리는 그만 묻고 말았다.

“한 박사님께서 그만한 여유 자금이 될까요?”

“박사님께서 SJ인더스트리에서 받는 반도체 특허 로열티만 일 년에 1조 달러가 넘습니다. 앞으로 더 늘어날 거구요.”

야무진 대답에 경제부총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20배는 족히 넘어가는 규모였다. 그는 이제 식은땀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명심해주세요. 투자나 지원의 성격을 어느 정도 띠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채무 계약입니다. 박사님께서 대한민국 정부에 빌려드리는 돈이에요.”

“무, 물론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거래 형태는 기억하시나요?”

“당연합니다. 특별 국채를 발행하고, 박사님께서 인수하는 형태로 하시기로 하셨죠.”

국채, 국가가 자기 이름으로 책임지는 빚.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규모의 국채 발행이 될 것이다.

“감사권도 잊지 마셔야죠.”

“…….”

“박사님은 떼먹힐지도 모르는 거액을 무상에 가까운 조건으로 빌려드리는 겁니다. 당연히 원금은 무사히 돌려받을 수 있도록 국가 재정을 감사할 권리는 보장해주셔야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존재하는 한 떼먹힌다는 상황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워낙 거액이다 보니 그런 표현이 오가는 게 부자연스럽지도 않다.

“물론 포괄적인 재정 감사 권리를 보장해드리겠습니다. 다만 불법성을 발각하였다 해도 직접 집행하시는 것은, 법 질서상 아무래도…….”

“걱정 마세요. 감사만 할 거고, 해결은 고발을 통해서 할 테니까요.”

“그렇다면야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IMF가 구제 금융을 해줄 때도 해당 국가가 제대로 상환할 능력이 되는지, 사사건건 감시하고 참견합니다. 이 정도 지원금을 주시는데 당연히 그 정도 권리야 챙겨드려야죠.”

경제부총리는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색해서 웃었다.

금융 시장에서, 빚이 너무 커져버리면 오히려 채무자가 큰 소리를 치게 된다. 그러나 몇 조 달러를 빌린다 한들, 대한민국 정부가 과연 한서진에게 큰 소리를 칠 수가 있을까?

“감사권은 정말 중요해요. 대한민국 정부가 빌려간 돈을 제대로 갚을 생각이 있는지, 어디 새는 예산이나 세금은 없는지, 남들에게 못 받고 떼이는 돈은 없는지, 그런 건 우리가 필히 알아야 하니까요. 그래야 제대로 빚을 돌려받죠.”

“걱정 마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진행하겠습니다.”

다음 날, 정부는 통일기금을 조달하기 위한 특별국채 발행에 관한 법률을 발의했다.

========== 작품 후기 ==========

이제부터 예산 남는다고 멀쩡한 보도블록 갈아버리면 하나 쏭이 매우 화를 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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