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3 전초전 =========================================================================
사이언스에 게재한 논문은 세계 물리학계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었다. 단순히 이론과 가설만 제시한 게 아니라, 그것을 입증하는 실험까지 실행했기 때문이다.
마력 칩셋, 에테르 회로를 새긴 실리콘 반도체의 화재 진압 코드는 물리학자들의 경악을 샀다. 이제까지 알려진 상식을 파괴하는 이론이 등장한 것이다.
미국은 시범적으로 마력 칩셋을 도입해서 대형 화재 진압 작업에 사용했고, 톡톡히 효과를 보았다. 화재 진압 영상은 자세하게 촬영한 뒤 공공기관을 통해 공개했다.
대사기극이라며 현실을 부정하던 이들도 이쯤에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에테르는 진짜다.”
좋은 일은 겹쳐서 온다고 했던가. 약혼 이후 일이 순탄하게 잘 풀렸다.
사이언스에 게재한 논문은 단단한 지지와 신뢰를 받고 있었고, 마력 칩셋 3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미국 소방관들이 일선에서 사용하면서 극적인 그림이 여럿 나온 게 컸다.
특히 대형 쇼핑몰에서 끝까지 탈출하지 못한 어린 소녀를 구하기 위해 칩셋 3로 화재를 진압하고, 그을음투성이 소녀를 안아서 나오는 중년 소방관의 영상이 UCC를 타면서, 마력 칩셋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니트론, 박효산, 현진국 등 저명한 세 학자의 에테르 및 미스릴 언어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특히 현진국 교수는 한서진이 제공한 에테르 언어의 80% 이상을 해독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오랜 투자와 신뢰가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것으로 에테르 연구에 더 큰 불을 붙일 수 있겠군요. 모두 현 교수님 덕분입니다.”
“아니에요. 나는 한 교수가 준 미스릴 언어를 해독하는데 한 숟가락을 얹었을 뿐입니다. 사실 해독 작업은 수퍼컴퓨터 Z7이 전부 다 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현진국 교수는 겸손히 자기 공을 낮췄다. 다 좋은데 제발 한 교수라고 부르지만 않아줬으면 했다. 학부 3학년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그렇게 좋은 일이 겹겹이 왔고 일도 잘 풀렸다.
하지만 향기로운 꽃에는 꿀벌도 꼬이고, 날파리도 꼬이고, 아무튼 곤충이란 곤충은 다 꼬인다고 했던가?
외교부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해서 진지한 고려를 한 번 부탁드립니다.”
차관은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설명을 맺었다. 한서진은 어처구니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요약하자면 중국 정부에서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의 대량 공급을 바라고 있고, 제가 거기에 손을 써주기를 바란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건 제게 이야기하실 게 아니라 SJ인더스트리에 가셔서 하셔야 할 이야기입니다. 저는 경영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오너이지 않습니까.”
“그럼 제가 주주총회를 거쳐서 CEO에 취임하면 그때 다시 오셔서 같은 말씀을 하시면 될 듯합니다.”
중국은 엄청난 물량의 SJ인더스트리 반도체 제품 공급을 요구해왔다. 여기까지는 좋다. 크게 사주겠다는 소비자는 어느 시장에서든 환영이니.
문제는 한국 정부에 외교적으로 은근히 압박을 했다는 것이다. 이 거래가 성사되지 않으면 한국과의 무역 거래에서 좋을 게 없다는 뜻을 넌지시 전달해왔다.
원하는 물량을 팔면 그만인데, 그런 압박을 했다는 자체가 유쾌하지 않았다. 게다가 SJ인더스트리 반도체는 몇 년치 생산물량이 이미 예약이 잡혀 있는 상황, 중국이 원하는 물량을 맞춰줄 수가 없다.
아마 중국도 예약 물량이 밀려 있는 것을 알기에 그런 짓을 했던 것으로 보였다.
한서진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끌려들어가는 상황이 불쾌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 이미 몇 년치 판매물량 예약이 모두 끝난 것으로 압니다.”
“그거야 공장을 확장하면 되는 문제 아닙니까.”
“그거야말로 정말 회사 경영 간섭이죠. 오너인 저도 안 하는 경영 간섭을 외교부에서 한다고요? SJ인더스트리는 미국 기업이라는 건 알고 계시는 겁니까?”
“간섭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중국 측 의지가 워낙 간절하니 조금만 도와 달라고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박사님은 SJ인더스트리의 오너이시니까요.”
차관은 쩔쩔매고 있었다. 한서진은 왜 장관급 이상 고위직이 아닌 그가 왔는지 비로소 이해했다. 실무자라는 핑계로 샌드백 신세가 된 것이리라.
한서진은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필요성을 못 느꼈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근데 중국이 구체적으로 뭘 가지고 압박하던가요?”
“그게…… 반도체 판매가 이뤄지면 주한미군 전력증대와 미7함대의 제주도 주둔을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CIA 동아시아 지부.
비밀 안가에서는 정보 분석을 위한 치열한 토론이 오가고 있었다. 벌써 이틀째 본부에 올릴 보고서를 제대로 작성하지 못해 시간만 버리고 있는 중이었다.
최근 심상치 않은 중국의 움직임, 이미 예고된 파동이 그들의 수면 시간을 앗아간 것이다.
다행히 수면 시간을 갖다 바치면서 이뤄낸 분석 작업은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7함대의 제주도 주둔을 문제 삼는 것은 이목을 돌리기 위한 쇼입니다. 중국 정부의 진정한 목적은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을 대량으로 확보하는 겁니다.”
일부 이견이 있긴 했지만, 필드 요원들 다수의 지지를 받는 분석이었다.
지부장은 필드 요원들의 의견을 모아 보고서를 작성한 후, 보안 루트를 통해 본부에 보고했다.
미국 CIA 본부.
근래 들어 동북아시아 분석 파트는 무더운 한여름 발전소처럼 쉬지 않고 과열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전에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예전보다 백 배 이상으로 중요한 거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겨우 반도체 물량 확보 때문에 한국까지 압박하고 있다고?”
부국장은 수긍할 수 없다는 듯이 냉담한 반응을 드러냈다.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지팀은 중국 정부가 SJ 반도체를 이용해 독자적인 수퍼컴퓨터 제조에 성공한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중국에는 반도체 수출이 금지돼 있을 텐데, 중국이 무슨 재주로 부품을 조달하나?”
미국은 중국에 SJ 반도체 그 자체를 수출하는 것을 금지했고, SJ인더스트리는 미국 기업으로서 그 조치를 따랐다. 한국에서 생산되는 물량도 미국 본사의 지휘를 받기 때문에, 중국은 반도체 그 자체를 수입하는 게 불가능하다.
오로지 반도체가 들어간 노트북 등의 완제품만이 중국에 수출이 가능하다.
“완제품 노트북을 분해해서 반도체 부품을 확보한 것으로 보입니다.”
“……몇 개나?”
“대략 일만 개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중국 수출은 미국 기업이 맡아서 했을 텐데? 그렇게 대량으로 긁어모으는 게 가능하나? 우리한테 들키지 않고?”
“요원을 총동원해서 단행한 모양입니다. 덕분에 포착하는 게 늦었습니다.”
부국장은 넥타이를 풀어서 느슨하게 만들었다. 이제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볼 준비가 되었다.
“그래서? 수퍼컴퓨터 제조는 어떻게 됐지? 설마 중국이 그새 괜찮은 놈으로 뽑은 건 아니겠지?”
“적어도 500의 한계를 넘어서진 않은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500의 한계.
슈나우저는 500개가 초과하면 병렬 연동을 시켜도 성능의 증가폭이 대폭적으로 줄어든다. 기술자들은 아직 그 원인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
한서진은 이유를 알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그는 시원한 코멘트를 남기지 않았다.
지금도 미국의 수많은 수퍼컴퓨터 및 대형컴퓨터 제조업체들이 500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지만, 속 시원한 성과는 내지 못했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슈나우저 500개가 모여 500의 성능을 낸다면, 1,000개가 모이면 겨우 505의 성능을 낸다. 개수는 500개만큼 늘어났는데도 증가폭은 500이 아닌 5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대세는 500개의 슈나우저로 만든 Z7 그 자체를 묶어서 성능의 증가를 꾀하자는 쪽이다. 물론 이 역시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다행이군. 500의 한계가 그래도 중국 놈들의 발목을 잡아주고 있어. 고마운 일이야.”
“중국 국방과학기술대 핵물리학 부서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습니다. 핵물리학 부서가 ‘신텐허 프로젝트’의 핵심에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신텐허 프로젝트. 동북아시아 지부의 보고서에 적힌, 중국이 SJ반도체를 이용한 수퍼컴퓨터 제조 비밀 계획의 코드네임이다.
“그건 이상하군. 이제 와서 새삼 핵폭탄 시뮬레이션이나 돌리려고 SJ반도체까지 수집해서 수퍼컴퓨터를 제작한다고? 그건 수지타산이 안 맞을 텐데.”
“하지만 분명합니다. 중국은 어떠한 과학, 기술적 목적을 위해서 Z7을 넘어서는 수퍼컴퓨터를 개발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SJ반도체가 대량으로 필요한 겁니다.”
중국은 수입된 컴퓨터 완제품까지 분해해서 물량을 몰래 확보했다.
그러나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미국이 더 이상 좌시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중국도 그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설마 에테르 연구를 선점하기 위해서?”
에테르는 실험적 연구가 어렵다. 중국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통한 이론 연구, 그렇다면 전대미문의 수퍼컴퓨터가 필요하다.
그러나 ‘공식적인’ 세계 최고의 수퍼컴퓨터 Z7은 그 수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중국 정부가 충분한 수량을 손에 넣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부국장은 고심했다.
“국무부에서는 7함대의 주둔을 막기 위한 목적에 더 가중을 두고 있던데.”
“그것은 국무부의 분석일 뿐이지요. 저희는 SJ반도체, 나아가 그것을 이용해서 Z7을 넘어서는 수퍼컴퓨터를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것에 있다고 봅니다.”
“이 시점에서 그런 수퍼컴퓨터 제작에 매달린다는 건……설마 중국 정부가 에테르 연구에 관해서 뭔가 기발한 아이디어라도 있는 건가?”
“그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총성 대신 수많은 정보가 오고가는 전쟁. 약간의 판단 실수만으로 국가는 수천억 달러에 달하는 손실을 입게 된다.
이제 부국장은 결론을 지어야 했다.
―7함대, 마침내 제주도를 모항으로 삼다!
한미 양 정부는 외교 문서에 공식적으로 서명했다. 드디어 7함대가 국제법적인 효력을 가지고, 떳떳하게 제주도를 모항으로 삼은 것이다.
이에 중국과 러시아는 성명서를 통해 격렬한 반응을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두 나라의 언론도 거센 비난을 퍼부으며 정부의 입장에 가세했다.
―아시아를 위협하는 미국의 음모!
―미국은 전쟁을 원하나?
북한 역시 중국 편에 서서 남한과 미국을 맹비난하는 등 목소리를 높였다.
분란의 뜨거운 중심지가 된 한국 언론도 신이 나서 기사를 써내려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초강대국들의 첨예한 신경전이 불거지게 된 것은 한 개인이 개발한 반도체 제품 때문이다. 혹자는 겨우 반도체 때문이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그 반도체는 국제 사회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 그 둘을 원하는 곳은 무수하게 많다. 데스크톱, 노트북, 스마트폰, 네트워크 서버, 수퍼컴퓨터, 인공위성, 항공기, 심지어 군함과 미사일에서도 에테르 반도체를 필요로 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의 으름장은 SJ인더스트리로 무섭게 성장할 미국의 기세를 크게 꺾기 위한 것?
―에테르 반도체,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은 과연 어디까지?
에테르 반도체라는 보물을 놓고, 3개 강대국이 한 치의 양보 없는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하급 마력석을 놓고 벌어지는 즐겁고 치열한 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