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86 왕명, 혁명 =========================================================================
공산당 중앙위원회 300명이 같은 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들은 군중의 저주와 욕설, 증오를 한 몸에 받으며 교수대로 강제로 끌려갔다.
CNN 기자로 위장해서 군중에 섞어 있던 제임스 요원은 총서기의 넋 나간 표정을 재빨리 촬영했다.
셔터를 몇 번 누르고 난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기이한 느낌을 받고 소름이 돋았다.
‘뭔가 이상한데?’
이곳에 모인 군중만 해도 수십 만 명 이상이다.
그리고 총서기 등 정치국 상무위원이 교수대에 오르고 있다. 중국 최고위 권력자들이 그들 군중의 손으로 직접 심판을 받는 중이다.
그런데 일절 광기가 보이지 않는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흥분에 휩싸여 있던 군중은 마치 재판에 참석한 배심원처럼 차분했던 것이다.
자기들 손으로 최고 권력자들을 처단하는 순간에 마땅히 보여야 할 집단 광기와 흥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사실을 깨달은 제임스 요원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게 말이 돼?’
특이하게도 대혁명에는 주동 세력이 없다. 미국의 첩보 능력을 총동원해서 알아낸 사실이다.
물이 가득 찬 댐이 수압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하듯이, 부정부패한 중국 지도부에 관해 무의식에 쌓인 증오가 결집해 터져 나온 것. 그것이 이번 대혁명을 바라보는 미국의 시각이었다.
납득되지 않는 일이지만 결론이 그러했다.
그러나 형의 집행을 차분히 바라보는 군중의 눈빛은 그런 것과 거리가 멀다.
일사분란하고 정돈된 공기에서 거대하고 일관된 흐름이 느껴진다. 마치 강력한 지도자가 그 위에서 군중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하는 것처럼.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만세!”
지도자들의 목이 밧줄에 매달리는 순간, 군중들 사이에서 일제히 함성이 터져 나왔다.
혁명의 성공을 알리는 축포였다.
청와대의 분위기는 음울했다.
클레튼 대통령이 방한한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아직 정상 미팅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국빈 행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던 청와대 실무진은 맥이 빠져서 두 손을 놓았고, 김두박 대통령은 매일같이 측근들에게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고 했다.
“온 나라가 한서진 한 명 눈치만 보는 꼴이라니. 이게 무슨 민주주의 국가야?”
청와대 비서관들 사이에서 적지 않게 터져 나오는 불만이요, 한숨이었다.
“글러먹던 기술자 한 명이 돈방석에 앉았다고 나라를 좌지우지 하려 하고 있어.”
“말세야, 말세.”
최석환 비서관은 동료 비서관의 투덜거림에 맞장구를 쳤다. 물론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그냥 돈방석 수준이 아니긴 하지만.’
한서진의 총 자산이 얼마라고 했더라? 1조였나, 2조였나? 물론 단위는 달러를 말한다.
올해 SJ인더스트리 상반기 수익이 6,090억 달러에 로열티도 대충 그 정도쯤이라고 했다. 여기에 SJ인더스트리 지분 가치까지 포함하면?
천문학적인 액수에 그저 정신이 아득해진다.
현대사에서 이만한 자산을 단독으로 보유한 개인이 또 나올 수 있을까?
‘이번에 통과시킨 몇 몇 법이 문제이긴 한데.’
최석환은 조금씩 불안해졌다.
한서진이 격추되었다고 알려졌을 때, 청와대는 중국에 항의하는 대신 재빨리 표류 중이던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힘을 썼다. 여당에서도 일사천리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새벽녘에 대절한 버스로 의원들을 국회로 실어 날라서 성공한 표결이었다. 일반 의원들은 자세한 정황을 알지 못한 채 거수기 노릇만 했다.
뒤늦게 알게 된 야당에서 펄쩍 뛰었지만, 이미 표결은 끝난 상황이었다. 아군마저 속인 완벽한 전술로 원하는 법안 통과를 성공시킨 것이다.
온 나라가 한서진의 비보에 눈이 돌아가 있던 중이라, 아직까지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
‘뭐…… 괜찮겠지? 한서진이한테는 그렇게 크게 중요한 법도 아니니까.’
한서진만 문제 삼지 않으면 상관없다. 어디까지나 여론만 조심하면 된다.
기껏해야 차후 10년 동안 최저임금 상승률의 제한, 금산분리법의 완화, 대기업 규제의 변화 등 크게 무게감이 없는 법안들이니.
CNN 등 유명한 해외 매체들은 많은 외신 기자들을 보내서 중국의 변화를 보도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혁명 세력은 외신 기자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물론 혁명 세력은 중추 세력이랄 것도 없이, 14억 인민이 모인 군중 집단이었지만.
아무튼 덕분에 기자들은 혁명 과정을 자세하게 취재해서 보도할 수 있었다.
―300인의 공산당 중앙위원회,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중국 민중, 스스로 두뇌를 잘라내다.
300인의 중앙위원회.
그야말로 중국을 움직이는 최고 서열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이 민중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비유하자면 대통령과 장관, 그리고 국회의원들이 통째로 증발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분노한 민중, 고위당원 속속들이 잡아들여.
―확인된 숫자만 5만여 명.
군중은 쉬지 않고 부패한 최상위 계층 사냥에 나섰고, 교수대에서는 통곡이 끊이지 않았다.
300인의 중앙위원회 처형에 이은, 5만여 명의 고위당원의 사형 집행에 세계는 혀를 내두르며 놀랐다.
남중국해에서 대기 중이던 미군은 사실상 개전을 중단한 채 관망하고 있는 중이었다.
백악관 또한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개혁의 흐름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관찰했다. 지금 중국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미국에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한 것은 아니었으니.
어떠한 통제 세력도 없다.
그럼에도 13억이 넘는 군중이 한 몸이라도 된 듯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국가를 갉아먹던 부패한 이들을 하나 남김없이 찾아내서, 냉엄한 처벌을 내린다.
날이 갈수록 그 숫자는 늘어만 갔다.
―총 집행수, 40만 명 돌파!
무려 40만 명에 달하는 고위 당원들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세계는 믿을 수 없는 거대한 변화에 전율했다.
한서진은 외신 보도를 보고 있었다.
기사를 읽어 내려갈수록 손에서 식은땀이 뭉쳤다.
‘40만 명이라니…….’
무시무시한 숫자다. 그 많은 목숨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모든 재산을 박탈당한 채.
혁명이 성공하고 벌써 상당한 시일이 흘렀고, 군중은 나름대로 체계를 갖추어 혁명을 진행해 나갔다.
몰수 재산을 관리하는 부서가 발족해서, 형 집행자들의 재산을 확인하고 관리했다. 그 과정에서 욕심을 부린 이도 나왔으나, 그 역시 군중의 손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중국에서 상류층이라고 볼 만한 사람들은 이번에 모조리 처형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재산 역시 압류되었지요. 물론 해외 은닉 재산은 혁명 세력도 아직까지는 어찌하지 못합니다만.”
CIA 화이트 요원, 페이 차일드가 차분히 설명했다.
그는 민감한 첩보 사항에 관해 대화 창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무게감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면서도, 대놓고 말하기에는 민감한 정보를 말해주는 일을 도맡았다.
“신기한 것은 군중의 심판이 비교적 공정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겁니다.”
“공정하다고요?”
“예, 이번 혁명은 얼마든지 대대적인 마녀 사냥으로 번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본래 극빈층이 부유층에 가지는 증오는 대단히 크고, 중국은 부의 양극화가 심한 나라입니다. 그런 증오가 이번 혁명을 통해 얼마든지 터져 나올 수 있음에도, 아직까지 그런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
“재산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사형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죽일 만한 죄가 있는지를 따져 보며 집행하고 있습니다. 부유층이나 공산당원은 무조건 목을 매달으라고 군중 심리에 휩쓸릴 법한데, 그 많은 군중이 차분히 질서와 규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건 마치…….”
“어떤 이가 군중의 배후에서 철저히 통제하는 듯한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물론, 그런 인물이나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죠.”
페이 차일드는 경이롭다는 눈빛을 띠고 말을 이었다.
“국가를 뒤집기까지 한 성난 군중이 보이기에는 통일성이 크고, 합리적인 심판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군중의 움직임은 역사상 전무후무할 겁니다.”
한서진은 문득 왕을 떠올렸다.
혹시 그가 지금도 다른 차원에서 중국 인민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곧 부정했다.
그런 것은 아닐 게다.
그저 왕의 권능이 너무나 거대하여, 상식을 벗어난 군중의 움직임을 낳은 것이리라.
“미국에도 중국 고위층의 은닉 재산이 상당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파악된 규모만 2조 달러가 넘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다니요? 그걸 왜 저에게 묻습니까?”
“한 박사님은 중국으로부터 가장 큰 손해를 입은 피해자가 아닙니까? 당연히 그 손해배상을 받아내셔야지요. 굳이 중국에 직접 청구할 필요 없이 자력구제로 집행하면 됩니다.”
“2조 달러라……대륙의 스케일은 엄청나군요.”
고위층이 해외, 아니 미국에만 빼돌린 개인 자산이 그만큼이나 되다니. 이런 게 규모의 경제라는 것일까?
“그럼 따로 1조 9,000억 원만 챙겨 주시죠.”
생각보다 훨씬 적은 금액에 페이 차일드는 의아해서 물었다.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던 것이다.
“1조 9,000억 원이요? 달러가 아니라 원화가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워싱턴은 은닉 재산 전액을 한 박사님께 지급할 의향도 있습니다. 어차피 중국의 것이었고, 가장 큰 피해자인 한 박사님은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괜찮습니다. 전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딱 받을 만큼만 받겠습니다.”
“금액이 상당히 구체적이신데, 책정 과정을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1조 원은 위자료 등 저에 대한 피해배상금입니다. 5,000억 원은 전용기 A380을 새로 구매할 돈이고, 나머지 4,000억 원은 함께 탑승했던 이들에게 나눠줄 배상금입니다. 한 명당 100억씩 주려 합니다.”
한서진의 덤덤한 말에 페이 차일드는 끄덕였다. 누구라도 납득할 만한 배상금이다. 오히려 워싱턴은 한서진이 너무 관대한 것 아니냐고 웃어넘길지도 모른다.
“참, 우리도 중국에서 열심히 정보 공작을 하고 있습니다.”
“정보 공작이라니요?”
“별 건 아닙니다. 군중이 알지 못하는 고급 정보, 부패한 상류층 관리들의 인적 사항이나 은신 위치, 은닉 재산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요.”
“그렇게 해서 미국에 유리할 게 있나요?”
“중국이 혼란스러워질수록, 그리고 수뇌부가 힘을 잃을수록 국력이 감소합니다. 본래 타국의 약화는 자국의 이익이기도 한 법이지요.”
페이 차일드는 희미하게 웃었다. 친절한 마스크를 하고 있지만 그는 뼛속까지 미국인이었던 것이다.
신기하게도 아무 거부감이 들지 않아, 한서진은 조용히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중국이 약해지면 뜯어먹을 건 많겠군요. 그럼 군중들은 어리석은 선택을 한 걸까요?”
부패한 수뇌부를 처단한 것은 속이 시원하나, 그 바람에 중국은 강대국으로서의 힘과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주변국에서는 사정없이 이권을 뜯어먹기 위해 달려들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모든 인민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페이 차일드는 조소를 지었다.
“혁명은 본래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지요.”
피는, 처형된 40만여 명의 부패층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앞으로 중국은 강대국으로서의 힘과 영향력을 잃고, 타국으로부터 사정없이 국력을 착취당할 것이다.
인민들이 감당하게 될 그 간접 피해야말로, 혁명이 진정으로 섭취하게 될 피가 되리라.
“한순간의 정의는 구현했지만, 그 대가는 지독하게 크고 쓸 겁니다.”
부패를 처단하기 위한 수술.
그러나 중국은 그 대수술을 견딜 체력도, 수술비를 감당할 재정도 되지 않았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감당 못할 수술을 감행한 후유증을 치러야 할 것이다.
========== 작품 후기 ==========
모든 것은 왕의 설계대로.
ps : 285편이 카카오보다 조아라가 늦게 업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고 제가 몸살의 후유증 때문에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ㅜㅜ
조아라는 제가 직접 올리거등여...
기본적으로는 똑같은 시간에 맞춰 올립니다.
실탄의 ㅅ은 쇠약의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