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1 약혼식 =========================================================================
약혼.
생각지도 못한 경사에 백철중은 첫 입학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둘 사이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진행될 줄이야. 그는 이 기쁜 소식을 와이프에게 전했다.
「정말이에요? 둘이 작년부터 사귀었다고요?」
“그렇다니까.”
「그거 조금 이상하네요. 저는 그냥 썸타는 줄만 알았는데.」
“뭐가 이상해? 그 둘, 처음 만날 때부터 예사롭지 않았어. 나 몰래 지들끼리 먼저 만나고 이야기하고, 쑥덕거리고. 하여튼 젊은 것들은 잠시 붙여놓기만 하면 지들끼리 알아서 불타오르니.”
「뭐, 둘이 어차피 언제고 사귈 거였잖아요. 잘 됐어요. 한서진 박사만한 사윗감도 없지요.」
“한서진이를 딴 여자애들이 채가면 어떡하나 걱정 많이 했는데, 이제 한시름 놓게 됐어.”
「네? 뭐라고요?」
“사실 우리 하나가 순진무구해서 남자 후리는 건 잘 못하잖아. 남자를 만나본 적도 없고. 하나가 잘 할지 영 불안했는데 두 사람 사이가 잘 풀려서 다행이야.”
「……이 양반이 참, 하나가 어떤 애인지를 아직도 모르네요.」
“무슨 소리야?”
「괜찮아요. 착각에 빠져 사는 딸바보도 괜찮지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백철중은 열심히 캐어물었지만 송지현은 놀리면서 웃기만 할 뿐, 속 시원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 둘 사이를 반대했다.
H반도체 신입사원과 회장의 막내딸, 누구라도 허락하지 않을 관계가 아닌가.
그러나 어느 순간 반대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한서진의 성장 가능성을 주목하면서, 그래도 이 정도면 믿고 딸을 맡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조금씩 생겨났다.
웃기게도 그런 마음이 완전히 자라나기도 전에 한서진은 거인으로 우뚝 서버렸다.
그는 예전에 딸을 흔들지 말라는 경고를 한 것도 후회하고, 곧바로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리고 훗날 한서진이 SJ인더스트리의 오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보물을 옆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눈을 비난했다. 사과는 했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치욕으로 남아 있다.
만약 딸이나 와이프가 그 사실을 안다면, 남은 평생을 들들 볶일지도 모른다.
‘서진 군이라면 사윗감으로서는 최고지. 그 이상은 절대로 못 찾지, 암.’
능력이면 능력, 재력이면 재력, 그리고 명예까지, 어느 것 하나도 최고가 아닌 게 없다. 이 나라 최고 수준이 아닌, 세계 최고의 사윗감이자 배우자감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지적 능력도 그렇고, 용모 또한 전혀 부족함이 없이 단정하다.
게다가 여자관계가 담백한 것도 마음에 든다. 숙맥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성품이 그런 것이 흡족했다.
아비인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약혼시켜 달라고 해서 허락 했으니까 당신도 그리 알고 어서 준비해. 그룹 행사 차원으로 아주 크고 화려하게 할 거야.”
「약혼이요? 진짜예요?」
“암, 내 앞에까지 찾아와서 무릎 꿇고 제발 약혼 시켜달라고, 안 시켜주면 자기 평생 혼자 살다가 총각으로 늙어 죽을 거라고 협박했다니까. 내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허락했지. 허참, 스무 살 밖에 안 됐는데 벌써 약혼이라니. 우리 하나만큼은 다른 집안 아이들처럼 혹독하게 키우고 싶지 않았는데.”
「정말 그런 말까지 했어요?」
당연히 새빨간 거짓말이다.
「너무하네. 나도 명색이 부모인데, 왜 당신한테만 찾아가서 그런 부탁을 해요. 한 박사, 섭섭하네.」
“제주도 여행 가서 뭔 일이 있었던 모양이야. 공항에 내리자마자 바로 둘이 그룹 본사로 찾아왔더라고.”
「그래도…… 어머, 잠시만요.」
“무슨 일이야?”
「지금 한서진 박사하고 하나가 저 만나러 백화점에 왔대요.」
백철중은 시간을 흘끗 확인했다.
허락을 받자마자 부리나케 나가서 뭔가 했더니, 송지현에게 달려간 모양이다. 하긴, 딸을 얻으려면 당연히 그 모친에게도 허락을 받아야지.
그는 짐짓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내가 너무 뺀 것 때문에 당신이 미안해서 쉽게 허락해줄 필요는 없어. 충분히 뺄 거 빼고 허락해 줘.”
「결국 허락하라면서 뭐 하러 사람 애간장을 태워요?」
“딸 가진 부모로서 당연한 거야. 그리고 우리 하나가 어디 쉽게 데려갈 수 있는 아이인가?”
H그룹의 차기 회장, 여배우 뺨치는 빼어난 미모, 그리고 우월한 몸매에 한국대를 들어갈 만큼 뛰어난 머리까지.
한서진이 너무 대단해서 그렇지, 송하나도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힘든 대단한 배우자감이다.
「알았어요, 알았어. 적당히 어르다가 허락해줄게요. 나 이제 전화 끊어요.」
“두 분 모두 단번에 허락해주셔서 다행이야. 사실 좀 놀라실 줄 알았는데, 너무 쉽게 허락받았네.”
송하나는 서늘한 눈으로 주시하다가 말했다.
“오빠, 쉽게 허락 받으셨다고 우리 사이까지 쉽게 여기시는 건 아니죠?”
“절대 안 그래.”
그제야 송하나는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서진은 잔뜩 들떠서 말을 늘어놓았다.
“약혼식 아주 크게 하자.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몽땅 다 초대해서 하는 거야. 존 캐롤 상원의원이나 클레튼 대통령까지 부를 생각인데, 어때?”
미 현 대통령과 민주당 차기 유력 대권주자까지 부르겠단다. 그것만 봐도 약혼식 규모를 얼마나 크게 잡고 있는지 가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송하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가족끼리 조촐하게 해요.”
“왜? 평생의 한 번뿐인 약혼식인데 크게크게 해주고 싶은데.”
“그래도 검소하게 해요. 정 크게 해주고 싶으시면…… 나중에 결혼식을 그렇게 해주세요.”
“결혼식을?”
“네, 약혼식은 어차피 약속일 뿐이잖아요. 성대하게 해봤자 의미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언약 절차에 진심을 담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봐요.”
한서진은 그저 기특했다. 이렇게 사려가 깊을 줄이야.
정말 스무 살 맞아? 어디에서 한 30년쯤 먼저 살고 난 다음에 태어난 게 아닐까?
“네 말도 옳은 것 같아.”
“그럼 동의하시는 거죠?”
“그런데 회장님은 성대하게 치르실 모양이던데…… 그건 어떻게 하지?”
“걱정 마세요. 아빠는 제가 설득할게요.”
송하나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대신 아빠가 오빠한테 아무리 부탁해도 흔들리면 안 돼요. 오빠는 약혼식 조촐하게 치르기로 저랑 약속한 거예요.”
“걱정 마. 내가 너랑 약혼하지 회장님이랑 약혼하니? 당연히 네 말을 들어야지.”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약혼식은 결국 가족끼리 소박하게 치르기로 했다. 지인은 일절 부르지 않기로 했다.
한서진은 박효산 교수만이라도 부르고 싶었지만, 가족만의 행사에 가족이 아닌 그를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약혼식은 약혼 당사자 외에 백철중 회장 부부, 그리고 한지혜가 참여하기로 했다. 일가친척도 일체 배제하고 극비리에 치르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 서운하게 여겼던 백철중도 이제는 납득을 했다.
“그래, 하나 말대로 차라리 이게 나을 수도 있어. 공개적으로 했다가는 세상 제대로 시끌벅적해질 테니까.”
“성대하게 치렀다가 혹시 한 박사 마음 변해서 파혼이라도 되면 우리 하나 어떻게 얼굴 들고 살아요. 사람 일이라는 것은 한 시간 뒤도 모르는 건데.”
제법 뼈가 있는 농담에 한서진은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했다.
“제가 마음이 변하다니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당신은 이 좋은 날 왜 그런 부정한 말을 하고 그래?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는 거 아니야.”
“농담도 아니고, 그냥 조용히 치르는 게 여러 모로 낫다는 설명이었어요. 한 박사, 만약 언짢았다면 미안해요. 사과할게요.”
“아닙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말 편히 해주십시오, 사모님.”
“어머, 이제 약혼녀 엄마인데 계속 사모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너무 딱딱해서 섭섭하네.”
송지현은 거듭 놀렸고, 한서진은 쩔쩔매며 응대했다.
장모의 모습은 미래 와이프의 모습이라던데, 설마 20년 후에 송하나도 저렇게 변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땡큐지.’
약혼식을 위해 한서진, 송하나 커플은 예복을 맞추기로 했다. 그들은 송하나가 자주 애용하는 청담동의 ‘얀’ 매장을 찾았다.
통통하게 살찐 체격의 디자이너 얀이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요. 저번의 내 걸작은 어땠나요?”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금도 잘 입고 다닙니다.”
“옷도 걸작이지만, 옷걸이가 더 명품이라. 아마 내 아이도 기뻐하고 있을 거예요. 그렇지, 하나 쏭?”
얀은 한서진을 보고도 덤덤하게 반응했다.
그가 미국 명예시민이자 국제적인 유명 인사라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고객으로서 대할 뿐인 것일까.
“약혼 예복을 맞춘다고?”
얀은 그 말에 눈이 조금 휘둥그레졌다. 송하나는 배시시 웃으며 끄덕였다.
“네, 얀 선생님. 저희 약혼해요.”
“하나 쏭, 그럼 이제 유부녀 되는 거야? 그래도 뽀글파마는 하면 안 돼.”
“…….”
“미안해. 하나 쏭, 농담이었어.”
“…….”
“하나 쏭, 화나 쏭?”
한서진이 그만 풉 웃음을 터트렸고, 송하나도 어쩔 수 없이 웃어버렸다. 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하나 쏭은 뽀글파마를 해도 어울릴 거야. 워낙 마스크가 명품이라.”
“디자인이나 보여줘요.”
송하나는 화가 풀린 얼굴로 말했다.
둘은 디자인을 고르고, 다시 한 번 치수를 쟀다. 얀은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또 치수를 재는 이유를 설명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 체형은 변하니까요.”
치수를 잰 결과 한서진은 그대로였지만, 송하나는 변화가 있었다. 얀은 살짝 놀라며 물었다.
“하나 쏭, 살 쪘네?”
“…….”
“하나 쏭, 화나 쏭?”
“얀 선생님. 그래봤자 그램 단위…….”
“한 컵 더 커졌어. 축하해야 할지, 애도해야 할지.”
얀은 담백하게 설명했고, 한서진은 눈을 치켜떴다. 이게 무슨 말이야?
“한 컵 더 커졌다니요?”
“말 그대로예요. 하나 쏭, 흉부 지방 세포 그룹이 한 사이즈 더 커졌어요. 이거 예전에 짜둔 디자인은 이제 다 폐기해야겠네.”
“…….”
“약혼자인데 설마 몰랐어요?”
사실 한서진은 약혼할 사이임에도 그녀의 정확한 사이즈를 모른다. 키가 크고, 가슴도 크고, 몸매가 매우 육감적이라고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정확한 신체 수치를 말해준 적이 없다.
“그, 그럼 얼만데요?”
“그건 약혼녀한테 물으셔야죠. 저는 고객의 개인정보를 지킬 의무가 있어요.”
얀은 치수를 정리하며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제 됐어. 하나 쏭, 가 봐. 내가 근사한 예복으로 멋지게 뽑아줄게.”
“잘 부탁해요, 얀 선생님.”
인사를 하고 나오면서, 한서진은 송하나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그녀의 눈빛은 덤덤했다. 조금 전 일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저기, 하나야.”
“네, 오빠. 왜 그러세요?”
“한 컵 더 커졌다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체중이 살짝 늘었는데, 가슴이 조금 더 답답한 느낌이 든 걸 보면요.”
“그럼 사이즈가 얼만데?”
“알고 싶으세요?”
그녀가 지은 도도한 미소가 어찌나 아찔했는지, 한서진은 이 순간을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좋아요, 알려줄게요.”
“……고마워.”
“오빠는 제 약혼자니까.”
송하나는 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고, 뭐라고 속삭였다. 그녀가 얼굴을 떼자 한서진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바라봤고, 그녀는 자신 있게 피식 웃으며 먼저 차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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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쏭, 살쪄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