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0 커플, 여름휴가 =========================================================================
따스한 햇살이 얼굴 위로 쏟아진다.
부스럭거리던 한서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문득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감촉이 팔에 느껴진다.
돌아보니 송하나가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아기처럼 평화스러운 표정을 보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불현듯 어젯밤의 일이 떠오른다.
래쉬가드 지퍼를 내리며 붉은 비키니 상의가 드러난 장면, 아마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만큼 강렬하고, 뜨거운 기억이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게 벌써 2년 전 일이다. 백철중 회장과 소주를 대작하다가 그녀와 맞닥뜨렸을 때,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어쩌면, 나는…….’
성공을 위해 부지런히 노력해온 것도, 그녀를 당당히 차지하기 위한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까지 슬며시 고개를 든다.
“……오빠.”
작게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눈이 부신지 이마를 찡그리며 올려다보고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응, 잘 잤어?”
“……아직 아파요.”
그녀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뺨을 살짝 찡그린 게, 거짓말은 아닌 듯이 보인다.
한서진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하나야, 어떡하지? 저기, 내가 말인데 지금 하필 아침이라…….”
“안 돼요, 오빠. 저 죽어요.”
“나도 죽어.”
한서진은 팔을 아래에 넣어 그녀를 가볍게 안아 올려 품안에 가뒀다. 체념에 가까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진짠데.”
한서진, 송하나 커플이 별장을 나선 것은 오후 4시가 훌쩍 넘어서였다.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못 먹은 채 기운만 뺐더니 뱃속에서 세계대전이 난 듯했다.
먹을 게 없으니 온몸에 힘도 없다. 그래도 기분 좋은 피로감에 한서진은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송하나는 다소 지친 듯이 보였으나 어느새 야무진 표정과 당당한 걸음걸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배고파요. 배고파.”
“제주도 흑돼지가 그렇게 맛있대. 어서 먹으러 가자.”
“아무거나 좋으니 빨리 밥 먹어요.”
한서진은 미리 정해준 가게를 찾아 차를 몰았다. 아직 저녁 식사 시간이 아니어서인지 가게 내부는 비교적 한산했다.
한서진은 경호원들도 들어와서 식사를 하게 했다. 물론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행동했다.
송하나는 어지간히 배가 고팠는지 돼지고기 몇 인분을 혼자서 해치웠다. 한서진은 그런 모습도 그저 대견하고 이쁘게만 보였다. 이런 게 콩깍지라는 걸까?
허기를 몰아내고 한숨을 돌린 송하나가 물었다.
“시간이 애매하게 됐어요. 첫 여행인데 일정이 완전히 꼬여버렸어요.”
“일정이 꼬이긴 뭐가? 베스트 오브 베스트인데.”
“……짐승.”
“어차피 오늘 하루 날렸으니까 그냥 일찍 들어갈까?”
“…….”
송하나는 불만스러운 듯이 눈을 흘기며 바라봤다. 한서진은 자신이 너무 과했나 하고 순간 반성했다. 그녀가 만약 토라지기라도 하면…….
“좋아요.”
한서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송하나는 어제 자신 있게 래쉬가드를 벗을 때처럼 도도하고 단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알았다구요.”
얼굴이 환해진 한서진은 급히 계산을 치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경호원들은 대화를 못 들었다.
첫 커플 여행이 본의 아니게 신혼여행처럼 돼버렸다.
사실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제까지 스킨십은 키스와 가벼운 포옹 정도만 하던 사이였다. 그래서 방도 각자 따로 잡은 것 아닌가.
송하나는 마트에서 양주와 소주, 맥주, 와인과 안주를 잔뜩 골랐다.
과연 저걸 다 먹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양이었다. 이 정도 술이라면 사람 다섯은 죽이고도 남을 치사량이었다.
한서진은 몹시 걱정스러워 했다.
“하나야, 이거 다 먹으면 우리 내일 죽어. 넌 술도 잘 못하잖아.”
“그럴까요?”
“그렇지, 누가 봐도 둘이 먹을 양이 아니잖아. 이거 다 먹으면 사흘, 아니 나흘은 숙취로 죽겠다. 그럼 우리 휴가 끝이야.”
“경호원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시겠죠?”
“……뭐?”
송하나는 도도한 표정으로 가슴을 편 채, 슬쩍 웃음을 흘렸다.
그 도발적인 눈빛에 한서진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러면 내일 늦게 일어나도 경호원분들 보기 안 창피하잖아요. 명분이 확실하니까.”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서진은 가슴이 너무 설렜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싶었다.
그날 저녁, 한서진과 송하나 커플은 본채에서 둘만의 술 파티를 벌였다. 물론 맥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술, 특히 양주와 보드카는 그들의 위장이 아닌 싱크대 하수구로 사라졌다.
“세상에, 그 많은 술을 두 분이서 다 드셨단 말이야?”
한서진 커플이 밖에 내놓은 빈 술병들을 치우며, 경호원들은 혀를 내둘렀다. 이 많은 술을 먹고도 살아 있는 게 가능하구나.
“한서진 박사님, 술 잘하신다는 건 들었는데 정말 말술이시네. 대단하다, 대단해.”
“근데 아직 안 일어나셨나 봐.”
“일어나는 게 기적이지. 난 살아 있는지 아닌지 확인해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다행히 늦은 저녁, 한서진은 끙끙거리며 일어났다. 숙취 때문에 얼굴이 퀭한 게 한눈에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미안한데 해장국 좀 사다줘요. 국물 있고 양 많은 걸로. 위에 부담 안 되게.”
“알겠습니다. 근데 박사님, 괜찮으신 건가요?”
“오는 김에 숙취약도 좀 부탁해요. 으으, 아직도 골이 울리네.”
“약주를 너무 많이 드셨어요. 송하나 양은 괜찮은가요?”
“술을 저 혼자만 먹은 게 아니잖아요.”
경호원들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납득했다. 송하나도 그처럼 숙취에 뻗어 있을 거라고.
한서진은 그들이 사다준 해장국과 약을 받아들고 다시 본채로 들어갔다.
한서진, 송하나 커플은 남은 나흘간의 휴가 기간 동안 숙취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돌아다니지 못했다. 저녁에 겨우 해변을 산책하는 정도가 전부였고, 그마저도 힘들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경호원들은 편안하게 휴식하며 경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사람들과 부딪치는 거리보다 안전하게 지어진 별장 안에서 경호하는 게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연애하시고 둘만의 첫 여행이라는데 둘째 날부터 술을 잘못 드시는 바람에…… 어휴, 정말 안 되셨어.”
“두 분이 추억은 하나도 못 만들고 가시네. 난 절대로 술 저렇게 먹지 말아야겠다.”
“하여간 술이 웬수라니까.”
설렘을 가득 안고 커플 여행을 왔을 텐데, 술 때문에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남은 나흘을 내리 숙취에 끙끙 앓다가 돌아가야 하다니.
첫 여행부터 추억은커녕 최악의 기억만 남은 것 아닌가. 경호원들은 진심으로 동정했다.
걸프스트림 전용 좌석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한서진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는 아까부터 송하나의 손을 꼭 잡은 채 놓지 않았다.
“참 즐거운 여행이었어. 그치?”
“…….”
“나중에 또 오자.”
그녀가 새침한 얼굴로 바라봤다. 낯빛 한편에는 피로가 쌓여 있었다.
갑작스럽게 그녀가 물었다.
“오빠, 저랑 결혼하실 거예요?”
“겨, 결혼?”
그야말로 기습, 한서진은 조금 당황해서 머뭇거렸다.
그녀와 결혼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러 번에 걸쳐 진지하게 생각했고, 나름대로 미래를 계획하며 상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타이밍에 그녀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당황한 것이다.
그녀의 눈빛이 더욱 서늘해졌다. 이제는 흘겨보는 게 아니라 거의 째려보는 수준이다.
“너무해요. 오빠…….”
“할 거야.”
한서진은 얼른 쐐기를 박았다. 송하나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너랑 결혼할 거야.”
“……오빠.”
“서울 돌아가는 대로 회장님 뵙고 말씀드리겠어. 당장 결혼은 무리지만 약혼식부터 하자. 그리고 네가 마음 준비되는 대로 바로 결혼하자.”
“전 지금도 OK인데요.”
“……어. 그, 그래?”
아무리 그래도 스무 살인데 벌써 결혼을? 한서진은 순간 당황해서 머뭇거렸고, 송하나는 피식 하고 도도한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에요. 저 아직 스무 살이에요. 무슨 벌써 결혼이에요.”
“……사람을 그렇게 놀리다니.”
“하지만 진심이에요. 나중에 때가 되면 저도 오빠랑 결혼하고 싶어요.”
그녀가 가만히 뺨을 어깨에 기대왔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선명히 귓가에 닿는다. 그의 가슴에 닿고 싶은 마음처럼.
“그때까지 오빠 마음 안 변했음 좋겠다.”
약간의 오기가 생긴 한서진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절대 안 변해. 걱정하지 마.”
얼굴을 슬쩍 돌린 송하나는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었다.
한서진, 송하나 커플은 걸프스트림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백철중 회장을 찾아갔다. 그는 저택이 아닌, H그룹 본사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회장실에 들어선 한서진은 그에게 부탁해서 주변의 모든 직원들을 물렸다. 그리고 결연한 표정으로 그의 앞에 섰다.
이런 분위기는 처음인지라 백철중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에게 은근히 압도당했다.
“자네…… 무슨 일인가? 갑자기 왜 이래?”
“하나와 약혼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회장님.”
한서진은 무릎을 꿇었다.
이게 맞는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단단한 결의를 보여서 나쁠 게 없다. 사랑하는 여자를 달라고 그 부친 앞에 무릎을 꿇는 것쯤이야, 매우 기쁜 굴복이다.
백철중의 얼굴에는 당황함이 어리면서도 환해졌다.
“아니, 이 사람아. 둘이 대체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어?”
클레튼 대통령 가족이 제주도에 왔을 때, 한서진이 송하나도 동행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느 정도 의심은 했다. 둘 사이가 보통이 아닐 거라고.
늙은이의 주책이 피 끓는 청춘을 방해할까 봐 모른 체 하고 있었는데, 이런 초대형 길보를 들고 올 줄이야?
“둘이 대체 언제부터 사귀고 있었나? 허허, 난 왜 여태 감쪽같이 몰랐지.”
한서진은 송하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괜찮다는 듯이 희미하게 끄덕여 보였다.
그는 결심을 다지며 입을 열었다.
“실은 작년부터 사귀고 있었습니다.”
“뭐?”
“하나가 고3이었으니까요. 몇 달만 기다리면 대학생이 될 테고, 그럼 아무 장애도 없을 거라 생각해서 제가 대시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지금까지 깨끗하고 건전하게 교제했습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회장님.”
하나부터 열까지 새빨간 거짓말이다.
백철중은 한서진을 차분히 바라봤다. 뜨거운 눈빛, 같은 남자로서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그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이 거짓말은 보기 좋은 명분을 얻기 위한 절차였다. 1년 넘게 이어온 예쁜 사랑. 누가 봐도 좋은 그림이 아닌가.
백철중은 속으로 흡족하게 여겼다.
“하나야, 너도 같은 마음이냐?”
“네, 아빠.”
송하나는 야무진 얼굴로 얼른 덧붙였다.
“제 인생에서, 오빠 말고 다른 남자는 싫어요.”
“하지만 넌 아직 어리지 않니? 이제 겨우 스무 살인데…….”
말을 하면서 백철중은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딸년이 눈치 없이 마음에도 없는 빈말에 발이 걸려 넘어지면 안 되는데…….
“어리지만 저도 알 건 알아요. 제 남은 인생에서 오빠보다 좋은 남자가 이렇게 절 사랑해줄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는 넌? 넌 한서진 군을 사랑하느냐?”
“사랑해요.”
그 말에 한서진은 그만 머릿속에서 불꽃이 번쩍했다.
이럴 수가! 그러고 보니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해준 적이 없다! 사랑한다는 표현을 이런 식으로 접하게 되다니!
“서진 군, 자네도 하나를 사랑하지?”
“물론입니다. 하나를 정말 사랑합니다.”
백철중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좋아. 그럼 약혼을 허락하지.”
한서진은 송하나를 바라봤다.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작게 풉 하고 웃었다.
그동안 둘은 사랑한다는 말을 서로에게 이미 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것을 이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그 중요한 말을, 백철중의 질문에 대답하는 식으로 서로에게 전하게 될 줄이야.
눈이 마주친 채 둘은 그저 몰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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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파트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쓰려고 했는데...
무분별한 연참을 하다보니 페이즈 조절 망했어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