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88 꿈속의 파트너 =========================================================================
“국제정치?”
한서진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송하나는 표정은 다소 수줍어했지만 그래도 야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럼 전과하겠다는 거야? 정치학과로?”
“아니에요. 정치학을 전공하겠다는 게 아니고요, 국제정치를 해보고 싶다는 뜻이에요.”
정치학이 아닌 정치. 그제야 한서진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제 욕심 때문은 아니구요. 저도 오빠를 옆에서 돕고 싶어요. 다시는 그런 일이 안 생기게요.”
“힘들 텐데.”
“알아요. 그래서 차근차근 해보려고요. 저도 당장 뭔가를 이루겠다는 건 아니에요.”
한서진은 잠시 입을 다물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자신은 이미 국제정치 역학관계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입장이다. 에테르학 창시자로서 세계 경제와 정치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니.
앞으로는 여러 나라와 얽힌 첨예한 이해갈등을 조율할 일이 많아질지도 모른다. 송하나에게 그 역할을 맡긴다면 어떨까.
‘첫 술에 배부르진 않겠지.’
그녀는 아직 어리다. 그런 복잡한 이해관계를 제대로 조율할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나부터도 자신이 없는데.’
아예 처음부터 그녀에게 맡겨서 차근차근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은 어떨까? 당장은 부족할지언정 시간이 흐르면 당당히 제 몫을 해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중대한 역할이니만큼,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 게 안심되지 않을까?
‘반도체 사업 파트는 정지원 대표님한테 위임했으니까, 그런 정치적인 역할은 하나한테 맡기면 되려나? 회장님도 옆에서 잘 케어해주실 테고.’
그래도 백철중 회장의 막내딸이다. 그 피가 어디로 가지는 않을 듯한 느낌이 든다.
“반도체공학부는 계속 다닐 거지?”
“당연하죠.”
“그럼 한 번 해봐. 나도 도와줄게.”
송하나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밝게 웃었다.
“고마워요.”
화사한 웃음에 한서진도 마음이 포근해졌다.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잘 해낼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 과연 십 년 후에 그녀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이 모든 게 꿈이라고…….’
싸늘한 일침이 독처럼 가슴에 고인다.
그는 가만히 입맛을 다시며,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부드러우면서도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살결이 느껴진다.
따뜻하고 기분 좋은 촉감이 이렇게나 선명한데, 이 모든 게 거짓이라고?
‘그럴 리가 없어.’
설령 진실이라 해도, 그에게는 수긍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세상이 자신이 꾸는 꿈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클레튼 대통령의 성명 발표 이후, 신효진은 세상이 무너진 듯했다. 한서진이 중국에 살해당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어느 채널을 돌려도, 어느 웹사이트를 들어가도 한서진의 사망 이야기만 나온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설마…… 나 때문은 아니겠지?’
오죽하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었다. 자신이 분수를 모르고 마음을 품어서, 꿈을 통해 그를 소유했던 것 때문에 잘못된 건 아닐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이지만, 그만큼 그녀가 받은 충격이 컸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꿈속에서 리온을 통해 한서진을 겹쳐 보듯이 사랑한 게, 모든 화근처럼 느껴진 것이다. 송하나에 대한 죄책감마저 솟아올라, 그녀는 하루 종일 식음을 전폐했다.
결국 견디지 못한 그녀는 사무소에 출근도 하지 않은 채, 꿈으로 도망쳤다.
“표정이 좋지 않군. 어디 아픈 거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정한 목소리에 ‘스칼린’은 문득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당황한 리온이 그녀의 눈물을 닦으며 다정히 안아 주었다.
“왜 그렇게 우는 거요?”
“당신이 죽는 꿈을 꿨어요.”
“하하.”
리온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비웃음 같은 것은 담기지 않은 음색이었다.
“재미있는 꿈이로군. 시간 외에 레노지안의 군주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없소.”
“너무 무서웠어요. 다시는 당신을 보지 못하게 될까 봐…….”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을 테니까.”
“정말이죠?”
리온은 아무렇지 않게 약속을 해주었다. 불현듯 사망 기사가 생각난 스칼린은 다시금 눈물을 흘렸다.
“그저 강인한 여기사인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마음 여린 구석도 있을 줄은 몰랐군.”
스칼린은 조용히 그의 가슴에 뺨을 묻었다.
현실의 그가 죽었다니, 믿을 수가 없다. 그의 체온과 목소리가 이렇게 눈앞에 또렷한데.
아니, 정말 그곳이 현실이기는 한 걸까? 그가 살아 있는 이곳이야말로 진짜 현실은 아닐까?
그녀는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내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한서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레노지안은 실존하는 다른 차원의 세상이고, 자신들이 꿈을 매개체로 그곳을 들여다보는 것은 아닐까, 하고.
설령 그 가설이 사실이라 해도,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꿈을 현실로, 현실을 꿈으로 의심하다니.
‘그래도…… 그래도 싫어! 박사님이 죽은 현실 같은 건!’
처음으로 이성적인 감정을 품게 된 사람이었다. 그처럼 크고, 따뜻한 남자는 만나본 적이 없었으니까.
책임감 없고, 가족에게 짐만 둔 부친 아래에서 자란 그녀에게 있어 남자란 지긋지긋한 존재였다. 그런 세계관을 부숴준 것이 바로 한서진이었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 현실이 그를 죽여 버렸다.
슬픔과 상실감을 잊기 위해, 그날 밤 그녀는 리온에게 더욱 열정적으로 매달렸다. 평소와 달리 거친 몸짓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리온은 더욱 포근하게 안아 주었다.
나란히 껴안고 누운 채 차가운 밤하늘을 보던 중, 스칼린은 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리온이 물었다.
“어떤 꿈인지 자세히 말해줄 수 있소?”
“리온, 사실은…….”
스칼린은 작게 흐느끼며 조용히 설명을 시작했다.
모든 사실을 털어놓지는 않았다. 현재의 리온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에서 적당히 각색을 했다.
“현실과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생생한 꿈을 매일 꾸고, 그곳에서도 나와 인연을 맺고 있단 말이오?”
리온은 차분하게 반문했고, 스칼린은 조용히 끄덕였다.
고작 꿈 가지고 왜 그러냐고, 그가 어리석은 여자를 보듯이 핀잔을 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대는 그 남자가 정말 나와 동일인이라고 생각하시오?”
“네, 그래요. 적어도 꿈속에서는요.”
“정말 그리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소.”
리온은 쾌활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나는 그대의 현실에서도, 그리고 그대의 꿈속에서도 끄떡없이 살아 있을 테니까.”
“리온.”
“말했잖소?”
깊은 눈빛이 그윽이 주시한다. 스칼린은 멍하니 그의 각막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시간 외에, 레노지안의 군주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흐윽!”
신효진은 긴 호흡을 토해내며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눈이 어둠에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거친 호흡이 천천히 누그러지며, 감각이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시간 외에 레노지안의 군주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없소.
팔뚝에 차가운 소름이 돋는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닌, 어떤 흥분이었다. 중독에 가까운 두근거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녀는 정신없이 일어나서 스마트폰을 켰다. 그리고 헤드라인에 뜬 기사를 확인한 순간 저도 모르게 환호를 터트렸다.
“꺄아악!”
―한서진 박사, 기적적으로 생환하다.
“신효진 씨, 이제 몸은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다 나았어요.”
병가를 끝내고 며칠 만에 출근한 신효진은 내내 싱글벙글했다. 마주치는 직원들은 저마다 진심 가득한 눈으로 걱정하고, 격려를 건넸다.
그녀는 사내에서 인기가 많았다. 모든 이들이 그녀를 좋아했다.
연구개발 직원들은 누구나 인정하는 고소득자들이었고, 그래서인지 미혼 남자들은 그녀에게 은근한 호감을 보였다. 사무지원 부서의 여직원들도 그녀를 멀리하지 않고 좋아했다.
회사에 입사한 이후, 그녀는 타인에게 사랑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 직장은 한서진이 그녀에게 베풀어준 가장 큰 친절이자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출근하면 거의 매일 한서진을 볼 수 있는 환경 아닌가.
그런 이유에서 모델로 높은 수입을 올리면서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것이다.
‘박사님…….’
드디어 한서진이 회사에 출근했다. 2, 3주 정도 밖에 안 된 것 같은데 마치 몇 년 만에 보는 듯 그리운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리온…….’
스치듯이 본 그의 모습 위로 리온이 겹쳐 보인다. 단단함이 가득한 그의 음색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레노지안의 군주는 죽지 않소.
참으려 하는데, 자꾸만 실실거리며 웃음이 나왔다.
이 넘치는 행복감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국내 여론의 뜨거운 열기는 중국의 미래로 옮겨갔다.
40만 여 명의 국가 최상층을 처벌한 중국이 과연 어떻게 변화할지를 놓고, 다양한 예측이 쏟아져 나왔다. 전문가, 아마추어 논객, 평범한 네티즌 등 주체를 가리지 않았다.
―진짜 단숨에 부정부패를 들어내 버렸다. 일단 중국은 대수술에 성공한 것 같다.
―체질 개선이 제대로 이뤄지겠지? 어떤 면에서는 조금 부럽기도 하네.
―전차부대로 북경 시위대 진압했을 때 혁명은 그대로 끝나나 보다 했는데, 군대까지 총을 거꾸로 돌릴 줄이야. 진짜 이건 전혀 예상 못했다.
―근데 국가 지도층이 한순간에 증발해버렸으니 앞으로 외교적인 타격이 엄청날 텐데. 주요 국정 업무에 관한 지식은 말 그대로 통째로 사라진 셈이잖아?
―그 정도 손해를 지불하는 대신 정치가 깨끗해질 수 있다면 시도해볼 만하지 않을까?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TV 채널에서든, 사람들은 모이기만 했다 하면 중국 이야기를 했다.
논쟁의 주요 포인트 중에는 중국의 혁명이 우리나라에도 일어날 수 있을까,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소박한 상상의 나래도 포함돼 있었다.
대학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욱 진지하게 중국의 미래 및 동북아의 변화 진로를 토의했다.
“중국은 체질 개선에 성공했어. 지금 인민들은 엄청난 일체감을 느끼고 있을 거야.”
“잠시 주춤하겠지만, 머지않아 무시무시하게 성장하겠네. 그런 일체감이 높은 국민 의식과 결합하면, 그 많은 인구에 지하자원을 딛고…….”
“진정한 동북아의 제국으로 거듭나는 거 아니야? 으, 그건 너무 싫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지 학생들은 몸서리를 쳤다.
그렇지 않아도 중국 인민들은 ‘해냈다!’라는 강렬한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공산당의 해체, 그리고 정치판의 완전한 물갈이를, 자신들의 손으로 이뤄냈으니까.
여기에는 어떤 정치적인 음해나 전략 따위도 없었다. 순수하게 국가 정의를 바라는 시민의식의 합치로 일궈낸 과실이었다.
그런 뿌듯함이 13억이 넘는 인민들의 자부심을 달궜다. 중국은 하나라는 일체의식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산둥성 지방에서 그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
“우리 산둥성은 자주 독립국으로서 새로운 역사를 열 것을 선포한다.”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들은 강력한 중국을 원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추천 외에, 실탄프로덕션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