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5 전초전 =========================================================================
왕은 모처럼 개운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화려한 왕의 침실에는 십여 명의 인원이 무릎을 꿇고 자신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뜰 때면 언제나 느껴지곤 했던, 꿈과 현실이 겹치며 발생하는 어지럼증. 이상하게도 오늘은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모처럼 개운한 감각, 그리고 느껴지지 않는 간극.
왕은 곧 이유를 깨달았다.
“처음으로 꿈을 꾸지 않았군.”
수행원들 가장 앞에 무릎 꿇고 있던 노신하가 고개를 들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다행입니다, 폐하.”
“어째서 경은 다행이라 말하는 거요?”
“폐하께서 저주에 걸린 후 처음으로 꿈을 꾸지 않으신 것은, 꿈속 세상이 폐하에게 거부 반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꾸준히 해온 의식 때문이지요.”
대의식이 성공하고 꿈속 세상과 간접적인 연결에 성공한 이후, 왕은 다시금 꾸준히 의식을 거듭해왔다.
바로 그 간접 통로를 통해 직접적으로 꿈속에 강림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전에 딱 한 번 성공했었던 강림. 이번에는 좀 더 효율적이고 강력한 강림을 준비 중이었다.
바로 신효진, 꿈속의 왕비를 찾아가기 위해서다.
“의식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 뒤틀림에 놀란 저주가 일시적으로 폐하를 밀어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꿈을 꾸지 않은 것이지요.”
왕도 그제야 안심하며 웃음을 지었다.
“그럼 더 의식에 박차를 가해야겠군. 바로 준비하시오.”
꿈속 세상은 이곳보다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하룻밤 꿈을 건너뛰면 과연 얼마만큼의 기억이 단절될까.
그러나 왕도, 신하도 그 점을 신경 쓰지 않았다.
마법 의식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 점이 중요했다.
OC(Overseas citizen)지원팀.
명예시민인 한서진을 보조하기 위해 백악관에 신설된 부서다. 유례가 없는 팀이다 보니 임시로 백악관 직속에 배치했고, 조만간 제대로 된 부처로 자리가 잡힐 예정이다.
현재 팀의 흡수를 위해 국무부와 국방부, 국토안보부가 치열한 물밑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에테르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부터는 팀이 CIA 같은 독립행정관청으로 거듭날 가능성도 매우 높았다.
OC지원팀은 지금까지는 CIA 등 첩보기관의 도움을 받아 한서진의 행적을 그늘에서 보좌하고 있었다. 한서진이 모르게 그의 주변 인물 뒷조사를 하기도 했다. 신변 경호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일이었다.
팀에는 첩보, 과학, 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도 포함돼 있었다.
심지어 연애 코치를 위한 심리전문가도 포함돼 있었다. 한서진이 CIA요원에게 연애 상담을 털어놓지 않아, 아직까지 그가 역할을 발휘할 기회는 없었지만.
그래도 훗날 부부싸움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연구와 사업에 차질이 빚으면 곤란하니, 그때를 위해 백악관은 착실하게 팀의 구성에 투자해왔다.
그 OC지원팀이 며칠째 퇴근도 못한 채 신경이 잔뜩 곤두서서 격론에 빠져 있었다.
“이 비행 코스는 너무 위험합니다. 한 박사의 안전을 완벽하게 지킨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항공기로 영국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중국 영공을 지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 넓은 대륙을 지나가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 안심할 수 없다.
지나친 음모론이고, 중국이 미치지 않고서야 납치 같은 짓을 하진 않겠지만,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대비해야 하는 OC지원팀으로서는 기존 항로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온 항로는 바로 보하이 해에서 베이징 북부를 거쳐 몽고 영공을 이용한다는 계획이다.
중국 영공을 지나치는 시간을 대폭 줄임으로써 안전을 확보한다는 계획이지만, 이마저도 반대로 부딪쳤다.
“설마 중국이 정말로 납치를 하려고 할까요? 그리고 몽고를 거치는 수정 항로라면 우리도 중국의 움직임을 얼마든지 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미친 척 하고 납치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그랬다가는 전면전입니다. 중국은 우리 미합중국과 전면전을 벌일 국력도, 용기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전면전을 각오하면서까지 한 박사를 납치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제가 만약 중국 지도부라면 나중 일은 어찌 되든 간에 한 박사, 기회가 되는 대로 무조건 납치합니다. 자국 영공을 지나가는 순간만큼 절호의 기회는 없지요.”
날카로운 각이 진 안경을 쓴 여자 위원장, 마리아는 혀에 독을 품은 듯이 몰아붙였다. 물론 온건파도 만만치는 않았다.
“제가 중국 정부라면 그런 미친 짓은 못 합니다. 그 순간부터 미합중국은 모든 군사력을 동원해서 실질적인 전쟁에 돌입할 테니까요. 제가 미국 대통령이라면 그렇게 행동할 것이고, 중국 정부도 그걸 알고 있을 겁니다.”
“중요한 인질을 잡고 있는데 워싱턴이 그렇게 한다고요?”
“미국은 인질을 놓고 협상을 하지 않…….”
온건파는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자신이 어떤 모순에 빠져 있는지 깨달은 것이다.
강경파 여성, 마리아 위원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한 박사의 신병을 빼앗기는 순간부터 미국은 이미 지고 나서 전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최후의 최후까지 휘둘리겠지요.”
“…….”
“간단해요. 그냥 중국 영공에 들어가지만 않으면 돼요. 조금 멀리 돌아서 가겠지만, 그 정도는 한 박사의 신병을 지키는 담보 비용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결국 사흘에 걸친 격론 끝에 최종적으로 한서진의 영국행 항로가 결정되었다.
김포공항에서 남행하여 필리핀 북부를 거쳐, 베트남 영공을 지나 영국으로 직행하는 항로였다.
항로만 보면 중국의 외곽을 크게 돌아서 지나가는 모습, 즉 중국 영공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항로 결정이라는 가장 중요한 논의를 마친 후에도 OC지원팀 사무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런던왕립학회에서 수상한 움직임은 없었겠지요?”
“학회 위원 중 중국과 연관이 있는 인물들은 샅샅이 뒷조사를 했습니다만, 이상한 점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 이번 초청 강연에 중국의 뒷공작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겠군요.”
런던왕립학회의 한서진 초청, 여기에 중국의 공작이 있었을 거란 의심도 사실 매우 억지스럽다. 그러나 OC지원팀은 실낱같은 상상 가능성도 놓치지 않고 신중히 접근했다.
“CIA는 중국 내부 움직임도 평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면밀히 체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사고가 없었으니, 오늘 당장 사고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해요.”
“최종 항로는 콜란 대령에게 전달하겠습니다.”
“한 박사가 이상하다거나 불쾌감을 느끼지 않도록 잘 대처하라고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콜란 대령, 그는 한서진의 전용기 A380을 운항하는 기장 파일럿으로, 미 공군 출신이었다. 또한 직접적으로 OC지원팀의 관리통제를 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콜란 대령 외에도 경호원, 관리인 등 한서진의 주변 인물 중에는 OC지원팀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이들이 상당수 있다.
그들은 일사불란한 팀의 통제를 받아 유기적인 경호 및 대응을 통해 한서진의 신변을 보호한다. 그가 알지 못하게끔 그림자 속에 은밀히 숨은 채로.
이런 미국의 숨은 노력이 꾸준히 이어져왔기에 한서진은 여태껏 무탈하게 지내올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크렘 회장 및 정지원을 통해 한서진에게 OC지원팀의 존재를 넌지시 알리기도 했다.
우리가 이렇게 철저하게 지켜주고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안심하라는, 미국의 따스한 구애행위다.
“마리아 위원장은 다 좋은데 사람이 너무 깐깐해.”
“중국 영공을 피해야 한다는 건 나도 찬성이야. 거기는 정말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나라니까. 근데 런던왕립학회가 한 박사한테 초청 강연을 부탁한 것에, 누가 중국 입김이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겠어?”
“털어서 먼지 안 나와서 다행이지, 먼지 티끌이라도 나왔으면 초청 강연을 취소해야 한다고 날뛰었을걸.”
“아니면 7함대가 한 박사를 태우고 영국까지 가자고 주장했을지도 모르지.”
“그럼 학술회 다 끝나고 나서 강연할 수 있겠네.”
평소보다 조금 격론이 심하긴 했지만, 오늘도 OC의 주요 업무는 무사히 일단락을 지었다.
떠오르는 신 과학, 에테르.
런던왕립학회의 초청을 받은 한서진은 며칠 동안 부지런히 강연 원고를 준비했다.
원고는 한국어로 되어 있었다. 그가 한국어로 강연을 하면, 통역사가 통역을 해주는 식으로 진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질의응답도 마찬가지로 진행한다.
원래는 송하나도 같이 가려 했다. 그러나 촉박한 일정 속에서 그녀에게 제대로 신경을 써주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쉽지만 혼자서 수행원을 데리고 다녀오기로 했다.
‘일주일씩이나 어떻게 혼자 참고 지내지.’
벌써부터 그 점이 걱정되는 걸 보면, 어지간히 그녀한테 빠져 있는 듯했다.
출발이 내일로 다가왔다.
SJ설계사무소 대표실에서 마지막 준비를 다듬고 있는데, 슬그머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신효진이었다.
“아, 효진 씨. 어서 와요.”
“대표님, 내일 영국 가신다면서요?”
“네, 그렇게 됐어요. 강연이 있거든요.”
“그럼 근원 마법 강의하시는 건가요?”
신효진이 가볍게 웃으면서 물었다. 한서진도 피식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근원 마법 자체를 언급하진 않을 겁니다. 저도 자세하게는 몰라요. 제가 아는 선에서만 에테르를 언급할 거예요.”
“그러고 보니 참 신기해요. 그저 꿈인 줄만 알았는데, 그게 정말 실존하는 어떤 세상이라니……. 레노지안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먼 우주나 다른 차원에 있겠죠.”
“왜 하필 박사님과 제가 선택된 걸까요?”
“……글쎄요.”
그날 이후, 둘은 편하면서도 불편한 사이가 되었다.
편한 것은 레노지안, 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공유할 수 있게 된 점이고, 불편한 점은…….
‘효진 씨. 아니겠지…….’
자신이 그녀의 눈빛에서 묘한 닮음을 느낀다는 것이다.
송하나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 그녀의 눈빛은 그것과 몹시 닮아 있었다.
“요즘 생활은 어때요?”
“제 인생 중에서 최고예요. 저축도 엄청 많이 했고, 어머니 병원비도 걱정 안 해도 되고……. 요즘에는 아버지도 연락이 잘 안 와서 너무 좋아요.”
그녀는 치부라 할 수 있는 가정사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했다.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살짝 돌렸다.
“꿈은요? 별다른 건 없나요?”
“……아.”
꿈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대체 지난밤에는 어떤 내용이 있었기에?
“벼, 별일 없었어요!”
“정말이요?”
“네! 어제도 별일 없었어요! 둘이서 열심히 초룡을 찾아다니고 있는 중이에요.”
신효진은 달빛 아래 드러난, 강인하면서도 고운 리온의 몸이 자신을 포근히 안아주던 그 순간을 생각했다. 눈앞의 한서진과 그때의 기억이 겹쳐지며, 얼굴이 다시금 빨개졌다.
“여, 영국 잘 다녀오세요!”
다음 날.
김포공항에서 A380이 출발했다. 한서진은 항로 설명을 듣고 그저 끄덕이기만 했다. 중국 영공은 위험하니 멀찍이 돌아가겠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중국은 날 별로 안 좋아하는 눈치니까.’
동행은 최소한으로 했다. 경호팀만 거느리고 출발한 것이다.
니트론과 박효산도 동행하고 싶어 했지만, 연구실에서 연구나 하라고 집어넣고 나왔다.
필리핀까지 7함대 전투기 4기가 호위로 따라붙는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호위 전투기가 복귀하고, 필리핀에서 선회하여 베트남 하노이 영공에 막 진입했을 때, 한서진은 수면을 취하는 중이었다.
편안하게 조종 중이던 기장은 날카롭게 울리는 경보음을 듣고 깜짝 놀랐다. 곧이어 영어로 된 무선이 들어왔다.
「여기는 중화인민공화국 공군 장린펑 상교다. 귀 항공기는 현재 테러 의혹을 받고 있다. 즉시 기수를 돌려서 편대의 지시를 따르기 바란다. 불응시 격추될 수 있다, 이상.」
콜란 기장은 마이크를 켜지 않은 채 분통을 터트렸다.
“미친놈들아! 여긴 베트남 영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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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내가 이 구역의 미친 나라야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