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80 스위치 =========================================================================
황금색을 머금은 섬광의 길이 허공에 펼쳐진다.
고운 빛의 파동이 허공에 뭉치며 넘실거리고 있다. 처음으로 직접 본 마법은 한서진의 마음을 모두 빼앗을 만큼 황홀했고, 아름다웠다.
발을 살짝 들어 얹었다. 푹신하면서도 딱딱한 감각이 아래를 지지했다.
동시에 빛의 길이 스르르 움직이며, 몸이 앞을 향해 나아갔다.
웅장한 왕궁의 풍경이 뒤로 지나간다. 미끄러지듯이 성의 모습이 멀어진다.
천천히 몸이 허공에 떠오르며, 지면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궁전의 모습이 조금씩 작아지며, 넓은 왕성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왕성 밖으로 넓게 펼쳐진 도시의 모습이 보인다.
탄성이 저절로 나올 만큼 넓고, 아름답다.
높은 건물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결코 건축 기술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웅장한 왕성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낮은 건물들이 질서정연한 조화를 이루며 끝없이 서 있다. 서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거대한 도시였다.
“여기가 수도인가요?”
한서진은 노신하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는 허공에 뜬 채로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폐하, 군주는 지고한 존재입니다. 부디 소신에게 존칭은 삼가옵소서.”
“하지만 그게…….”
“간청 드립니다.”
노신하는 극구 청했다. 한서진은 난감해서 시선을 피했다.
불현듯 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꿈에서 본 군주 아서의 위풍당당한 모습, 하지만 눈빛만큼은 이질적이다.
“이곳은 수도 레노안, 왕성이 뿌리내린 레노지안 대륙 최대의 도시입니다.”
“레노지안 대륙…….”
한서진은 어색한 듯 그 발음을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서 두려움에 떨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이 세상으로 끌려와 버렸다. 심지어 왕의 육신으로 깨어났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얼떨떨했다.
꿈에는 몇 번 들어온 적 있지만,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체험에 불과했다. 이렇게 직접 거닐고, 숨쉬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간접 체험 때와는 달리 이곳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분명히 알아듣고, 또 자신도 이곳의 말을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신기했다.
“여기가 진짜 세상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또다시 반복되는 존대, 잠시 한숨짓던 노신하는 그렇게 대답했다.
한서진은 믿을 수 없어 확인하듯이 물었다.
“그리고 제가 있는 곳은 꿈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말도 안 돼요. 나는 한서진으로 살아온 27년이 아주 생생하단 말입니다. 그 모든 게 가짜고, 꿈이라니요?”
“폐하.”
노신하의 음색에는 기묘하게 사람을 압도하는 중후함이 실려 있었다.
“아래를 보십시오.”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태산도 작게 느껴질 만큼 높이 떠 있다. 신기하게도 무서운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
발아래 펼쳐진 거대한 수도, 아름다운 녹빛이 가득한 벌판, 그리고 맑은 물이 흐르는 커다란 강.
“이 거대한 도시가, 이 드넓은 땅이 거짓으로 보이십니까?”
거짓이 아니다. 이런 아름다운 땅이 결코 거짓일 리가 없다.
그러나 한서진은 노신하의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둘 다 진짜일 수도 있잖아요.”
“레노지안만이 진실이며, 폐하가 기억하시는 그곳은 거짓된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노신하는 달래듯이, 천천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모든 것은 왕비 가문이 건 저주에서부터 시작 됩니다…….”
저주의 제물이 된 왕비, 반역을 꾀한 카르쉬라이 백작 가문, 수년 째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레노지안의 군주…….
“부디 기억해 내십시오. 이 모든 것들을…….”
노신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드넓은 평야를 내달리던 때를, 혹한의 땅을 차지한 설인 괴물을 처치하던 순간을, 자애롭고 현명한 군주를 향해 보내던 군중의 환호를.
뛰어난 왕가의 혈통을 타고 난 아서 왕은 검의 극한을 통달했다. 열 살 때 이미 대륙에서 적수를 찾아볼 수 없었으며, 스무 살에는 내로라하는 용장들이 앞 다투어 가르침을 청했다.
한 번의 호흡으로 대지를 불태우는 마계의 괴물조차 아서 왕의 검 앞에서는 하룻강아지에 지나지 않았다.
뛰어난 통치 아래 무수한 인재들이 모였고, 그들은 힘을 합쳐 레노지안 대륙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었다. 왕가를 향한 백성들의 칭송은 태양과 달처럼 언제나 그치지 않았다.
존경받는 왕가. 만 권의 책으로도 담아내지 못할 전설적인 무용담. 아름다운 영애들과의 낭만적인 사랑.
왕의 삶은 빛으로 가득했다.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대륙을 비추는 유일한 별이었다.
“…….”
한서진은 그 모든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믿지 못했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아서 왕은…… 뭔가 굉장하군요.”
신화.
왕의 삶은 신화 그 자체였다. 차라리 신이라고 하면 믿어질 법한 웅장함으로 가득했다.
“폐하가 곧 군주 아서이십니다. 그 점을 부디 잊지 마십시오.”
“좋아요, 일단 여기가 진짜고 한국이 꿈이라고 쳐요. 그럼 지금 그쪽에 있는 제 몸은 어떻게 된 거죠?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었는데.”
“……폐하의 진정한 의지가 넘어가셨으니, 아무 일도 없이 수습되었을 겁니다.”
“이상하잖아요? 내가 정말 아서 왕이 꾸는 꿈속의 인격이라면,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건 꿈에서 깨어났다는 건데, 진짜 아서 왕은 반대로 나를 구하러 꿈에 들어왔다고요?”
“그것이 바로 저주의 힘입니다.”
노신하는 차분히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현실의 자신과 꿈속의 자신으로 인격이 분할되신 겁니다.”
“…….”
“그러나 표면적인 인격에 균열이 일어난 것일 뿐, 영혼은 오롯한 하나라는 사실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한서진은 주먹을 쥔 채 바르르 떨었다.
왕의 세상이 진실이고, 자신의 세상은 거짓이라고 한다. 그 모든 게 꿈이라고 한다.
‘말도 안 돼!’
송하나, 한지혜, 정지원, 백철중……. 자신에게 더 없이 소중한 그 사람들.
27여 년을 거치면 겪어온 온갖 풍파와 고생, 성공과 환희.
그 모든 게 꿈이라고? 허구라고?
그는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그럴 리가 없어.”
―바로 며칠 전, 우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공식 성명.
홀을 가득 메운 기자들은 숨소리 한 모금도 제대로 내뱉지 못한 채 조용했다.
그만큼 대통령의 발표는 충격적이었다. 중국 공군이 한서진이 탄 전용기를 격추시켰다니.
―한서진 박사는 우리 미국의 명예시민이자, 은인이며, 영웅이고, 빛입니다. 미국의 빛, 아니 인류의 미래는 중국의 야욕에 의해 맥없이 꺼지고 말았습니다…….
클레튼 대통령은 잠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정신없이 플래시가 터졌다. 미국 대통령이 눈물을 보이다니, 발표 서두 문장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가 특종감이었다.
―이는 단순한 살해 행위가 아닌, 인류의 미래를 빼앗은 국제적인 범죄 행위입니다. 또한 미국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조롱하는 행위입니다. 우리 미국은 한서진 박사의 안타까운 죽음을 슬퍼하지만, 또한 그 이상으로 분노합니다.
카메라를 주시하는 대통령의 눈빛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한서진 박사를 살해한 것은 명백한 도발 행위입니다. 이에 저는 미국 대통령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서 선언합니다. 중국은 한서진 박사를 살해한 범죄 행위에 관해서 무제한으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클레튼 대통령은 굳게 서약했다.
―우리는 사과가 아닌 응징과 처벌을 원하며, 모든 힘을 다해 얻어낼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의 성명발표는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국제 사회는 미국이 낱낱이 발표한 내용을 보고 경악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선진국들은 즉각 성명 발표를 내며 중국 지도부를 맹비난했다.
중국은 미국의 음해라고, 자신들은 결백하다며 재빠르게 반박했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대사건에 그저 놀라워했다. 특히 한국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들끓었다.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오며 중국을 맹비난했다. 한국대학교에는 조의를 나타내는 플랜카드가 걸렸고, 반도체공학부는 강의와 연구 행사 등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
한국대학교는 물론, 온 나라가 초상집 분위기였다.
―내가 언제 그 놈들이 사고 칠 줄 알았다. 남이 잘되는 거 배 아파서 순순히 못 지켜보는 놈들이지.
―에테르 학문은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피지도 못하고 꺾인 거지. 한서진 박사가 선구자이고 창업자인데 제대로 시작해보지도 못하고 죽었으니.
분노와 애석함만이 여론의 전부가 아니었다. 우려를 나타내는 시각도 만만치 않았다.
―죽은 사람은 안타깝지만, 이거 잘못하면 한중 전쟁 일어나는 거 아니야?
―그러게. 미국 하는 거보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듯한데.
―솔직히 한서진 박사는 미국인이나 다름없잖아. 미국 입장에서는 자기 나라 대통령을 쏴 죽인 것보다 더한 모욕이라고. 아무리 중국이라고 해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중국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참으면 안 되지. 진짜 동북아시아에서 3차 세계대전 터지겠네.
미국의 맹비난, 그리고 선전포고에 가까운 대통령 성명.
중국 역시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한서진 박사의 죽음은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나, 중국 정부의 책임이라는 미국의 주장은 잘못되었습니다. 당시 그의 전용기는 핵탄두를 운반 중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었고, 지역 군 기지에서 출동한 전투기들은 검문을 위해 통제를 따르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하게 도주하다가 기체에 고장을 일으켜 추락한 것뿐입니다.
중국은 그에 따른 통신 녹취 등 및 테러 정보 입수 과정 등을 상세히 공개했다.
미국과 중국 간에 치열한 비난 성명과 주장이 오고갔고, 태평양 함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계를 움직이는 두 명의 거인. 그 움직임이 거대한 전쟁의 냄새를 불러오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박사님을 중요시하는 미국의 의지는 뚜렷합니다. 이제 그만 연락을 취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러다가 정말 전쟁이라도 나면…….”
콜란 기장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가, 왕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했다.
깊은 고요함이 가득한 눈빛은 사람의 숨을 멎게 만드는 압박감이 있었다.
왕이 대답했다.
“생각 중이다.”
“생각이라고요? 어떤…….”
왕은 대답하지 않았고, 콜란 기장은 주눅이 든 채로 몇 걸음 물러났다.
혼자가 된 왕은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미국, 그 나라는 생각보다 적극적이군.’
미국이 ‘한서진’을 얼마나 중요시 여기는지는 확인되었다. 아찔한 납치 경험까지 한 번 겪었으니, 차후에 한서진의 안위에 문제가 생길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러나 감히 왕에게 손을 댄 중국의 행위는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한다.
본래 왕은 중국 지도부의 목숨으로 책임을 물을 생각이었다. 왕의 권능이면 수천 명의 중국 최고위층을 동시에, 흔적도 없이 목숨을 거두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다.
또한 중국의 수도 그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도 고려했다. 조그마한 운석을 떨어뜨리면 도시 하나쯤 없애버리는 것 역시 손쉬운 일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시간이 없다.’
꿈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쪽이 아닌 ‘저쪽’에 문제가 생겨서다.
‘한서진이 레노지안을 거부하고 있다.’
느껴지고 있었다. 그가 레노지안을 거부하고, 이곳에 돌아오고자 하고 있음을.
왕은 천천히 일어섰다.
“콜란 기장. 미국에 연락해라.”
“예, 박사님!”
갑작스러운 지시에 콜란 기장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뛸 듯이 기뻐했다.
왕은 더 이상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는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서진, 꿈속의 자신을 감히 해하고자 한 나라. 비록 이 세계를 이룬 모든 게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라 해도, 왕을 해하고자 한 죄는 크다.
올바른 본보기가 필요하다.
더 이상 누구도 감히 한서진을 해하고자 할 의지가 생기지 않을 만큼, 처절한 본보기가.
왕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유일한 군주, 아서 카드리온 슐트제너윈 코트발 1세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14억이 넘어가는 존재감이 느껴진다. 개미처럼 미약하기 그지없는 기운. 그것들을 남김없이 관조하며, 왕은 권능을 발휘했다.
“혁명하라.”
북경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 작품 후기 ==========
왕명은 너무 파괴력이 쎄다고 편집장님이 쿨 제한을 걸어두셨는데 드디어 간만에 진명 개방을 허락받았습니다. 헉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