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2 약혼식 =========================================================================
약혼식 전, 송지현이 조심스럽게 우려를 전달했다.
“정말 모친을 초대하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자세한 집안 사정을 모르는 송지현으로서는 충분히 품을 수 있는 걱정이었다. 한서진 남매도 그 점은 이해했다.
그러나 남매는 뜻만큼은 분명히 나타냈다.
“끝난 인연이에요. 앞으로 두 분도 사돈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전혀 무관한 남남으로 여겨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애증조차 남지 않은 덤덤한 태도에 백철중 부부는 확실하게 받아들였다.
“운명이라는 게 참…… 그래도 안타깝네요.”
“그럴 수 있지. 고작 유산 다툼 앞에서도 가볍게 끊어지는 게 천륜이야.”
일말의 안타까움을 지우지 못한 송지현과 달리, 백철중은 담백하게 넘어갔다. 오래 살아온 그에게 한서진 가족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약혼식은 백철중의 한남동 사저에서 극비리에 이뤄졌다.
음식 준비도 믿을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시켰고, 입단속도 철저히 했다. 재벌의 힘을 이용하면 언론에 새나가지 않게 단속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한서진은 얀 선생이 만들어준 예복을 입었다. 부드럽게 감기는 고급 원단의 감촉이 상당히 좋았다.
“약간 어색한 것 같다. 평소 입는 정장이랑은 느낌이 달라서…….”
“예복이라서 그래요. 어때요, 잘만 어울리는데.”
옆에서 송하나가 매무새를 거들어주며 즐거워했다.
“멋있어요, 오빠.”
별 거 아닌 간단한 칭찬이 어찌나 달콤하게 들렸는지.
한서진은 흡족한 미소를 띠고 눈앞에서 매무새를 만져주는 송하나를 바라봤다.
‘예쁘다.’
그녀도 얀 선생이 만들어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세련된 느낌의 검은 민소매 원피스의 치맛단 아래에 늘씬한 다리가 뻗어 있다. 무릎 위로 적당한 노출의 허벅지가 살짝 보이고, 몸에 착 달라붙어 육감적인 라인을 살려주고 있었다.
‘얀 선생님…… 당신은 정말 대단해요.’
노출이 조금만 덜했으면 섹시한 느낌이 떨어졌을 것이고, 조금만 더 높았으면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얀 선생이 디자인한 원피스는 그 타협점을 절묘한 아슬아슬함으로 잡아내고 있었다.
섹시하면서도 청순하게. 약혼식 자리에 어울리는 화려함과 단아함을 돋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전 어때요?”
두 발짝 뒤로 물러난 송하나가 가볍게 한 바퀴 돌면서 물었다. 새침한 눈빛에 한서진은 흡족해서 웃었다.
“엄청 예뻐.”
“너무 겉늙어 보이진 않구요?”
“누가 그런 말을 해?”
“저 솔직히 나이에 비해서 들어 보이잖아요. 중학생 때부터 겉늙었단 소리 많이 들었어요.”
“겉늙기는, 무슨. 말도 안 돼.”
사실 송하나는 객관적으로 스물 초반쯤 되어 보인다. 처음 만난 18살 때부터 쭉 그랬다.
단지 나이 들었다는 느낌이 아니라, 나이에 비해 조숙해 보이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신기한 것은 2년 전에 비해서 얼굴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냥 인상이 조금 성숙해 보이는 거지, 절대로 겉늙거나 그런 거 아니야.”
“저 사실 중학생 때부터 이 얼굴이었어요.”
“헐, 진짜?”
“네, 그래서 입학했을 때 선생님으로 오해받기도 했어요.”
14살 때부터 이 얼굴이었다니. 뭔가 다른 의미에서 경악이 느껴진다. 그럼 6년 동안 쭉 이 얼굴이었단 말인가.
“어려서 얼굴이 조숙한 애들이 나중에 시간 지나면 더 어려 보인다던데, 너도 그렇게 되겠는데?”
“그렇게 되면 좋겠는데, 이 얼굴 맞는 나이부터 제 나이 먹어갈까 봐요. 그럼 엄청 억울할 것 같아서요.”
“어머님을 보면 절대 그러지 않을 것 같아.”
“아, 맞다. 엄마도 어려서 노안이라서 엄청 고민이 심했다고 들었어요.”
한서진은 속으로 그럼 그렇지, 하고 쾌재를 불렀다.
송지현은 마흔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른 중반 이하로 보인다. 송하나도 나중에 그렇게 된다는 거겠지?
그렇게 잡담을 나누면서 둘은 준비를 마쳤다.
정원으로 나오자 이미 야외 테이블이 꾸며져 있었다. 한쪽에는 호텔 출장팀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요리를 준비 중이었다.
겨우 네 명이 참여하는 행사치고 규모가 상당히 크다. 물론 백철중 입장에서는 귀중한 막내딸의 약혼식을 너무 검소하게 치른다고 아쉬워하겠지만.
한지혜는 백철중 부부와 자연스럽게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한서진, 송하나 커플은 손을 잡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역시 옷이 날개구만. 아주 근사하네.”
“멋있어요, 한 대표. 우리 하나도 오늘 엄청 예쁘구나.”
“고마워요.”
“오빠도 이렇게 보니 제법 근사하네. 하나도 진짜 예쁘다.”
“고마워요, 언니. 언니도 오늘 옷 예뻐요.”
한지혜는 단아한 와인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평소의 천방지축 느낌 대신 살짝 우아한 기품이 서려 있어, 한서진도 이게 내 동생이 맞나 하고 눈을 비비고 다시 볼 정도였다.
“약혼 축하해, 오빠. 그리고 하나야.”
“고맙다.”
“와주셔서 고마워요, 언니.”
“한 대표, 약혼기간 굳이 길게 갈 필요 없어요. 알죠?”
“아니, 여보. 그래도 이제 스무 살인데…….”
“오래 끼고 있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그러다가 다른 여자들이 한 대표 공략하면 어쩌려고요?”
송지현의 일침에 백철중은 얼굴을 굳혔다.
“그건 안 되지.”
백철중 부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말로 설명하기 힘든 자연스러움이 있다. 그래서 주변의 시선에서 불구하고 수십 년 간 꿋꿋이 부부지연을 맺어온 것일까.
“아무리 식을 간소하게 한다지만 그래도 케잌 커팅은 해야지.”
“맞아요, 맞아.”
백철중 부부는 입을 모아 말했고, 한서진 커플은 쑥스러움 속에서 케이크 커팅을 했다. 한지혜는 대포만한 카메라를 들고 끊임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넓은 정원에서 요리사와 수행원 수십 명이 시중을 드는 야외 파티. 가족 네 명만이 참여한 조촐한 약혼식이지만, 초라하거나 외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한지혜도 무척 만족스러워 했다.
“친구들을 데려오지 못한 게 아쉽네.”
“너 친구들, 내가 오빠인 건 알아?”
“모르지. 알면 난리 났지.”
“어떻게 잘 숨기고 다닌다?”
“그럼, 내가 누군데.”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요리를 가지러 갔다. 갓 구워낸 거위 요리를 접심에 담는데, 옆에 송지현이 슬쩍 와서 섰다.
“한 대표, 아직 약혼만 했지만 약혼은 결국 결혼의 예약이니 이제부터 한 식구라 생각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저도 장모……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한서진은 호칭이 입에 붙지 않아 껄끄러웠다.
겉보기에는 서른 중반 이하로 보이는 송지현을 장모라 부르려니 뭔가 어색했던 것이다. 송지현도 이해한다는 듯이 눈웃음을 흘렸다.
“우리 하나가 부족한 게 많은 아이지만 그래도 마음은 참 착한 아이에요. 이제 약혼했으니 앞으로 한 대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잘 보살펴줘요. 부탁할게요.”
“걱정 마십시오. 제가 하나 많이 아껴주겠습니다.”
“비록 하나가 많이 어리지만 그래도 난 결혼식은 너무 늦지 않으면 하는데. 졸업 전까지는 데려갈 거죠?”
“어휴, 제가 그렇게 오래 못 기다립니다. 마음 같아서는 오늘 바로 결혼식 치르고 싶을 정도입니다.”
“잘 됐네. 오늘 당장 데려가도 난 상관없어요. 우리 그이는 내가 잘 말려볼게요.”
“그럴까요?”
둘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약혼을 해서인지 송지현이 예전보다 한결 가까워진 느낌이다. 좋은 엄마가 있다면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한서진은 문득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친의 초라한 뒷모습이 생각나서 쓴물을 삼켰다. 그 우중충한 이미지와 지금 해사한 송지현의 모습은 완전히 정반대였다.
가족끼리 가진 조촐한 약혼식이었지만, 마음이 담긴 따뜻한 자리에 한서진은 만족스러웠다.
백철중은 다짐을 받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결혼식은 꼭 성대하게 해야 하네. 알겠지?”
“걱정 마십시오, 회장님.”
“회장님이라니, 이제 장인어른이라 불러야지. 이 사람아.”
“아, 네. 장인어른.”
그렇게 2년 만에 호칭 변경 신고도 마쳤다.
식이 끝나고, 한서진은 조용한 곳에서 송하나와 마주 섰다. 그는 두 손을 꼭 잡은 채 말했다.
“우리 결혼식, 너 졸업은 넘기지 말자. 알았지?”
“전 넘기고 해도 괜찮은데.”
“안 돼. 내가 못 기다려.”
“알았어요. 그럼 졸업 넘기지 말구 해요.”
송하나는 배시시 웃으며 뺨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포근하고 부드러운 느낌에 기분이 좋아진다.
한서진, 송하나 커플은 백철중 부부를 찾았다.
“엄마, 나 오빠, 언니랑 놀다 올게. 셋이서 같이 놀 거야.”
“그러렴. 자고와도 돼.”
“어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고 오는 건 안 돼.”
“약혼도 한 사이고, 셋이서 같이 논다는데 뭐 어때요.”
백철중은 완강하게 거부하는 듯했으나 결국 서른 살 가까이 차이 나는 와이프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허락을 받은 송하나는 곧장 한서진 남매와 함께 저택을 빠져 나왔다.
“어디서 놀까?”
“그냥 집에서 놀자. 집이 더 놀 데 많고 먹을 것도 많은데, 뭐.”
“그래요, 언니. 저도 그게 좋을 거 같아요.”
셋은 새연동 저택으로 향했다.
연미복을 입은 그대로 지하 저장고에서 비싼 술을 여럿 꺼내 야외 테이블에서 마시며 즐겼다. 최수한 집사의 멋진 요리 솜씨가 빛을 발휘했다.
“난 솔직히 설마 했는데 둘이 정말 사귈 줄은 몰랐어. 와, 이래서 남녀는 함부로 붙여놓으면 안 되는 거구나.”
“왜요, 사귈 수도 있지요.”
“근데 고삼 때부터 사귀면서 감쪽같이 속인 거야? 역시 작년 제주도 여행에서 뭔가 이벤트가 있었나 보네?”
있었지. 그것도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아찔한 게.
한서진은 웃음으로 넘겼다.
“됐으니까 그냥 넘어 가.”
“뭔데, 뭔데. 궁금하잖아. 나도 알려 줘.”
“알아서 뭐하게.”
“그 비법을 알아야 오빠처럼 돈 많은 자수성가남 꼬시지. 하나 너도 치사하게 혼자만 알지 말고 비법 공유 좀 하자.”
한서진은 동생의 상체를 가볍게 훑어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넌 안 돼.”
“내가 왜?”
“안 되는 건 안 돼. 넌 하나가 아니잖아.”
“진짜 치사하네. 내가 억울해서라도 반드시 자수성가남 물고 만다.”
세 사람만의 약혼식 뒤풀이는 편안하고 즐거웠다. 비록 결혼식을 올린 건 아니지만, 이제는 진짜 한 가족이 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술자리는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다.
어느덧 피곤함을 느낀 한지혜가 먼저 일어났다.
“난 먼저 잘게.”
“언니, 벌써 주무시게요?”
“너무 많이 마셨어. 으윽, 벌써부터 내일 골 울릴 게 걱정된다.”
한지혜는 비틀거리며 먼저 들어갔다. 송하나는 한서진을 돌아보며 신기하게 여겼다.
“오빠는 멀쩡한 거 같아요. 그렇게 마셨는데.”
“그러게. 이상하게 술이 세진 거 같아.”
엘릭서 복용 효과인가? 한서진은 그 뒤로 술이 비약적으로 세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도 이만 잘까?”
“네.”
둘은 손을 잡고 1층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리고 4층, 한서진의 침실에 들어섰다.
나란히 들어서는데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녀도 지금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까, 해서 슬쩍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수줍게 웃었다.
입구에서 한서진은 그녀를 두 팔로 껴안았다.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품에 가둔 채, 어둠 속에서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부드러운 체온을 느끼며, 비로소 실감을 느꼈다.
우리 약혼했구나.
========== 작품 후기 ==========
여러분, 우리도 이만 잘까요?
전 연령가니까 여기서 막 내릴게요~
다음 장에서 다시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