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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294화 (294/609)

00294  북쪽 폭풍  =========================================================================

김두박 대통령은 근래처럼 심기가 불편한 적이 없었다.

한서진의 반도체 사업체 근처를 갸웃거리다가 제대로 역공을 맞은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당시 한서진의 수족 노릇을 했던 김시형 검사가 휘두른 칼날에 얼마나 큰 타격을 입었던가.

가문의 큰 자산, 수 조 원의 가치가 있는 정일재단은 결국 국고로 환수 당했다.

재단 비자금 및 대선 자금 문제 때문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고, 한서진의 편을 든 재벌들에게 훈계를 내리려다가 오히려 거센 역공을 맞았다.

집권 초기 그럭저럭 좋았던 재벌들과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장이 났다.

더군다나 검찰은 은밀히 수면 아래에서 내연녀 문제까지 걸고 넘어졌다. 결국 미국 대통령의 강제적인 중재 끝에 그는 판정패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충격이었던 것은 장남과 내연녀가 불륜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몰랐다고는 하지만, 감히 부친의 여자를 건드리다니.

그렇게 장남과는 의절 상태가 되었다.

그나마 한 가닥 다행스러운 일은 유전자 검사 결과 내연녀의 아이가 자신도, 장남의 아이도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어느 한쪽의 피를 이어받았다면 내연녀를 정리하는 것도 골치 아팠을 것이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에 한서진에게 슬쩍 잽을 넣은 그는 너덜너덜 걸레가 될 때까지 얻어맞고 말았다.

행정부 내에서도 암암리에 소문이 퍼져, 임기가 반도 넘게 남았는데 반쯤 레임덕 상태나 다름없었다.

대통령 체면이 말이 아닌지라, 요즘은 총리가 사실상 국정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도 국정에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아, 반쯤 발을 빼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마냥 물러나 있을 수는 없는데.’

그러다가 절호와도 같은 기회가 왔다. 중국이 한서진에게 가한 테러가 그것이다.

당시 한서진이 죽은 줄 오인한 그는 신이 나서 재빠르게 국정을 주도했다. 계류 중이던, 재벌과 여당이 원하는 법안을 빠르게 통과시켰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한서진은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다. 청와대는 또 다시 바보가 되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클레튼 대통령이 한국을 찾아와서 청와대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한서진만 만나고 돌아갔다. 대통령의 체면이 땅에 떨어져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으리라.

정녕 임기가 끝날 때까지 청와대 수문장 노릇만 하다가 물러나야 하나?

레임덕을 되돌릴 방법은 없는가?

한서진과 화해할 길은?

그렇게 하루하루 골머리가 썩는 와중, 북쪽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에테르 스톰? 자연 재해? 북한 증산군에서?”

“예, 각하.”

비서실장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증산군은 평양에서 멀지 않은 지역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지금 평양에서는 대대적인 열병식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허참, 최고 존엄께서 발등에 불이 떨어지셨구만.”

김두박 대통령은 비아냥거림을 담아서 ‘최고 존엄’이라고 말했다.

“정확히 어느 정도 재해인가?”

“그건 아직 파악이 되지 않았습니다만, 북측에서 거대한 폭발 섬광이 감지되었다고 보고가 되었습니다.”

“폭발 섬광? 설마 이놈들이 핵실험이라도 한 건가! 설마 자연 재해가 아니고 인재인가!”

김두박 대통령은 기뻐하는 심정을 감춘 채, 경악한 표정을 연기하며 물었다. 만약 정말 핵실험이라도 했다면 북풍을 명분으로 여론의 지지를 가져올 수 있다.

북한의 위협 앞에서, 정권의 지지도는 당연히 상승할 수밖에 없으니까.

“핵실험은 아닙니다. 에테르 스톰이 일으킨 자연 재해인 듯합니다.”

“근데 아까부터 에테르 스톰이라고 하는데, 그게 뭔가?”

“그것이…….”

비서실장이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동안, 평양에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게…… 정말입니까?”

선명하게 촬영된 위성사진을 보고 한서진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심포지엄 행사장에서 송출된 영상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깨끗하고, 해상도도 선명했다. 아마 최고 보안 등급의 첩보 위성을 이용해 촬영한 것이리라.

페이 차일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단단히 생각을 정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냉정히 따지면 박사님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고, 박사님에게 직접적인 영향이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한서진은 위성사진을 보면서 묵묵히 들었다.

“하지만 박사님은 한국에서 대통령보다 더 높은 영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국내의 여론에서 완전히 자유로우실 수는 없습니다. 아니, 원치 않아도 휘말리게 된다는 게 맞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페이 차일드가 어떤 심정에서 그런 말을 하는지, 한서진은 자세한 설명 없이도 이해하고 있었다.

북한에 큰 변화가 생기면 필연적으로 남한은 그에 휘말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은 국내에 전방위적인 변화를 끼칠 것이며, 나라 전체에 무시무시한 과부하가 걸리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를 둘러싼 목소리도 시끄러워질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를 한국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자는 해결을 위해 나서주기를 바랄 것이고, 경계하는 자는 해결에 관여하든 방조하든 씹어댈 테니까.

“졸지에 심포지엄이 엉망이 되고 말았네요. 런던왕립학회만 울상이겠습니다.”

“북한은 죽을상이겠지요. 아니,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아직 사망선고만 남았을 뿐입니다.”

한서진은 쓴웃음조차 짓지 못했다.

앞으로 북한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리 상상해도 가늠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북한에 관한 지식이 부족했다. 딱 보통의 사람만큼만 알고 있었다.

그래도 북한이 쑥대밭이 되리라는 것, 이것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평양이 사라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대규모 열병식을 치르다가 송두리째 증발했다.

열병식이니만큼 북한의 무수한 정예, 중장 이상의 고위 군인과 노동당 간부 전원, 그리고 북한의 최고 통치가문인 백두혈통도 그 화마에 휘말렸다.

250만여 명에 달하는 평양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한순간에 재해에 휘말려 사라졌다.

진성그룹 회장, 이서나는 긴급 보고를 받는 내내 얼굴이 새카맣게 굳어 있었다.

“이 보고서대로라면…….”

“북한은 사실상 행정력과 통치력을 상실했습니다. 아니, 통치를 하고 싶어도 그럴 사람이 없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5급 공무원 이상의 모든 공직자와 50대 기업이 송두리째, 그것도 한꺼번에 사라진 것에 비할 수 있을까?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는 물론이고 시장 및 도지사, 지방 의회 등의 일체 행정기관이 증발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으로 치자면 뇌 전체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북한에는 머리를 대체할 수 있는 인력풀이 전혀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주민들의 의식 수준을 생각하면, 무정부사태로 장기적인 혼란이 거듭될 겁니다. 외부의 개입이 전혀 없다면 결국 나라 그 자체가 무너지고 맙니다.”

건강한 나라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결국 다른 체세포가 뇌세포를 대체할 수 있겠지만, 북한은 모든 체세포가 남김없이 병들고 지쳐 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한서진 박사는 심포지엄에서 에테르 스톰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건 대강 이해했어요. 내가 알고 싶은 건 그 에테르 스톰이 어떤 작용을 했냐는 거죠. 불을 질렀어요, 아니면 폭발을 일으켰어요?”

“분석팀은 화재도, 폭발도 아닌, 기이한 대규모 파멸 현상이라고 일단 규정하고 있습니다.”

“파멸 현상?”

“영상을 보시죠.”

비서실장은 재빨리 영상을 틀었다.

어렵사리 손에 넣은 동영상이었다. 아마 대통령도 아직 이 영상은 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서나는 침착히 화면을 주시했다.

푸르스름한 불꽃이 마치 낮게 깔린 잔디처럼 온 사방을 뒤덮고 있다. 은은한 오오라와도 같은 그 모습은 시선을 빼앗을 듯이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새하얗게 변했다. 마치 하얀 페인트를 카메라에 쏟아 부은 것처럼.

몇 초 정도가 흐른 후, 시야를 가린 새하얀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드러난 광경에 이서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세, 세상에…… 이거 진짜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말도 안 돼요…….”

새하얀 빛이 몇 초 동안 세상을 뒤덮은 뒤 드러난 광경은 참혹했다.

그 안에 존재했던 모든 것이 새하얀 재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나무도, 강아지도, 자동차도, 벽돌집도, 그리고 사람도.

바람이 휘잉 하고 불어오자 생전의 형체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사람의 몸이 바스러졌다. 가냘픈 바람조차 이기지 못하고, 재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그 모습은 차라리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냥 잘 만든 영화 CG 같은.

이서나는 왜 비서실장이 ‘화재도, 폭발도 아닌 기이한 파멸 현상’이라고 설명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것 외에 이런 기현상을 마땅히 묘사할 표현이 없다.

충격에 빠져 있던 그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지금 평양 전체가 이렇게 변했다는 건가요?”

“근접 영상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원거리 촬영 사진을 보면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

“조짐은 어디까지나 기이한 들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평양 지근까지 미처 번지지 않은 상황에서, 한순간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평양은 대비할 틈이 전혀 없었겠군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 당했을 겁니다. 수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 모두가요.”

“…….”

이서나는 다시 입을 다문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지금 그룹이 동원 가능한 현금이 얼마죠? 그리고 육 개월, 일 년 동안 각각 끌어올 수 있는 현금은요?”

“현재 그룹 전체 유보금으로 150조 원이 있습니다. 반년 뒤에는 10조 원, 일 년 뒤에는 추가로 13조 원의 유보금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일 년 뒤면 173조 원을 만들 수 있다는 소리다. 이서나는 몹시 아쉬워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룹 전체 유보금이 200조 원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반도체 산업에서 철수하는 한편 대대적인 사업 변신을 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지출이 있었습니다.”

“좋아요, 오늘 이 순간부터 그룹 전체를 쥐어짜세요. 가능한 많은 여력을 비축해야 합니다.”

이유를 말하진 않았지만, 비서실장은 그 목적을 이해했다.

“북한 재개발을 대비하시는 거군요.”

“북한은 송두리째 소멸했어요. 하지만 북한에 이권을 가진 중국은 곧 없어지죠. 지금도 서로 물어뜯고 싸우고 있으니.”

“…….”

“그래도 우리나라가 북한 재건축에 큰 역할을 담당할 가능성은 매우 높으니, 미리 대비는 해둬야죠. 그때 가서 실탄이 부족하다고 땅을 칠 순 없으니. 안 그래요?”

“지당하십니다, 회장님.”

이서나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사실 어찌 될지는 몰라요. 큰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엄청난 쪽박이 될 수도 있죠. 그러나 그 중 어느 쪽이 되든 간에, 여력을 비축하지 못한 회사는 크게 도태되고 말 거예요.”

그녀는 철저한 기업가였다.

========== 작품 후기 ==========

역시 불반도에선 재건축 사업이 짱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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