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264화 (264/609)

00264  그 커플의 일상  =========================================================================

“고객님이 전화하실 때마다 가슴이 다 벌렁거린다고요. 진짜 이제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마세요. 우리도 다 똑같은 사람이라고요.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라.”

원하는 직원들은 전화에 대고 차례차례 자신의 감정을 쏟아냈다.

진상 고객에게 마음껏 따지고 항의한다는 것. 꿈으로만 가능한 일을 해내니 다들 하나같이 속이 후련했다.

문득 직원 한 명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근데 콜이 계속 울리는데…….”

그렇지 않아도 모든 자리에서 사정없이 호출이 울리고 있었다. 송하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30분 정도 안 받는다고 큰일 안 생겨요.”

“하지만 고객층의 신뢰에 흠집이 나면 회사 매출에…….”

“영향이 있을 것 같아요?”

그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칼라 통신은 품질, 속도, 가격 면에서 다른 통신사들의 경쟁 자체를 불허한다. 그들로서는 비슷한 수준의 서비스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물론 소비자들도 그걸 안다. 이제는 칼라폰을 안 쓰면 바보라는 소리를 듣는 시대다.

송하나는 차분히 둘러보며 말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보람 있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

다소곳한 목소리에서 묘한 위엄이 느껴진다. 그저 가슴을 펴고 서 있을 뿐인데 저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듯한 기분이다.

특히 송하나한테 수차례 대시했던 남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시선을 피하느라 바빴다.

“저를 예쁘게 봐주신 분들도 있어서 감사했고요. 마음은 감사하지만 저는 남친이 있어서 안 되겠네요.”

명백한 농담. 그제야 남자들의 얼굴이 풀어졌다.

“여러분들이 어떤 환경에서 근무하는지 잘 알겠습니다. 제가 봐도 이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곧바로 조치를 취할 생각입니다.”

“혹시…… 어떻게 해주실 건지 여쭤도 될까요?”

정희연이 용기를 내어 총대를 멨다. 평소라면 무서워서라도 재벌 2세한테 말도 못 붙이겠지만, 지난 인연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괜찮으리라.

“일단 일괄적으로 급여를 인상하고, 근무 태도에 따라서 수당을 깎는 제도는 완전히 폐지할게요.”

“우와!”

순간 몇 명이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가 분위기를 깨닫고 머쓱해서 입을 다물었다. 송하나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상사 직위를 남용하는 분들이 보이더군요. 그분들도 엄격한 조치를 취할 거예요. 일단 부소장님은 오늘 바로 해고가 될 거예요.”

“아, 그래서 아까 허겁지겁 나갔구나.”

“잘못된 조직 문화는 뿌리부터 뽑아버릴 생각이에요. 억울하게 퇴사하신 예린 씨라는 분한테도 회사 차원에서 사죄하고 배상을 해줄 거예요. 원하시면 복직도 시켜드릴 거고요.”

여직원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울면서 그만둔 동료가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앞으로 블랙 컨슈머들을 대할 때는 단호하게 대처를 할 생각이에요. 상담사 직원 여러분들에게 그 짐을 떠넘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영구 제외 목록이라도 만들어서, 그들을 고객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입니다.”

송하나는 그밖에도 자잘한 여러 가지를 약속했지만, 직원들의 머릿속에는 딱 두 가지만 남았다.

조직 문화의 개선, 진상 고객에 관한 엄중한 대처.

빈말이 아니라 그 두 가지만 제대로 실행돼도 근무 환경이 비약적으로 좋아질 것이다. 그들은 희망에 부풀었다.

“제가 빈말을 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지켜보면 아실 거예요. 일단 부소장님과 최혁준 고객, 이 두 분이 시범이 될 테니까요.”

신원을 밝힌 이상 더 이상 위장 근무 활동을 할 수는 없다. 물론 적당한 때가 됐으니 시원하게 사실을 밝히고 그만 둔 거지만.

송하나는 부소장을 해고 조치함과 동시에 성희롱 피해자들을 설득해서 고소 절차를 진행했다.

피해자는 무려 12명이나 되었고, 모든 동료들이 증인이었다. 피해자들이 혹시나 해서 모아둔 녹취 및 녹화 등 증거도 충분했다.

부소장은 결국 합의금을 주기 위해 퇴직금은 물론이고 대출까지 받아야 했다.

H통신은 최혁준을 형사 고발하는 한편, 로펌을 고용해 민사 소송 절차까지 진행시켰다. 최혁준은 화들짝 놀라서 합의를 시도했으나 회사는 봐주지 않았다.

죄질이 너무 더러웠기 때문이다.

최혁준은 한 달에 3, 4번 이상, H통신에 가입한 몇 달 간 꾸준히 그 짓을 반복해왔다. 자신이 현실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상담사에게 풀었던 것이다.

조사 과정에서 그는 H통신뿐만 아니라 다른 제품 고객센터에도 여러 차례 동일한 짓을 해온 게 드러났다.

H통신은 어설픈 합의는 필요 없다며, 강경한 처벌을 원했다. 또한 최혁준을 내부 블랙리스트에 올려, 향후 H통신의 서비스 일체를 영구적으로 이용할 수 없게 조치를 취했다.

센터 소장은 희롱 등의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으나, 바로 밑의 부하 관리를 소홀히 한 점을 물어 좌천되었다.

그리고 새 소장과 부소장이 왔다.

“요즘 회사 분위기는 잘 아실 겁니다. 송하나 사장님께서 이곳에서 직접 잠행까지 하시며 시찰하셨으니까요.”

직원들은 바짝 긴장해서 소장의 인사를 들었다. 그는 생각보다 평온한 표정이었다.

“조직 문화를 뜯어고치겠다는 경영진의 의지는 굳건합니다. 앞으로 관행이다, 관습이다, 다른 회사는 이렇게 한다, 이런 거 일체 없습니다.”

꿀꺽, 마른침이 넘어간다.

소장은 제대로 교육을 받고 왔는지 눈빛이 살아 있었다.

“조만간 진상 고객 응대 매뉴얼을 따로 배포하고 교육할 예정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가만히 얻어맞아줄 필요 없습니다. 녹음 사실 및 법적 조치 들어갈 거라고 조용히 통보하고, 그래도 지랄하면 마음껏 떠들게 놔두세요. 자기 고소할 증거 주겠다는데 기쁘게 수집해야죠?”

직원들 사이에서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동료, 선후배, 상사 부하 간에 서로 업무 떠넘기기, 가로채기 그런 거 일절 안 됩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런 짓을 한다면 즉시 나에게 보고하세요.”

소장은 엄한 눈빛으로 직원들을 둘러보며 끝을 맺었다.

“그리고 휴게실, 화장실을 포함해서 사내 일체 공간에서는 무조건 상호 존대합니다. 사석에서는 말 놓는 사이라도 회사라는 공간에서는 절대 안 됩니다. 명심하세요.”

“너무 쎈 거 아니야?”

이야기를 듣고 난 한서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송하나는 살짝 움찔했으나 주눅 들지 않고 대답했다.

“그 정도도 가벼워요.”

“…….”

“개혁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싱겁게 간을 맞출 거면 아예 소금을 안 넣는 게 더 나아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면서 직원들이 실망하고, 사기만 떨어질 테니까요.”

“그럼 정말 배짱 경영으로 할 거야?”

“필요하다면 해야죠. 정상용 대표님도 동의하셨어요.”

선을 넘는 진상 고객을 블랙리스트로 등재해서 영구적으로 회사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겠다니. 국내 대기업이 만약 이런 방안을 시도한다면 주주들로부터 비난을 한 몸에 받을 것이다.

H통신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시도였다.

“콜센터에서 직접 일을 해보니 알겠더라고요. 그분들이 얼마나 힘든 상황에서 일하는지.”

“……그래. 기특하네.”

“오빠도 옛날에는 그렇게 힘들게 사셨다고 했죠?”

“그래도 콜센터만큼은 아니야.”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반도체 공장은 사람 상대할 일은 적으니까 마음은 편했지. 물론 유독물질 때문에 건강이 나빠지긴 하지만.”

“진성전자 그래서 요즘 더 철저하게 한대요. 암에 걸린 직원들은 이유 불문 하고 무조건 보상해주고 있고요. 아무래도 오빠를 의식하나 봐요.”

“그래? 거기도 좋은 일 하는구나.”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든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이든,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만약 제가 그룹 총수가 된다면, 오빠처럼 그룹을 운영하고 싶어요.”

“나처럼이라면, 어떤 식으로?”

“이익을 추구하려고 사회, 지역, 직원, 이웃을 전부 포기하는 그런 식으로는 경영하지 않을 거예요. 오빠처럼 모두와 공생할 수 있는 그런 친사회적인 경영을 할 거예요. 물론 땅 파서 살 순 없으니 이익도 당연히 추구하고요.”

교과서에서 나올 법한 모범적인 대답, 진심이라는 점이 한서진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물론 살짝 민망한 마음도 있었다.

‘친사회적인 기업이라니. 난 그런 거창한 뜻은 없는데…….’

SJ설계사무소의 복지정책은 이미 유명했다.

근무환경, 복지, 근무시간 등 어느 것 하나도 대단하지 않은 게 없었다. 국내 대기업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꿀이 가득한 직장, 공학계열 인재들은 SJ설계사무소에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더불어 한서진은 능력과 덕을 갖춘 사업가라며 칭송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빠른 연구 효율을 위해서는 최고의 인재들이 필요하다 여겼다. 그들을 효율적으로 부릴 수 있게 막대한 꿀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런 과분한 칭송을 받는다.

“제가 오빠 경영 철학을 따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송하나는 야무진 표정으로 말했다.

한서진은 문득 상상해 보았다. 송하나와 결혼한다면 어떤 인생이 펼쳐질 것인가를.

‘회사 경영은 하나한테 맡기고……. 난 에테르 연구에 전념하는 게 낫겠지?’

버릇처럼 생각하는 거지만, 자신은 경영에 소질이 없다. 흥미도 일지 않는다.

하지만 에테르 관련 연구를 할 때면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희열이 차오른다. 뜨거운 혈액이 온몸으로 넘쳐흐른다.

자신은 연구를, 하나는 경영을.

그럼 환상적인 조합이겠지?

‘근데 하나는 결혼이라도 할 것처럼 말을 하네. 내 경영 철학을 따르는 게 당연하다니.’

송하나와 결혼? 물론 좋지만 아직 스무 살 밖에 안 된 여자애가 그런 생각을 품는다면 조금 어색할 것 같은데.

“그런데 뭐 하고 계셨어요?”

송하나는 한서진의 어깨 너머 노트북 모니터를 훔쳐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한서진은 노트북을 살짝 옆으로 밀어서 모니터를 볼 수 있게 보여 주었다.

“아, 응. 그냥 간단한 프로그램 하나 짜고 있어.”

“프로그램이요? 어떤 거예요?”

“통합 자산 관리 프로그램인데, 내가 지금 자산을 관리해주는 사람이 없잖아. 그래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편하게 관리하려고.”

“서준혁 팀장님 계시잖아요. 재무팀도 있구요.”

“재무팀은 국내에 반입된 재산만 관리해. SJ설계사무소하고 이 저택, 전용기, 국내 예금들 같은 거. 얼마 되지도 않아.”

“다 따지면 몇 조 원은 거뜬히 넘을 텐데, 얼마 되지도 않아요?”

송하나는 피식거리며 놀리듯이 말했다. 한서진도 기분 좋게 미소 지으며 프로그램 코드를 간단히 보여 주었다. 어차피 송하나는 봐도 뭐가 뭔지 모른다.

“L국과 미국에 있는 자산이랑 구좌는 내가 직접 관리하는데, 아직은 괜찮지만 시간 흐르면 손이 더 많이 갈 것 같아. 그래서 통합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관리할 거야.”

“사람을 고용할 마음은 없으시구나.”

“주예금 통장은 내 손에 쥐고 있으려고. 핏줄이 가르쳐준 뼈아픈 교훈이거든.”

다른 부호들이 보기에는 미련한 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서진은 과거의 아픔을 잊지 못했다.

통합 프로그램을 완성하면 언제 어디서든 쉽고 편안하게 자산을 관리할 수 있다. 물론 실무 절차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대리인에게 절차를 위임해야겠지만.

“일종의 회계 프로그램 비슷하다고 보면 돼. 이제 거의 다 만들었어.”

타르타로스 2의 맞춤형으로 만든 프로그램이다. 그래서 다른 컴퓨터에서는 돌릴 수가 없다.

우주선 로켓 엔진을 생각하면 된다. 로켓 엔진을 세 발 자전거에 달면 어떻게 되겠는가? 타르타로스 2가 우주선이면, 다른 컴퓨터들은 세 발 자전거나 마찬가지다.

“뭔가 좋아 보여요. 근데 혹시 이거 회계 감사용으로도 쓸 수 있지 않나요?”

“응?”

“은닉 자금 추적이라든가, 그런 것은요?”

“으, 응?”

============================ 작품 후기 ============================

어제는 현실의 창의성과 기발함에 무참히 패배한 것에 좌절해서 술을 마셨습니다.

더 부지런히 분발해서 현실을 이기진 못하겠지만 최소한 따라잡을 순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근데 뭐부터 해야죠?

현실의 기발함에 대항할 자신이 엄써여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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