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69 커플, 여름휴가 =========================================================================
오후 2시, 한서진과 송하나는 나란히 앉은 채 탁자에 올려놓은 전화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둘은 손을 꼭 잡은 채 긴장된 얼굴로 무언가를 기다렸다.
이윽고 전화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왔다!”
“왔어요!”
한서진은 바짝 긴장해서 송하나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말없이 끄덕였다. 그는 전화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 날세. 곧 방학이라며?」
“아, 네. 회장님. 맞습니다, 방학입니다.”
「시간이 참 빨라. 하나 입학식 지켜보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서 여름방학이라니. 몇 달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어. 허허, 이러다가 몇 번 자고 나면 금방 졸업해서 시집간다고 하겠네.」
“뭔가 조금 어폐가 있으십니다, 회장님.”
「……어, 내가 뭔가 실수를 했나?」
“꼭 졸업하고 나서 시집을 가야 한다고 법에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살짝 긴장감이 담겼던 백철중의 목소리가 금세 풀어지며 호탕한 웃음이 들렸다.
「허허, 그렇지. 내가 너무 옛날 사람이라서 가끔 고지식한 게 있단 말이야.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흐뭇하게 중얼거리던 백철중이 별안간 목소리를 바꿔서 물었다.
「이번 여름에 우리 하나가 자네 남매와 셋이서 제주도 여행을 간다던데. 작년처럼 말이야. 방금 집사람한테 들었네.」
“아, 네. 사실입니다.”
「왜 하필…… 제주도인가?」
왠지 느낌상 제주도가 아니라 다른 질문을 하려던 것 같다. ‘제주도인가’는 급히 끼워 맞춰 넣은 느낌 같다고 할까.
한서진은 미리 생각한 대본을 따라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가족끼리 여름휴가 가기에는 제주도가 편한 것 같아서요. 가깝고 경치 좋고 바다도 깨끗하고요. 또 무엇보다 안전하고요.”
「하긴, 자네는 이제 함부로 외국에 나가기는 곤란한 몸이지. 다행히 제주도에는 미7함대도 있고, 마음이 든든하겠어.」
“해외 출국은 사전 경호를 철저히 갖추고 나가야 하다 보니 여행이나 휴가 가는 느낌이 안 듭니다.”
「이해하네. 셋이서 재밌게 다녀오게나.」
“감사합니다.”
한서진은 전화를 끊으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송하나가 긴장된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어때요? 믿어요?”
“일단 대외적으로는 믿어주시는 눈치야.”
“뭐예요, 그게.”
“내가 회장님 속을 알 수는 없잖아. 아무튼 대외적으로는 우리 셋이 여행가는 거라 믿어주시니, 잘 됐지.”
작년에 울며 겨자 먹기로 짐 덩어리를 끼워 넣은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송하나와 아직 사귀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녀는 이제 성인이고, 잘 사귀고 있다. 그런데 뭐 하러 짐 덩어리를 또 끼워서 휴가를 가겠는가?
‘비키니다!’
한서진은 벌써부터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국내 여행이라지만, 경호 문제는 순탄하지 않았다.
최대한 얼굴과 신원을 감출 테지만, 그래도 경호를 중지할 수는 없다.
때문에 일정 거리를 두고 여행객으로 위장한 경호원들이 지켜보는 방식으로 하기로 했다.
데이트 장면을 경호원들이 지켜보는 것 때문에 한서진은 내심 미안했다. 소녀의 감수성으로 용납이 될까.
넌지시 그 이야기를 하며 미안함을 나타냈는데, 그녀는 야무지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오빠하고 사귀면서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내가 미안해서 그렇지.”
“원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걸요. 이래봬도 저, 재벌가 딸이에요.”
씩씩한 모습에 한서진은 마음을 놓았다.
둘은 은밀하게 김포공항으로 이동, 중거리용 전용기인 걸프스트림에 탑승했다. 점보기인 A380에 비하면 매우 작은 기체이지만, 국내에서 이동하기에는 매우 간편한 모델이다.
제주공항에 도착한 그들은 공항의 협조를 빌어 몰래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기사 뜬 거 없지?”
“네, 없어요. 감쪽같이 해냈어요.”
역시 굵은 알 선글라스는 만능 아이템이라니까. 한서진은 씩 웃으며 핸들을 쥐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경호원 차량들이 따르고 있다. 그래도 둘이서 시원한 해안 도로를 달리고 있으니, 정말 여름휴가를 왔다는 느낌이 든다.
“오빠, 문자 왔어요. 칩셋 3 분배 문제 때문인가 봐요.”
“응, 무시해.”
“전화기에 불나게 생겼어요. 이거 어떡해요?”
“휴가 기간에는 꺼둬야겠다.”
한서진은 스마트폰을 손을 뻗어 전원 버튼을 눌렀다. 송하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내가 공무원이나 공직자도 아니고 애초에 급한 일이 생길 게 없어. 괜찮아, 괜찮아.”
한서진은 운전대를 살짝 꺾으면서 조수석을 힐끔거렸다.
송하나는 흰색 민소매 티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길고 늘씬한 팔다리가 시원하게 드러나는 차림새다.
자리에 앉아 있음에도 퍼지지 않고 가지런하게 뻗은 다리가 눈길을 잡아끈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송하나는 가만히 손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오빠, 운전이요.”
“아, 응.”
한서진은 헛기침을 하며 운전에 집중했다.
미리 준비한 휴가지만, 자신의 공백으로 서울은 지금 여러 모로 곤란에 처했을 것이다.
설계사무소와 대학 연구는 그렇다 치더라도, 칩셋 3와 에테르 연구를 위해 방한한 유수의 해외 과학자들을 접객하는 일 등, 여러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물론 한서진은 나 몰라라 휴가를 떠나온 게 전혀 후회되지 않았다. 방금 너무 좋은 걸 봤거든.
둘은 별장에 짐을 풀었다.
별장은 송하나 소유의 개인 별장이었다. 정원을 포함한 총 대지 면적이 약 23,140㎡에 달하는, 상당히 큰 별장이었다.
“이번에 이거 짓느라고 용돈 모은 거 다 털어 넣었어요. 이제 완전히 빈털터리예요, 저.”
“제주도 땅값 요새 엄청 올랐다던데, 용돈 가지고 가능했어?”
“땅은 원래 갖고 있던 거라서 건축비만 들었어요. 옛날에 엄청 쌀 때 아빠가 사주신 거라.”
한서진과 송하나는 천천히 별장을 둘러보았다.
별장 본채는 크면서도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느낌을 잘 살려내고 있었다. 소녀가 지은 소꿉놀이 집 같다고 할까.
정원의 산책로와 정원수도 모양 좋게 잘 꾸며놔서 배치했다. 마치 그림 속의 저택 같은 느낌이다.
특이한 것은 외곽 담이 상당히 높다는 것. 담장의 높이가 무려 4미터가 넘어갔고, 담장 위에는 창살이 촘촘히 솟아나 있었다.
“보안도 신경 썼어요. 창유리도 전부 방탄이에요. 패닉 룸도 열 개나 있구요. 경호원들이 묵을 숙소도 지어놨어요.”
“대단하네. 솔직히 나 엄청 놀랐어.”
이게 정녕 스무 살 여자아이의 준비성인가? 한서진은 진심으로 놀라고, 감탄했다.
둘은 각자 방에 짐을 풀었다. 비록 방이 나란히 붙어 있지만 다른 방을 쓰려니 뭔가 아쉬웠다. 아직 키스 밖에 못한 터라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이제 나가요.”
짐을 대강 풀고, 옷을 갈아입은 송하나가 활짝 웃으며 나왔다.
그녀는 어두운 색의 래쉬가드를 입고, 그 위에 가리듯이 긴 숄을 걸치고 있었다. 목과 손목까지, 그야말로 완벽하게 상체를 가리는 래쉬가드였다.
하지만 한서진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보니 작년에도 이랬지.’
남들 앞에서는 래쉬가드, 둘이서 온천을 즐길 땐 비키니.
작년의 아름다운 추억이 생각나자 마음이 흐뭇해졌다.
그래, 해변을 갈 거니까 당연히 래쉬가드를 입어야지. 엄한 놈들이 맨살을 보지 못하게끔.
한서진도 래쉬가드를 입고 함께 나섰다.
별장을 나선 뒤 조금 걷자 바로 해수욕장이 나타났다. 에메랄드 빛 바다에서 여름의 무더위를 즐기는 연인들의 모습이 그들을 맞이했다.
둘은 팔짱을 낀 채 해변을 거닐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남자들이 몰래몰래 송하나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진다.
귀신같이 감지한 한서진은 괜히 뿌듯해졌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송하나의 몸매는 비현실적인 사기였다.
가끔 통찰안한테 너무 고맙다. 적합 판정을 내려줘서.
‘역시 너도 남자구나. 보고 싶다, 이 녀석아.’
사라진 게 아니라 그저 한동안 쓸 수 없을 정도로 성능이 높아진 것뿐이지만, 뭐 어떠랴.
알이 짙은 수영용 선글라스 덕분에 여행객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모처럼 자유로운 기분 속에서 송하나와 함께 해수욕을 즐겼다. 물장구를 치다가 물속에서 이따금씩 다리가 부딪치거나 할 때면 괜히 어린아이처럼 설렜다.
해수욕을 즐기다가 가끔 경호원의 시선을 피해서 키스를 하기도 했다.
손목에 장착된 고성능 마이크를 통해 약속된 신호를 보내면, 경호원들이 잠깐 동안 눈을 돌리는 것이다. 물론 마이크는 기본적으로 꺼져 있다.
해수욕을 마친 뒤 흠뻑 젖은 채로 근처 해산물 집에서 요리를 먹었다. 솔직히 맛이 썩 괜찮은 편은 아니었지만, 고즈넉한 풍경 덕분에 분위기는 괜찮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둘은 저녁놀에 물든 수평선을 따라 해변을 걸었다. 나란히 손을 잡은 채로.
“짐 덩어리가 없으니까 좋네. 그치?”
“전 지혜 언니가 있었어도 재밌었을 것 같은데.”
“솔직히 그렇게 생각해?”
“…….”
“작년에 지혜가 없었으면 더 재밌었을 거라는 생각 해봤어, 안 해봤어?”
송하나는 조그만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해봤어요…….”
한서진은 만족스럽게 씩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녀는 살짝 흠칫했지만 곧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다정히 감쌌다.
많은 이야기를 하며, 아쉬움이 충분히 차오를 때까지 해변을 걸었다. 어느덧 어두워져서 그만 돌아갈 때가 되었다.
한서진은 아쉬운 마음을 누른 채 발길을 돌렸다.
“아까 보니까 본채 뒤에 온천 있더라.”
“아, 보셨어요? 근데 천연온천이 아니라서.”
송하나는 쑥스러운지 배시시 웃었다.
“하루 종일 놀았더니 조금 피곤한데 온천에 몸이나 담글래?”
그리고 한서진은 얼른 덧붙였다.
“물론 수영복 입고.”
“저 그럼 소금기만 씻고 바로 갈게요.”
“나도 씻고 나올게.”
한서진은 얼른 씻고 나왔다. 래쉬가드 수영복이 아니라 트렁크 수영복이었다.
그는 온천에 하체를 담근 채 느긋하면서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곳은 별장 울타리 안이라서 경호원들이 굳이 지켜보지 않는다. 경호원 숙소와 적당히 거리도 있다. 해변과 달리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어서 참 좋다.
이윽고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기대에 차서 돌아보던 한서진은 얼굴이 살짝 굳었다.
“오래 기다렸죠?”
상냥한 미소지만, 마주 웃어주기에는 너무 힘이 빠지는 복장이었다.
하의는 사각 비키니 팬츠 대신 삼각 비키니였지만, 상의는 낮에 입었던 래쉬가드와 비슷한 다른 래쉬가드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오빠, 왜 그래요?”
“…….”
물에 몸을 담근 그녀가 첨벙거리며 다가왔다.
한서진은 아무 말도 않은 채 래쉬가드를 빤히 바라봤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갸웃거리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제가 너무 늦어서 화나셨어요?”
“……그거 때문이 아니고.”
“그럼요?”
“너, 작년에는 안 그랬잖아.”
쪽팔림을 참고 힘들게 말을 꺼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이 갸우뚱거렸다.
“작년에 제가 뭘요?”
“그 숙소 수영장에서 우리 둘이서만 있었을 때, 래쉬가드 말고…….”
송하나는 생긋 웃고는 그의 앞에 살짝 섰다. 그녀의 상체가 눈앞에 위치하자 한서진은 흠칫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래쉬가드 앞 지퍼에 손을 가져가더니 그대로 아래로 내렸다.
한서진은 순간 숨을 뿜을 듯이 놀랐지만, 다행히 그 아래 나타난 붉은색 비키니가 그의 심장을 달래주었다.
그녀는 천천히 래쉬가드를 벗었다.
그 작고 간단한 동작이 이렇게나 우아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에, 한서진은 온몸의 혈관이 떨리는 전율을 느꼈다.
아찔한 붉은 비키니는 볼륨감 넘치는 몸매를 가려주기보다는, 오히려 도도하게 돋보여주고 있었다.
그저 아름답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힌다.
한 손을 허리에 얹은 그녀가 말했다.
“전 솔직히 그때 오빠가 바로 고백할 줄 알았어요. 근데 버티시더라고요.”
“그, 그때라면…….”
“작년 이때요.”
“…….”
전해주고 싶은 말이 굴뚝같다.
고백?
하고 싶었지. 하고 싶었는데 그놈의 나이 때문에 그만!
그녀가 도도한 미소를 입에 문 채 똑바로 쳐다본다.
“지금은 어때요? 아직도 용기 없어요?”
“…….”
한서진은 가만히 손을 뻗었다. 그녀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잡아당겼다.
도도한 미소와 몸짓이 품안에 갇히고, 체온이 서로 닿으며 부드러운 따스함을 발산한다.
달빛 아래 입을 맞추며, 둘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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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창...죽창이 필요하다!
누가 저에게 죽창을!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