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83 왕명, 혁명 =========================================================================
수직이착륙기가 항모 조지 워싱턴 호에 내려앉았다.
기체에서 내린 한서진은 장성들을 이끌고 마중을 나온 7함대 사령관을 볼 수 있었다.
사령관은 마치 미국 대통령을 대하듯 극진한 자세로 한서진을 맞이했다.
“얼마나 고초가 많으셨습니까.”
“구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사령관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쐐기를 박았다.
“이 7함대가 호위하는 한,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감히 누구도 한 박사님을 위협하지 못할 겁니다.”
“잘 부탁합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편안했다. 한서진은 모처럼 여유롭게 기사 등을 확인하며 시간을 보냈다.
중국이 전국적인 혁명으로 고초를 치르고 있음을 확인한 그는 불현듯 왕을 떠올렸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남들은 우연의 일치로 대규모 혁명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우연으로만 치부하기에는 기적적인 규모였지만.
하지만 한서진은 왕이 중국에 어떤 짓을 했음을 확신했다. 다만 어떻게 한 건지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가만?’
돌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뉴월드백화점.
전 매장에서 일시에 모든 손님이 빠져나가고, 단 한 명의 손님도 백화점을 들리지 않은 그 사건.
그때와 기묘하게 비슷하지 않은가?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지만……! 그래도 설마?’
마른침이 넘어간다.
만약 정말 왕이 중국 인민들의 궐기를 유발한 거라면, 실로 경이적인 권능이라고 할 수 있다. 14억의 인민들을 일사불란하게 일어서게 하는 힘이라니.
한서진은 주먹을 꾹 쥐었다.
‘아서 왕은…… 대체 불가능한 게 뭘까?’
지구의 진위에 대한 염려와는 별개로, 레노지안에 대한 경외감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아서, 그 사람은 정말 신이 아닐까?
그리고…….
‘정말 우리가 동일인이란 말이야?’
마주치자마자 하얀 얼굴에 눈물이 글썽거린다.
잠시 못 본 사이에 조금 마른 것 같기도 하다. 애처로운 자태에 한서진은 가슴이 아팠다.
“오빠!”
송하나는 그대로 뛰어들어 품에 와락 안겼다. 한서진은 그녀를 꼭 껴안은 채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 가여운 것.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괜찮아, 괜찮아.”
“다행이에요. 진짜 다행이에요…….”
7함대에 타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동안 하루에도 여러 번 영상 통화를 했음에도, 여전히 나올 눈물이 남아 있었나 보다. 송하나는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하염없이 흐느꼈다.
겨우 그녀를 달래주고 나서야 한서진은 ‘가족’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다친 덴 없지?”
한지혜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이리저리 시선을 피했다.
한서진은 조금 냉랭하게 말했다.
“뭐, 보다시피. 멀쩡해.”
“됐어, 그럼.”
“뭔가 기분이 몹시 나빠.”
“왜, 왜 기분이 나쁜데?”
“글쎄, 이유는 나도 모르겠고, 그냥 몹시 기분이 나빠.”
“기분이 나쁘면 풀어야지. 내가 도와줄 일은?”
“너한테 준 내 카드를 회수하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은데.”
“너무해! 그럼 나는 어떻게 생활하라고!”
“네가 생활고에 허덕이는 걸 매일매일 지켜보면서 분출되는 엔돌핀이라면 내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을 감쇠할 수 있을 거야.”
“하나야! 살려 줘! 네 약혼자가 이 언니를 죽이려고 해!”
한지혜는 기겁해서 송하나 뒤에 숨었고, 그녀는 눈물 자국을 닦다가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그걸 보고 한지혜가 보란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봤지? 봤지? 내가 하나를 웃게 만들었어!”
“……그래서?”
“그러니까 카드 압수는 봐줘야지!”
“하나야, 네 생각은 어때?”
“한 번만 봐주세요. 언니는 새까맣게 몰랐다잖아요.”
“진짜 어떻게 전 국민이 다 아는 일을 너 혼자만 모를 수 있었던 거야? 경호원들은 대체 뭐 하고?”
한지혜는 주눅이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했잖아. 산장에서 내내 친구들하고만 있었다고. 폰이고 뭐고 다 꺼놨어.”
자세한 사정을 들어보니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기가 찼다.
한지혜의 경호팀은 산장 근처까지 진입하지 않고, 외곽에서 외부인이 들어가지 못하는 수준의 경호를 취했다고 한다.
산장 구조상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친구들하고 노는데 경호팀이 너무 가까이 접근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고.
경호원들은 클레튼 대통령의 성명 발표를 봤지만, 누구도 한지혜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녀도 봤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콘도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슬픔에 무너져서 그런 거라 생각했고, 친구들도 함께 있으니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특별히 걱정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친오빠의 ‘사망’을 모른 채 친구들하고 술독에 빠져 있는 줄 알았다면 누구라도 전달을 했겠지만, 그렇게 오해가 겹치는 바람에 한지혜는 휴가 일정이 끝날 때까지 새까맣게 몰랐다.
그리고 휴가가 딱 끝나고 산장을 나서는 순간 한서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정말 공교로운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정말…….”
“정말, 왜?”
“네가 내 동생이 맞긴 한가 보다.”
“오빠도 내 오빠가 맞긴 한가 봐. 그치?”
“매달리지 마라. 징그럽다.”
“히히, 더 매달릴 건데? 카드 압수 안 한다고 할 때까지 매달릴 건데?”
“생각해보고. 저리 가.”
한서진은 냉담하게 한지헤를 밀쳐냈고, 송하나가 그걸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감정을 회복한 듯이 보였다.
그녀의 손을 잡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하나야.”
“네, 오빠.”
“미안해. 다시는 걱정 안 끼칠게.”
“네, 알겠어요.”
송하나는 배시시 웃으며 다시금 그에게 안겼다.
따뜻한 체온,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혹적인 향기. 그녀를 가볍게 껴안으며, 한서진은 속으로 결심을 굳혔다.
‘이 모든 게…… 꿈일 리가 없어.’
그리고 설령 꿈이라 할지라도…….
‘현실로 만들 거야.’
7함대의 한국 도착에 정확히 맞춰서 클레튼 대통령이 전용기를 타고 한국을 방문했다.
국론이 분열된 채 혼란에 빠져 있던 한국은 한서진의 생환 소식에 다른 의미로 패닉을 맞이했다.
미래를 염려했던 이들은 한서진의 무사함에 뛸 듯이 기뻐했지만, 모두가 그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혼란을 기회로 날치기 입법을 시도한 여당과 청와대는 전전긍긍해서 여론의 눈치만 살폈다.
이런 와중에 미국 대통령까지 방한했으니, 여의도에는 폭탄이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클레튼 대통령은 모든 국빈 일정을 생략한 채, 공항에 내리자마자 전용 리무진을 타고 새연동 대저택으로 향했다. 방한하자마자 한서진부터 찾은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김두박 대통령은 몹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는 말이 있으나, 누구도 그의 심리 상태에 신경 쓰지 않았다.
여의도, 행정부, 법조계, 재계, 그리고 평범한 시민들까지. 온 나라의 관심과 이목은 새연동 회담에 쏠려 있었다.
“한 박사, 무사귀환을 축하합니다.”
대통령은 한서진에게 악수를 청하며 포옹했다. 기자들이 없는 상황에서도 몸짓이 자연스럽고 친근하다. 축하와 안도하는 감정에 사심이라고는 전혀 없음을 보여준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아닙니다. 그저 미국 시민을 구했을 뿐입니다. 미군과 미국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겁니다.”
한서진은 조금 쓴웃음이 나왔다.
클레튼의 적극적인 행동이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한국의 반응과 너무 대조되기 때문이었다.
클레튼은 뭔가를 느꼈는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웃으시나요? 표정이 조금 묘합니다.”
“그게…… 미국은 제가 납치된 것을 제 일을 분노하고 복수까지 결심했었는데, 정작 한국은 그 반대라서 기분이 묘하네요. 물론 사업체를 미국에 두고, 재산 대부분도 해외에 두고 있는 입장에서는 할 말이 아니겠죠?”
“그렇지 않습니다.”
클레튼 대통령은 정색을 하고 반박했다.
“한 박사 같은 인물이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한국은 이미 어마어마한 이득을 봤고, 또 얻게 될 겁니다. 이미 우리 미국의 전격적인 협조를 얻고 있으니까요.”
“…….”
“한 박사의 존재 덕분에 한국은 이미 수천억 달러 이상의 유무형적 이익을 얻고 있습니다. 경제뿐만 아니라 우리 미국과의 외교 관계, 그리고 국제적인 국가 브랜드적인 측면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한 박사가 어려웠던 시절 국가 지원금 몇 만 달러를 지원한 걸 가지고 생색을 내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한서진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애초에 국가 인프라가 없었다면 제가 빛을 보지도 못했을 거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만약 북한에서 태어났으면 뭐 해보지도 못하고 잊혀졌을 거라고…….”
“어리석고 이기적인 자들의 궤변입니다. 같은 논리로 따져보죠. 만약 한 박사가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지금보다 훨씬 일찍 빛을 보고, 지금쯤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을 겁니다.”
클레튼 대통령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오히려 이런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빛을 보는 게 더욱 늦었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10년은 더 일찍 슈나우저를 발표할 수 있었을 겁니다.”
“…….”
“재산을 해외에 두는 게 어때서요? 한 박사는 이미 일개 국가를 넘어서는 영향력을 지녔습니다. 일반적인 자연인이나 기업을 대하는 마인드로 대우해서는 안 됩니다. 한 박사에게 한국은 짐일 뿐이지만, 한 박사가 없으면 한국은 어마어마한 손해를 보게 됩니다. 아직도 그걸 모르는 어리석은 이들이 있더군요.”
“아, 그럼 이참에 미국으로 갈까요?”
“농담인 건 알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군요. 언제든지 말씀만 하시면 대통령 전용기와 호위 전투기를 보내드리지요.”
“왜 농담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런 아름다운 약혼녀를 두고 어딜 갑니까. 저라도 눈에 밟혀서 못 움직일 겁니다.”
대통령은 가볍게 농담을 했고, 한서진은 쿡 웃었다.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만들고, 둘은 술자리를 가졌다. 통역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근처에 얼씬하지 않았다. 최수한이 요리 등의 시중을 들 때만 잠깐씩 다가갔을 뿐이다.
“정말 아름다운 저택이군요. 서울은 이런 대저택을 짓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들었는데요.”
“원래 도심 공원이던 것을 개조한 거라더군요. 크렘 회장님이 선물해주셨습니다.”
“역시, 그분은 통이 참 크군요.”
둘은 서로 격식 없이 웃고 떠들며 술잔을 나누었다.
최강대국의 대통령과 대작을 하고 있지만, 한서진은 오랜 고향 친구와 술을 마시는 것처럼 편안했다.
“실은 한 박사에게 꼭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적당히 취기가 올랐을 때 대통령이 넌지시 말문을 열었다.
“말씀하세요.”
“한 박사의 전용기는 고도 8km 상공에서 한쪽 날개가 파손된 채 추락했습니다. 그 낙하 속도가 음속의 몇 배는 됐을 겁니다. 누구라도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지요.”
“…….”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군요. 콜란 기장 등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모른다고만 하고 말입니다.”
한서진의 눈을 똑바로 주시하며, 대통령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알려줄 수 있습니까?”
========== 작품 후기 ==========
“이러려고 나하고 결혼한 거야? 캐묻고, 구속하고, 옭아매기 위해서?”
“아, 아니. 나, 난 그냥 허니가 걱정돼서……!”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