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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299화 (299/609)

00299  결정이 필요한 때  =========================================================================

“알고 있습니다.”

의외로 한서진은 덤덤하게 반응했다. 험난한 길이 될 거라는 것, 그 정도는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어차피 엘릭서의 수량이 충분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엘릭서를 공개하는 것 역시 여전히 내키지 않고요.”

“…….”

“한때 저는 엘릭서는 정말 믿을 수 있는 주변 사람들만을 위해서 쓰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기껏해야 회장님 가족과 제 가족, 그리고 정지원 사장님 정도나 되겠지요. 이창용 회장을 극구 거절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그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닌 것 같네만.”

“엘릭서를 공개할 마음은 여전히 없습니다. 그러나 피폭자들은 돕고 싶군요. 할 수 있는 선에서요.”

한서진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 백철중은 그제야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차렸다.

“환자들에게 몰래 투입하겠다는 거군? 엘릭서의 존재 자체는 알리지 않고?”

“그들은 피폭 증상을 치료할 수 있고, 저는 엘릭서를 여전히 숨길 수 있으니까요.”

“만약 투약 과정에서 잘못 돼서 엘릭서의 존재가 흘러나가기라도 한다면…….”

“그러니 잘못 되지 않게 해야겠지요. 그 방법을 의논하고 싶습니다.”

한서진은 이미 결심이 선 듯이 보였다.

“엘릭서를 희석해서 투약하면 가능한 많은 피폭자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또 상당 기간에 거쳐 회복될 테니, 자연 회복력에 기대어 치유됐다고 믿게 만들 수도 있고요. 엘릭서의 존재도 감출 수 있습니다.”

“들킬 위험이 아주 없지는 않네만…… 그 정도 리스크는 감수하겠다는 건가?”

“리스크는 감수하겠습니다. 그러나 들키지 않게끔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려 합니다.”

백철중은 한서진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다.

비밀 투약을 통해 엘릭서의 존재도 지키고, 피폭자들도 가능한 많이 구하겠다는 것이다.

“굳이 그러는 이유가 뭔가? 어차피 자네 책임도 아니지 않은가? 그저 자연재해일 뿐이었네.”

“왜냐하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안 됐잖습니까.”

“…….”

“그거뿐입니다.”

백철중은 천천히 끄덕였다.

“이해했네. 나도 돕지.”

약 2주에 걸쳐, 백철중은 밑준비 작업을 마쳤다.

그는 먼저 피폭 환자들을 위한 대대적인 기부를 준비했다. 특히 의약품 쪽 기부에 만반의 준비를 가했다.

피폭으로 신체 밸런스가 붕괴한 환자들이 우선적으로 필요로 한 것은 다름 아닌 수액이었다. 대량으로 환자가 발생한 터라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수액이 터무니없이 모자란 지경이 되었다.

이에 H그룹은 2,900여 명의 중증 환자들을 위해 수액 및 항생제, 거즈 등 일반 의약품을 대량으로 준비해서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수액은 영원그룹에서 전격적으로 생산을 맡기로 했다.

영원그룹은 한서진이 박현준을 통해 진성제약을 인수합병한 뒤 설립한, 제약 전문 연구 기업. 즉 한서진이 소유한 회사에서 수액을 생산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생산된 수액 1차 물량은 2,900여 명의 중증 피폭 환자들을 위해 무료로 지급되었다.

그날 밤, 한서진과 백철중은 전화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눴다.

「1차 물량은 틀림없이 인수받았네.」

“잘 부탁드립니다.”

영원그룹은 연구 및 생산 기업이지, 의약품 유통을 전문적으로 취급하지는 않고 있다. 그래서 안전하게 일을 성사하기 위해서는 H그룹의 도움이 필요했다.

「믿을 만한 사람을 시켰겠지?」

“제가 직접 했습니다. 회사 사찰을 핑계로 대고 생산 공장을 찾았지요.”

「고생했군. 수고했네. 나머지는 우리 H그룹에 맡겨두게.」

“일단 경과는 지켜봐야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영원그룹에서 공급한 1차 수액 물량에는 1/100로 희석된 엘릭서가 섞여 있다. 통상 복용량의 1% 정도만 복용하게 되는 셈이다.

그 비밀을 아는 것은 한서진과 백철중뿐이었다. 남들에게는 한서진과 H그룹이 사비를 털어 피폭 환자들을 지원한 것으로 보일 뿐이다.

H그룹은 완벽한 일처리를 통해, 희석된 엘릭서가 섞인 수액을 중증 피폭 환자들에게 남김없이 전달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환자들은 더 이상 증세가 악화되지 않았다. 어떤 이는 조금씩이지만 차도를 보이기도 했다.

크게 눈에 띄는 효과는 아니지만, 그만큼 주변의 의심을 사지 않아 오히려 더 효과적이었다.

한서진은 곧장 2차 수액 물량을 준비했다. 이번에도 생산 과정에서 원액에 엘릭서를 직접 섞었다. 이번에는 농도를 조금 더 높여서 희석시켰다.

2차 투약을 받은 중증 환자들의 증세는 빠른 속도로 좋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집중적인 치료, 그리고 그들의 회복 의지가 맞물려 기적을 낳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사망 위험이 사라지고, 그들은 완전한 회복세로 돌아섰다. 의료진은 처음으로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완치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대로만 가면 틀림없이 나을 수 있습니다.”

환자들과 가족들은 희망을 찾았고, 한서진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3차 투약을 끝으로 한서진은 엘릭서 투약을 중지하기로 했다. 더는 엘릭서를 투약하지 않아도 사망할 위험이 없었고, 자칫 환자들이 급속도로 회복돼버리면 오히려 골치 아파진다.

영원그룹과 H그룹은 환자 지원을 중단하지 않고, 더욱 규모를 늘려 지속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의약품 외에도 치료비 등 다방면에 걸쳐 그들을 후원했다.

백철중과 한서진은 따로 만나 술잔을 기울였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후 백철중이 물었다.

“소감이 어떤가?”

우습게도 꽤 많은 환자들이 영원그룹이 제공한 수액과 항생제가 효과가 좋아서 치유되고 있는 거라 받아들이고 있었다. 엘릭서의 존재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는 와중에도.

“덤덤합니다.”

“기쁘거나 뿌듯하지는 않나?”

“글쎄요. 오히려 엘릭서를 들키지 않고 무사히 일을 마무리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마음이 큽니다.”

“자선사업가가 그런 마음이어서야, 부정이 타겠구만.”

백철중은 뼈 있는 농담을 하면서도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사실 난 처음 자네가 엘릭서를 공개할까 봐 내심 바짝 긴장 했었다네. 아무리 보물을 지킬 힘이 있다지만, 엘릭서가 알려지면 세상이 너무 시끄러워지니까.”

“그렇겠지요.”

“이미 자네는 반도체와 에테르만으로 세상을 뒤집어놓았는데, 여기서 엘릭서까지 공개하면 너무하지 않은가? 적당히 감출 줄도 알아야지.”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고, 백철중은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적당한 측은지심에 인간미도 있고, 손해 볼 짓이 뭔지 알고 피할 줄도 알고, 새삼 자네가 달라 보이는군. 혹시 기업 경영을 전문적으로 해볼 마음은 없는가?”

한서진이 마음만 먹으면 대기업가로 변신하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다. 당장 세계 최고의 대기업인 SJ인더스트리의 오너이지 않은가.

백철중은 연구자가 아니라 경영자인 그의 모습도 한 번쯤 보고 싶었다. 예비 장인으로서 은근한 욕심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경영 일에는 관심 없습니다. 에테르 연구만 해도 얼마나 무궁무진한데요.”

“아, 연구를 소홀히 하라는 게 아니라 경영자로서의 모습도 틈나는 대로 한 번 갈고 닦으면 한단 거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백철중은 나름 아쉬웠다.

북한 지역이 텅 빈 지금, 한서진이 기업가로서 조금만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면, ‘한씨 가문’은 세기에 다시없을 거대 가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텐데.

반도체 제조업체인 SJ인더스트리는 북한의 이권에 크게 관심이 없다. 어디까지나 한서진의 입장을 배려한, 대북 투자 같은 최소한의 한도에서만 움직일 것이다.

“자네는 북한을 앞으로 어떻게 할 텐가?”

“글쎄요. 일단 과열된 에테르 잔재가 가라앉기를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언제쯤 북한 지역이 안전해질까?”

“저도 모릅니다.”

백철중은 입맛을 다셨다.

북한은 그 땅만으로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다. 그런데 한서진은 깃발을 꽂을 마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한국이 버티고 있는 것은 기적이었다.

이천만 명이 넘는 난민이 쏟아졌음에도, 한국은 삐걱대면서도 간신히 돌아가고 있었다.

미국의 파격적인 도움이 없었으면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내렸을지도 모른다.

현재 북한 난민들은 총 네 군데에 나눠서 지원을 받고 있었다. 미국이 보낸 대형 민간 선박, 일본이 임시로 빌려준 수용시설, 한국 정부가 운동장이나 공터, 대강당에 마련한 간이 거주소, 마지막으로 세계 여러 나라가 보내준 대형 유람선이었다.

사람 수가 어마어마하다 보니 임시 체류 장소를 확보하는 작업만 해도 벅찼다. 여기에 그들이 하루에 소모하는 물자의 양 또한 천문학적이었다.

식량과 식수, 그리고 최소한의 생필품만 따져도 무지막지한 예산이 매일같이 소모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은 수백만 명의 북한 주민을 보호하고 있었고, 하루에만 천억 단위의 예산이 소요되었다. 한국 경제를 마비시키기에는 충분한 수치였다.

이에 많은 국민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하루에 쏟아 붓는 돈만 천억이 넘는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우리나라 일 년 예산이 얼만데!”

“정부는 즉각 이 사태를 해결하라! 해결하라!”

“내 피 같은 세금이 줄줄 세고 있단 말이다!”

미국의 놀라운 구조 작전을 감동과 경악으로 지켜보며, 박수까지 보냈던 국민들이지만, 당장 줄줄이 새어나가는 세금 앞에서는 안색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을 포함한 국제 사회가 전격적인 도움을 주고 있고, 재벌 등 대기업들도 사회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상당한 돈을 내놓고 있지만, 당장 근로 능력 없는 수백만 명 분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국민들의 부담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김두박이는 대책을 세우지 않고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재단 비자금 빼돌리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거냐!”

단순 계산으로, 한 가구 당 약 2명 이상의 군식구를 떠안게 된 셈이다. 그것도 언제 독립할지 기약할 수 없는 군식구. 국민들이 성이 난 것은 예상된 결과였다.

너무 큰 음식물을 엉겁결에 삼켜버린 한국은, 지독한 소화불량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완전히 소화시킬 수도, 그렇다고 다시 토해낼 수도 없는 고통만이 하루하루 이어질 뿐이었다.

“돈이 필요합니다. 오직 돈만이 해결책입니다.”

경제부총리는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김두박은 물론이고 국문위원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아니, 지금 누가 그걸 모른단 말인가?

“국회에서 추경 예산에 난색을 표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올해 경제지표는 완전히 붕괴입니다.”

“차라리 부동산 시장이 폭삭 내려앉는 게 낫지, 이건 감당이 안 됩니다.”

심지어 미국이 괜히 북한 주민들을 구해냈다고 원망하는 여론마저 생겨났다. ‘너무 많이 살리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되었다는 시선이었다.

인구 오천만 국가에 이천만 명의 새로운 난민이 떨어진 셈이니. 물론 현재 한국이 실질적으로 부담하는 숫자는 수백만 정도였으나, 그것만 해도 커다란 중압이었다.

“우리 정부가 보호하는 북한 주민들에게 하루에 투입되는 식량, 식수, 최소한의 생필품만 해도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이 사태가 한 달만 이어져도 우리 경제는 파탄이 납니다.”

경제부총리는 빠르게 이어진 설명 끝에, 결론을 내놓았다.

“당장 돈이 없으면 구걸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우리나라에는 세계 최고의 부자가 있습니다.”

========== 작품 후기 ==========

대흉이 들면 부자는 더 큰 부자가 된다.

그런데 이건 역사상 전무후무한 초대흉.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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