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290화 (290/609)

00290  꿈속의 파트너  =========================================================================

‘아서.’

한서진은 홀린 듯이 왕을 주시했다.

황금빛 안개에 둘러싸인 모습은 마치 신계에서 내려온 듯이 신비하다. 금색과 적색이 어우러진 옷, 허리에 차고 있는 아름답고 단단한 보검.

자신과 똑같은 얼굴, 그리고 다른 눈빛.

왕은 대륙의 만백성을 비추는 태양 같은 존재라고 했다.

과연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온몸에서 고결한 위엄이 뿜어져 나온다.

“이제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왕이 입을 열자 한서진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이상하게도 몸이 떨리지 않는다. 마치 이 순간을 당연한 듯이 기다려왔던 것처럼.

한서진은 주저 없이 물었다.

“나는 당신인가?”

“그렇다.”

왕 또한 주저 없이 대답했고, 한서진은 재차 물었다.

“통찰안은 당신이 준 힘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통찰안은 나의 권능이지만, 너는 나이므로 당연히 너 또한 쓸 수 있다.”

“당신의 힘은 어디까지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차분히 응시하던 왕은 천천히 허리에 매달린 검을 빼어 들었다. 날카로운 금속 끝에서 차가운 광채가 검의 측면을 타고 떨어진다.

세상 모든 것을 베어낼 듯한 예기에,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너의 친구, 그리고 너의 적.”

“…….”

“이 검을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멸망시킬 수 있다.”

친구, 그리고 적?

무슨 뜻인가 하던 한서진은 불현듯 깨달았다. 친구는 미국, 그리고 적은 중국을 뜻한다는 것을.

고작 검을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그 커다란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신인가?”

“이 정도로 신이라 할 수는 없지. 다만…….”

왕이 말을 흐렸다.

저런 존재가 말을 흐릴 만한 일이 있단 말인가. 한서진은 궁금하면서도, 왠지 들어서는 안 될 듯한 중압감을 느꼈다.

“언젠가는 신좌를 탈환할 것이다.”

“……!”

“내 대가 아니면 후대에서, 혹은 그 다음 후대에서 언젠가. 시간이 얼마가 흐르든 지간에 반드시 도전하고, 신을 넘어설 것이다.”

단단한 눈빛이 똑바로 쳐다보며, 다짐을 걸듯이 말했다.

“그것이 왕가의 사명이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왕이 현명한 지배자로서의 삶에 안주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만큼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한서진은 다시 물었다.

“내가 사는 이 세상은 정말 꿈인가?”

왕은 주저 없이 끄덕였다.

“그렇다. 내가 꾸는 꿈으로 이뤄진 거짓된 세상이다. 꿈에서 완전히 깨어나면 그 세상은 소멸한다.”

한서진의 지구는 ‘아서 왕’이 꿈꾸는 동안 유지되는 허구이자 허상. 저주가 풀리면 완전히 소멸한다.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은 허상이기에.

한서진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는 거울을 노려보듯이 눈빛을 굳히고, 딱딱한 음색으로 물었다.

“이쪽 세상이 진짜고, 레노지안은 내가 꾸는 꿈으로 이뤄진 허구일 수도 있지 않나?”

“그렇다면 통찰안의 권능, 그리고 에테르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

타이르는 듯한 말투에 한서진은 말문이 막혔다.

왕은 조금도 급하지 않고, 오히려 느긋했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우리는 저주로 인해 지금 잠시 단절되었을 뿐, 본래부터 하나다. 누구도 주체가 아니며, 서로에게 우위를 점하고 있지도 않다.”

“…….”

“걱정하지 마라. 급히 설득할 마음은 없다. 그것은 저주 극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실을 알려주지만, 강요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깨닫게 될 일, 그의 마음을 닫아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두 가지만 기억해라. 먼저, 죽지 마라.”

왕은 편안한 눈빛으로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네가 죽으면 저주는 완성되고, 나 또한 죽는다. 군주 아서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소멸한다.”

“…….”

“그리고 왕비를 조심해라. 나에게 리미트리스 드림을 건 인물이니.”

그제야 한서진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왕비? 그게 누구…….”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바로 네 옆에 있는…….”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내딛었다. 왕도 그에 호응하듯이 가까이 다가오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황금빛 안개가 모든 시야를 덮어 버렸다. 그리고 모든 게 사라졌다.

등줄기의 서늘한 느낌에 한서진은 눈을 번쩍 떴다.

어두컴컴한 천장이 시야에 들어온다. 바로 자신의 침실이었다.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일으킨 그는 옆을 돌아보았다. 얇은 슬립을 입은 송하나가 쌔근거리며 자고 있었다.

잠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주먹을 가만히 쥐었다가 폈다.

‘왕비.’

신효진을 말하는 것이리라.

레노지안의 왕비인 그녀가 왕에게 저주를 걸었고, 그 결과로 이 세상이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그녀의 영혼은 자신이 왕비라는 것을 잊은 채 이 세상에서 신효진으로 존재한단 말인가?

‘신효진 씨는 레노지안의 꿈을 꾸고 있어. 그것도 아서 왕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거울처럼 대립하는 두 개의 세계.

아서 왕과 자신, 저주.

그리고 레노지안을 꿈으로 믿는 신효진.

‘어쩌면 효진 씨가 키워드일지도 몰라. 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허공을 응시하는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때 옆에서 부드러운 손길이 더듬거리며 맞잡아 왔다.

“오빠. 왜 그러고 있어요?”

잠에 취한 눈이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긋나긋한 음색에 근심이 멀어지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냥 잠이 안 와서.”

“그래도 피곤하실 텐데. 더 주무세요.”

“뭔가 아쉬운데. 이왕 일어난 김에…….”

은근한 목소리에 큰 눈망울이 묘한 웃음을 머금는다. 부끄러워하는 건지 가볍게 도발하는 건지 미묘하게 헷갈리는 미소에, 더욱 가슴이 설렜다.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한서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신효진의 모습이 떠오르며, 그녀를 안는 팔에 저절로 힘이 세게 들어갔다.

“수고했어, 효진 씨.”

숨을 돌리고 있는 신효진을 향해 배은미가 사근사근하게 말을 건네며 다가왔다. 그녀는 H그룹에서 붙여준, 신효진 전담 매니저였다.

신효진은 그녀가 건넨 생수통을 열고 물을 마셨다.

“오늘 촬영은 좀 힘드네요.”

“밀린 게 많아서 그렇지. 고생했어.”

“주말이 주말 같지가 않아요. 언제 쉬어본지 까마득해요.”

신효진은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이제 알아주는 모델이었다. 인터넷에서 제법 인지도를 쌓았고, 고정 팬층도 생겨나고 있었다.

신비주의 전략을 취하고 있는 터라 팬들은 예명인 ‘신효’와 나이가 스물이라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한다. 직장 여직원들도 그녀가 SJ설계사무소 직원이라는 비밀을 지켜주고 있었다.

메이크업을 지운 상태에서 모델 신효라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직까지 한 명도 못 봤다.

그래도 그 점이 서운하거나 아쉽지는 않았다.

‘화장 벗기면 나도 날 못 알아보겠으니까, 뭐.’

그녀는 혼자 생각하면서 피식거렸다.

스튜디오를 나선 그녀는 대기 중이던 차에 올랐다. 다음 촬영지는 H백화점 본점이었다.

배은미가 운전대를 잡고, 차를 출발시켰다.

인기가 늘어감에 따라 그녀는 회사 측의 배려로 전용 밴을 타고 다니게 되었다. 물론 모델 업무 관련으로만 쓴다.

“저어, 효진 씨. 다음 주에 있는 오디션은 생각해봤어?”

“말씀드렸잖아요. 전 연기 못해요.”

정확히는 연기를 해본 적이 없다.

“백화점 홍보 모델만 해도 버거워요. 이 이상 일을 늘리고 싶지 않아요. 잘 해낼 자신도 없고…… 무엇보다 일이 더 늘어나면 회사 업무에 지장이 있어요.”

“회사는 그냥 그만 두면 안 돼?”

“……네?”

배은미가 솔직한 표정으로 털어놓았다.

“그냥 사무보조직이라면서. 까짓 거 얼마나 받겠어? 그런 쪽 일이야 페이 뻔한데.”

“……그래도 많이 받아요.”

SJ설계사무소는 동종의 다른 회사보다 두 배쯤 임금을 준다. 신효진만 해도 월급이 350만 원이 넘는다. 여기에 갖가지 복지 혜택까지 합치면, 대기업 정규직 부럽지 않다.

물론 모델 일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무명에, 주말에 하루 이틀씩 띄엄띄엄 하는 데도 한 달에 700만 원 이상을 받고 있으니까.

“효진 씨만 제대로 하면 지금보다 열 배 이상 버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비전도 없는 사무보조직 일에 언제까지 시간을 뺏기려고 그래? 더 유명해지면 이제 회사 출근할 때마다 건물 사람들이 알아볼 텐데.”

“하지만…….”

“아니면 회사를 꼭 다녀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신효진은 입을 다물었다.

회사를 그만두면 더 이상 한서진을 볼 수 없게 된다. 그의 연락처를 알고 있어도 연락할 구실이 사라지게 된다. 지금도 먼저 그에게 연락하려면 굉장한 용기와 구실이 필요한데.

“……언니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전 처음부터 모델 일은 부업으로 생각하고 시작했어요.”

“사무보조직이라 했지? 페이는 얼마나 돼? 한 달에 200은 되니?”

“그, 그래도 350 정도 돼요.”

“효진 씨 지금 일주일에 하루 이틀 일하고 한 달에 700씩 가져가는 거 알지?”

“……네.”

“무명이고, 시작한지 얼마 안 됐는데도 이래. 여기서 열 배, 스무 배, 그게 불가능할 것 같아? 내가 책임지고 효진 씨 밀어준다니까.”

“하지만.”

“알았어, 알았어. 회사 그만두라고는 안 할게. 일단 오디션만이라도 봐봐. 전에 미팅한 감독님이 효진 씨 보고 자기가 생각한 캐릭터 이미지에 딱이라더라. 주연급도 아니고, 연기야 틈나는 대로 교습 받으면 돼. 누군 날 때부터 연기 잘했니?”

“생각해볼게요.”

신효진은 대답을 미뤘고, 배은미는 안타까운 듯이 한숨을 쉬면서 운전을 계속했다.

밴은 어느덧 H백화점 본점에 도착했다.

촬영팀은 이미 촬영 작업을 시작한 상태였다. 먼저 도착한 남녀 모델들이 명품관을 배경으로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아직 효진 씨 순서 아니니까 여기서 쉬고 있어. 보아하니 40분쯤 걸릴 것 같네.”

“네.”

신효진은 구석에 앉아서 기다렸다. 스태프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수군거리며 흘끔거렸다.

그녀는 일부러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못 들은 체 잡지에 시선을 던졌다. 저것은 나쁜 게 아닌, 긍정적인 관심이다.

차갑고 화려한 미녀, 그게 모델 신효가 자랑하고 있는 이미지였으니까.

‘실제하고는 딴판이지만, 뭐.’

가끔 메이크업을 지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곤 한다.

미인이기는 한데 청순하고 착한 이미지라, 메이크업 했을 때의 화려하고 도도한 이미지하고는 전혀 딴판이라나?

촬영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가 진동했다. 무심코 발신인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바, 박사님?”

그녀는 달군 돌멩이를 쥔 것처럼 핸드폰을 쥔 채로 어쩔 줄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그의 전화를 받기에는 이곳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이러다가 끊어지겠어!’

그녀는 결국 최대한 몸을 숙이고, 손으로 가린 채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조율이 덜 된 피아노 줄처럼 목소리가 무지하게 떨려나왔다. 그녀는 자신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왜 떠니, 왜!

「신효진 씨. 접니다.」

“네, 박사님. 아, 안녕하세요.”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전화로는 곤란해서요. 혹시 뵐 수 있을까요? 전 지금 당장이라도 괜찮습니다만.」

“저, 저도 당장이라도 괜찮아요! 당연히 괜찮죠! 그럼요!”

「아, 그럼 제가 찾아가죠. 혹시 위치가?」

“여기 H백화점 본점이에요!”

「알겠습니다. 도착하면 연락드리죠.」

전화가 끊어졌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신효진은 두 발을 빠르게 구르며 좋아했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맞다, 촬영은?”

========== 작품 후기 ==========

“배트 모빌이 그곳이 꿈이라는 증거다. 꿈이 아니고서야 그런 멋진 차가 존재할 수 있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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