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1 꿈속의 파트너 =========================================================================
한서진은 정말 백화점 본점으로 찾아왔다. 마침 근처에 있었는지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검은 차 한 대 보이죠? 그거 타면 돼요.
톡 메시지를 확인한 신효진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를 알아보는 이들이 신기한 듯이 쳐다봤지만, 그것을 느끼기에는 정신이 없었다.
“검은 차, 검은 차. 어디 있지……?”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길고 검은 물체가 눈앞을 스르륵 지나치다가 멈췄다.
일반 세단 두세 대는 이어 붙인 듯이 길고 유려한 몸체, 유리창이 스르륵 내려가자 신효진은 화들짝 놀랐다.
차창 너머로 한서진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어서 타요.”
“앗, 네.”
신효진은 얼른 뒷좌석에 탔다.
자리에 앉자 리무진이 스르륵 출발했고, 그제야 콩닥콩닥 고동 소리가 느껴졌다.
“반가워요. 근데, 복장이…….”
“아! 오늘 촬영일이거든요!”
“어, 그럼 제가 촬영에 방해를 한 건 아닌가요?”
“아니에요! 거의 다 끝났는걸요! 이제 메이크업 지우기만 하면 돼요!”
신효진은 저도 모르게 얼른 대답했다. 한서진은 그러시냐고 말을 흐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잠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제야 신효진은 밀폐된 공간에 둘만 있음을 의식하고 얼굴이 붉어졌다. 오늘따라 의상이 왜 이렇게 짧지?
‘사실 더 짧아도 되는데…….’
문득 든 생각에 신효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리무진이 이런 차구나.’
호흡을 가다듬으며, 신효진은 천천히 차량 내부를 살폈다.
이건 자동차가 아니라 이동하는 VIP객실이라는 느낌이다.
고급스러운 재질의 시트에서 풍기는 가죽 냄새가 중후하면서도 품격이 있다. 한쪽 측면에는 크리스탈 장식을 갖춘 고급 바가 갖춰져 있었다.
천장에 넓게 달린 반사 거울이 은은하게 내부를 비춰주고 있어, 자동차가 아니라 스위트룸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잘 지냈어요?”
“네. 박사님은…….”
망설이던 신효진은 조그맣게 물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죠?”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한서진은 작게 피식거렸다.
“염려해주신 덕분에 아무 문제없습니다.”
“다행이에요. 박사님이 돌아가셨다는 기사 떴을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촉촉이 젖은 눈동자가 수줍은 듯이 바라보자 한서진은 입을 다물었다.
애절한 저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는 이제 알고 있다. 동시에 그것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그런데 어쩐 일로 따로 보자고 하셨어요?”
신효진이 가라앉은 음색으로 먼저 말을 꺼냈다.
한서진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기 오기 전까지 몇 번이고 고민을 거듭했다. 이미 결정을 내렸지만, 잘한 판단인지 아직도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말을 해야 했다.
“레노지안에 다녀왔습니다.”
에드윈은 런던왕립학회에 소속된 이론물리학자로, 해당 분야에서 저명한 명성을 쌓고 있는 과학자다.
귀족 가문 출신인 그는 상당한 부와 학식을 두루 갖추고 있으며, 여왕으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기도 했다.
영국 과학계에서는 나름 대단한 축에 들어가는 인물, 그런 그가 직접 비행기를 타고 먼 한국까지 날아왔다.
“……해서, 어려운 말씀인 건 알지만 한 박사님을 중심으로 한국대학교에서 심포지엄을 열었으면 합니다. 우리 왕립학회 회원들은 그에 맞춰서 방한 일정을 잡을 수 있습니다.”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며, 에드윈은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차가운 느낌이 강한 성숙한 미인이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강렬한 미모에서는 범접하기 힘든 기운이 풍긴다.
스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에드윈이 긴장했던 것은 비단 그녀의 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한국 제일의 재벌, H그룹의 후계자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여자, 송하나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한 박사님의 강연 일정은 학회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저희는 오히려 이번 심포지엄이 단발성에 머무르지 않고 연속성을 띠었으면 해요.”
“연속성이라 하시면……?”
에드윈의 안색이 살짝 환해졌다.
송하나는 도도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아시겠지만 한 박사님의 전공은 반도체공학입니다. 굳이 에테르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반도체공학을 중심으로 정기적인 심포지엄 같은 학술 행사를 열었으면 해요.”
“한국대에서 개최하시는 말씀이시군요.”
“네, 그래요.”
“정기적이라면, 횟수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시는지?”
송하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상하반기로 나눠서 일 년에 두 번 정도면 어떨까요.”
“그럼 에테르 학술회는 그것과 별도로 하는 겁니까?”
“일단은 별로로 갖겠지만, 한 박사님이 정기 학술회에 참가하시면 아마도 에테르 관련 주제를 다루게 되겠지요.”
“좋습니다.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약속드리지요.”
기분 좋은 협상 타결. 송하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도 되는 거예요? 학회 일정은 중요한 문제일 텐데요?”
“그 정도 권한은 가지고 왔습니다.”
에드윈은 웃으며 그녀와 악수를 나누었다.
한편 그는 속으로 그녀와 한서진이 어떤 관계일지 가볍게 상상해보았다.
그녀는 H그룹의 후계자고, 한서진은 H그룹과 나름 돈독한 사업 파트너 관계를 맺고 있다. 심포지엄 관련 상담을 그녀가 대리하는 게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인과관계의 맞물림이 다소 느슨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혹시 장래를 약속한 사이?’
그녀의 신분, 그리고 눈이 부신 미모를 생각하면 그럴 듯하게 느껴진다. 남녀의 관계는 때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게 가장 잘 들어맞을 때가 있으니까.
“어렵게 한국을 방문했는데, 혹시 한 박사님을 직접 뵐 수는 없을까요?”
“당연히 가능하지요. 내일 제가 스케줄을 잡아볼게요.”
“배려 감사합니다. 저, 그나저나…….”
에드윈은 은근한 미소를 품으며 떠보았다.
“H그룹이 한 박사님을 얼마나 중요시 여기는지 알겠군요. 그룹 총수의 따님께서 직접 학술 행사 일정까지 챙기고 있는 것을 보니 말입니다.”
“약혼자니까, 이 정도 내조야 당연하지요.”
송하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고, 에드윈은 속으로 역시 하며 탄성을 냈다.
‘부럽구만…….’
그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르지 않는 부, 국제적으로 드높은 위상, 시대를 열 새로운 학문의 창시자, 그리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약혼녀. 심지어 그는 아직 이십 대라는 젊음까지 갖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은 하루하루가 어떤 기분일까.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에드윈은 새삼 그런 주책이 들었다.
신효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어, 어딜 다녀오셨다고요?”
“레노지안이요.”
한서진은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두 번이나 반복된 말, 그러나 신효진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레노지안은 아주 멀리 있는 곳이잖아요. 실제인지 아닌지 아직 알 수도 없고, 우리는 그저 꿈으로만…….”
“네, 그래요. 그 꿈을 통해 다녀왔습니다. 신효진 씨가 매일 꿈을 통해 그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처럼요. 다만…….”
한서진은 오해가 없도록 신중히 단어를 골랐다.
“그곳의 사람들은 제가 지구,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관련 이야기를 나눴지요. 신효진 씨와는 그런 차이점이 있습니다.”
“세상에.”
신효진은 입을 살짝 벌렸다.
그녀는 매일 레노지안을 방문하지만, 그 안에서 레노지안의 일원인 스칼린일 뿐이다. 신효진이 아니다.
하지만 한서진은 ‘아서 왕’이 아닌 한서진으로서 레노지안에 다녀왔고, 그곳 사람들도 그 사실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가 레노지안에 있는 동안, 아서 왕이 제 몸으로 이곳에서 활동한 것 같습니다. 중국의 납치 공작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지요.”
한서진은 왕과 몸이 바뀐 동안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최대한 간결하게 설명했다. 신효진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놀라워하면서도, 신중히 귀담아 들었다.
“효진 씨가 겪는 레노지안과 제가 겪는 레노지안은 시간축이 서로 다른 것 같습니다. 아마도 효진 씨의 시간이 더 앞서 있다고 생각돼요.”
“어째서죠?”
“제가 본 아서 왕은 초룡을 거느린 지 오래 되었거든요.”
“아.”
신효진은 탄성을 내며 한 손으로 가볍게 입을 막았다.
한서진은 계속 말했다.
“그래서 효진 씨한테 부탁을 하고 싶어서요.”
“부탁, 이요?”
“꿈속에서 적극적으로 레노지안에 관한 정보를 알아봐주셨으면 해요.”
“…….”
“리온, 그러니까 효진 씨가 알고 있는 젊은 아서 왕은 아직 지구와 한국에 관해 인지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효진 씨가 조심히 돌려 질문하면, 그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는 못할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레노지안에 관해서 이것저것 중요한 사실들을 알아봐주기를 바라신다는 거죠?”
“네.”
신효진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박사님이 직접 알아보시는 건 문제가 있나요?”
“문제가 좀 있습니다. 약간 난감한 문제죠.”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저는 꿈을 통해 레노지안을 자유롭게 방문하는 게 힘들어요. 제가 원하는 때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 안에서 제 마음대로 활동할 수도 없죠.”
“…….”
“비유하자면 관찰자 같은 존재라고 할까요. 그 세상의 사람들은 저를 보지도, 인식하지도 못합니다. 효진 씨처럼 자유롭게 활동할 수가 없어요.”
“그렇군요.”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터라, 신효진은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한서진은 다소 망설였다. 이런 이야기까지 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날 도울 수 있는 건 효진 씨뿐이야. 어쩔 수 없다.’
사실대로 털어놓기를 마음먹고, 그는 입을 열었다.
“아서 왕은 저에게, 아니 정확히는 제가 있는 이 세계에 크게 호의적이지 않아요. 오히려 적대적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리온이 이 세계에 적대적이라니요?”
“아서 왕은 이 세상이 가짜라고 했습니다.”
신효진의 얼굴에 희미한 충격이 떠올랐다.
한서진은 그녀의 눈빛을 똑바로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아서 왕이 원하는 것은 이 세상의 소멸입니다.”
리미트리스 드림, 고대의 저주.
한서진이 존재하는 세상은 저주가 빚어낸, 왕의 꿈으로 이뤄진 허상.
레노지안의 논리대로라면, 왕이 꿈―저주―에서 완전히 깨어나는 순간 당연히 이 세상은 소멸하게 된다.
‘아서 왕…… 지금 이 순간도 지켜보고 있겠지?’
한서진은 생각했다.
자신은 왕이 꿈에서 겪는 인격이고, 꿈에서 깨어나면 왕으로서 꿈에서 겪은 일을 재정립한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신효진과 나눈 대화 역시 왕이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 내가 꾸는 꿈으로 이뤄진 거짓된 세상이다. 꿈에서 완전히 깨어나면 그 세상은 소멸한다.
―그리고 왕비를 조심해라. 나에게 리미트리스 드림을 건 인물이니.
왕은 몇 차례나 그렇게 권고했었다.
저주를 극복해야 한다고, 자신을 부정하지 말라고.
‘내가 살아온 26년이…… 이렇게 선명한데.’
그러나 한서진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레노지안이 꿈이든 다른 우주에 존재하는 실제이든, 자신이 속한 이 세상이 허구라는 것은.
노신하는 말했다.
왕이 레노지안을 완전히 부정하고, 꿈을 실제로 인정하게 되면 저주는 완성되는 것이라고. 그게 저주의 효력이라고.
어쩌면 자신이 이런 마음을 품은 것 또한, 진정한 자신의 의지가 아닌 저주의 작용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마음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
‘아서 왕, 이것이 내 결정이다.’
자신이 존재하는 이곳은 허상이 아니어야 한다.
그것이 그가 원하는 진실이었다.
========== 작품 후기 ==========
꿈에서 깼을 때 완결까지 원고가 다 써져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마감닦이는 오늘도 지친 몸을 이끌고 힘들게 마감을 닦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