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63 그 커플의 일상 =========================================================================
직원 두 명이 잇달아 그만두는 바람에 근로 공백이 커졌고, 상사들은 송하나에게 출근일을 늘리라고 요구했다.
“죄송해요. 제가 학업 때문에 알바를 하고 있는 거라서…….”
“송현진 씨는 직장이 우스워요? 아무리 아르바이트라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애사심은 있어야지. 지금 근로 공백 생겨서 다른 동료들도 죽어나는 거 몰라? 송현진 씨는 알바니까 그냥 쏙 빠지면 된다, 이렇게 이기적으로 생각해? 그런 식이면 이 나라 어디 가서도 일 못해.”
부소장은 은근슬쩍 말을 놓으며 엄격히 힐난했다. 송하나는 시선을 살짝 낮춘 채 묵묵히 들었다.
기가 죽은 거라 생각했는지, 부소장은 그녀의 한쪽 어깨를 은근히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수당 좀 더 챙겨줄 테니까 당분간만 시간 좀 내. 혹시 알아? 일 잘하고 성실하면 내가 추천해줘서 좋은 부서에 말뚝 박을 수 있을지?”
“말뚝이요?”
“정직원 말이야. 끌리지?”
부소장은 몇 마디 덧붙였다.
“우리 회사 국내 넘버원 대기업이야. 대학 왜 다녀? 대기업 정직원으로 취직하려고 들어간 거 아냐? 안 그래?”
결국 송하나는 한동안은 주5일 근무를 하기로 했다. 어느새 친해진 몇 몇 동료들이 안타까워했다.
“학교도 다녀야 하는데 일해야 해서 어떡하니.”
“학비 벌려고 이 짓 하는데 건데 이 짓 하느라 학교를 빠지면 이거 완전히 본말전도잖아.”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근로 공백 때문에 다 죽어나게 생겼는데 혼자서 주 이틀 나온다는 게 애초에 말이 안 되지. 그럴 거면 뭐 하러 회사에 나오는 건데?”
“알바생은 직원 아니야? 근로계약서 안 써?”
“회사가 힘들면 다 같이 돕고 그러는 거지, 그런 거 가지고 유난은.”
송하나를 좋게 보는 쪽이든 좋지 않게 보는 쪽이든, 공통으로 갖는 의문이 있었다.
“근데 저렇게 예쁜 애가 왜 이런 일을 해?”
“그러게. 모델 알바 같은 거 하면 이것보다 훨씬 돈은 많이 벌 텐데.”
30대 중반인 정희연은 송하나와 가장 친하게 지낸다. 그녀는 현재 콜센터 상담사 최고참이기도 했다.
그녀 역시 다른 동료들처럼 송하나에 관해서 괜히 궁금한 것들이 많았다. 그런 수다와 호기심이 이 일을 하면서 찾는 몇 안 되는 낙이기도 했고.
휴게실에서 잠시 쉴 때 정희연이 슬쩍 물었다.
“현진 씨는 근데 왜 이런 일을 해?”
“돈 벌려고요.”
“그 얼굴이면 얼마든지 다른 일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연예인 해보겠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
“연예인이요?”
송하나는 작게 피식거렸다. 정희연은 그 미소에서 묘한 당당함을 느끼고 머뭇거렸다.
“어머니가 배우 출신이신데, 절대로 배우 같은 건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제가 그런 데 한눈팔면 도시락 싸서 다니면서 뜯어말리실 거라고요.”
“어머, 정말? 어쩐지 마스크가 남다르다 했더니…….”
배우의 딸이라니. 여신 같은 미모와 몸에 배인 묘한 자신감이 납득이 된다.
“배우 출신이면 집에 돈도 많을 텐데, 왜 굳이 이런 힘든 일을…….”
“어머니 배우 그만두신지 오래 됐어요. 배우 하면서 버신 돈은 아마 저 태어나기도 전에 다 까먹었을 걸요.”
“……저런, 그랬구나.”
‘배우 일로 번 돈’은 그렇다.
정희연은 처음 송하나가 출근했을 때를 상기하며 풀썩 웃었다.
“현진 씨 처음 왔을 때 우리 부서 뒤집어진 거 알아?”
“그랬나요?”
“남직원들은 여신이다 뭐다 하면서 자기들끼리 난리고, 여직원들은 저런 애가 왜 이런 험한 일을 하냐고 수군거리고. 난 아직도 현진 씨가 꾸준히 출근하는 게 안 믿겨져. 하루 이틀 하고 바로 때려 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학비 벌어야 되니까요.”
“엄청 열심히 사네. 참, 학교는 어딘데?”
“한국대요.”
가벼운 마음으로 물었던 정희연은 멈칫했다.
“진짜? 진짜 한국대야?”
“네. 공대지만요.”
“어머, 세상에.”
정희연은 놀라운 한편 부러운 마음이 생겨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어리고 예쁜데, 공부까지 잘했다니.
“휴식 시간 다 끝나가요.”
“그, 그래. 일어나자.”
송하나는 센터 근무를 순조롭게 해나갔다.
고객 응대도 나무랄 데 없었고, 동료들과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도 불화를 만들진 않았다.
그 거리감은 송하나가 만들었다기보다는, 동료들이 선뜻 가까워 다가가지 못하며 빚어진 것이다.
여신급 미모에 겁을 집어먹었고 주춤했던 남직원 중에서 용기를 내어 대시하는 이도 하나둘씩 생겨났다.
주로 음료수 캔을 갖다 주며 잠깐씩 말을 붙이는 식이었다.
“현진 씨, 일 많이 힘들죠?”
“조금요.”
“원래 사람 상대하는 일이 제일 힘들어요. 특히 고객센터는…… 어휴, 말도 못하죠.”
남자는 송하나가 오늘만 12번째로 음료수 캔을 받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사근사근하게 말을 이었다.
“한창 놀고 싶을 나이인데 이런 험한 일 붙잡고 있고, 참 열심히 사는 것 같아요.”
“놀러 다니는 거 크게 좋아하진 않아서 괜찮아요.”
“에이, 그래도 친구들 놀러 가는데 고객 응대 전화나 받고 있으면 기분이 그렇지 않아요? 나도 입사 초기에 그랬는데.”
송하나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오빠도 공부하고 일하느라 바빠서 어차피 같이 놀러 다닐 시간도 없어요.”
“……오빠? 혹시 남자친구?”
“네.”
남직원은 충격을 받은 채 비틀거렸다. 겨우 몇 마디 대화를 마무리 지은 그는 힘없이 돌아갔다.
정희연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남직원들 처음에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더니, 슬슬 갸웃거리는 거 귀엽다. 그치?”
“제가 남자친구 없게 생겼나 봐요.”
“괜찮아. 졸졸 따라다닐 남자는 엄청 많게 생겼어.”
송하나 덕분에 정희연은 요즘 사내 분위기가 재밌어졌다. 가만히 있기만 하는데, 그녀를 중심으로 온갖 알력이 생겨난다.
특히 남자들 간의 미묘한 경쟁기류는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나는 결제를 한 적이 없는데 돈이 빠져나갔다고! 이 미친 썅년아!」
“고객님, 이 대화는 녹음 중이니 그런 험한 표현을 쓰시면 곤란합니다. 일단 진정하시고요.”
「뭐, 녹음? 그래서 어쩌겠다는 건데? 지금 날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앙? 책임자 연결해!」
송하나는 힐끔 고객 정보를 확인했다.
콜센터는 블랙고객 리스트를 작성해서 관리한다. 상대는 그 리스트에 포함된 인물이었다. 한 달에 3, 4번 이상씩 지속적으로 욕설과 억지가 포함된 클레임을 거는 인물이었다.
“고객님, 결제 자체는 정상적으로 이뤄졌습니다. 혹시 고객님이 소액결제 비밀번호를 유출하진 않았나요?”
「소액결제 비밀번호는 또 뭐야? 책임자 연결하라고! 부소장인가 하는 사내새끼 있잖아!」
“저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무슨 개소리야? 책임자 나오라고!」
“제가 책임자니까 저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고객님.”
「야! 이 미친!」
그때 갑작스럽게 콜이 끊어졌다. 모니터링 중이던 부소장이 강제로 콜을 자기 쪽으로 가져간 것이다.
그는 얼굴이 잔뜩 구겨진 채 고객의 분노를 무마하기 위해 쩔쩔맸다.
정희연이 안타까워했다.
“어떡해. 끝나면 현진 씨 또 달달 볶으려고 들 텐데.”
“괜찮아요. 이제 충분히 겪을 만큼 겪었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야?”
송하나는 태연히 일어나서 부소장의 옆으로 갔다. 버튼을 눌러 콜을 자기 쪽으로 되돌린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창 고객 설득에 열중이던 부소장이 어이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송하나는 턱을 살짝 괸 채 모니터를 주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최혁준 고객님.”
「오냐, 너 아까 그 년이냐? 책임자하고 잘 이야기 되고 있었는데 또 뭐냐?」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왜 이렇게 비도덕적인 억지를 부리시는 거예요?”
「뭐, 뭐?」
급히 달려온 부소장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불이 떨어질 듯했다. 송하나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그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말라는 듯이 검지를 세워 입술에 댔다.
“…….”
묘한 박력에 부소장은 잠시 멈칫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송하나의 어깨를 잡으려는 순간,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소장이었다. 그는 부리나케 콜 대기실을 나섰다.
방해꾼이 사라졌고, 송하나는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하, H통신 이것들 단단히 미쳤네. 너 같은 걸 상담사로 두고 지금 뭐 하자는 짓이야?」
“고객님,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욕설 클레임을 거시는데, 대체 이유가 뭔가요? 혹시 법정에서 만나면 알려주실 건가요?”
옆에서 정희연이 하얗게 질린 채 ‘미쳤어?’라고 소리 없는 외침만 반복했다. 어느새 몇 몇 동료들이 몰려들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진짜 맛 갔네. 녹음? 나도 녹음하고 있다. 시발 이거 인터넷에 쫙 퍼트릴까?」
“퍼트리시려고요?”
「책임자 처나오라고 해. 너 같은 년이랑은 대화가 안 되겠다.」
“저한테 말씀하시면 돼요. 제가 책임자니까요.”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소장은 됐고, 사장 나오라고 해! 어서!」
“제가 사장이니까 저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숨을 고르고 있는 것이었다.
「사장 나오라니까 이 년이 지금 나랑 농담 따먹기를 하자는 거냐?」
“말씀드렸죠. 제가 사장이니까 저한테 말씀하시면 된다고.”
「H통신 사장 이름이 남자라는 건 인터넷만 쳐도 다 나와!」
“정상용 대표님이요? 그 분은 전문경영인이지 사주는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저한테 말씀하시면 돼요.”
한파가 몰아친 듯 주변의 분위기가 싸하게 굳었다. 그러나 송하나는 일말의 관심도 없이 모니터와 대화에 집중했다.
「…….」
“최혁준 고객님, 고객정보를 보니까 진성물산 영업3부에 재직 중이라고 되어 있으시네요.”
「그, 그래서 뭐?」
상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분명히 동요하고 있는 것이다.
“끊지 말고 있어 보세요.”
송하나는 콜을 유지한 채,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서 전화를 걸었다. 수신인은 이서나였다.
「어, 하나야. 무슨 일이니?」
“언니, 진성 계열사 직원 한 분이랑 지금 이야기 중인데 이 분한테 잠깐 전화 한 통만 해줄 수 있어요? 제가 H통신 진짜 사장이라는데 이 분이 믿지를 못하셔서요.”
「이상한 부탁을 다 하네. 알았어, 전화번호 뭐야?」
송하나는 번호를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대화 내용을 듣고 있었는지 상대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들으셨죠? 바로 전화 갈 거예요.”
송하나는 통화를 잠시 끊었다. 주변에는 직원들이 망부석처럼 얼어붙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미안해요. 많이 놀라셨죠?”
“…….”
“…….”
“여기 부서가 회사에서 가장 근무 환경이 열악하다고 해서 실제로 어떤지 직접 눈으로 보려고 살짝 거짓말을 했어요. 충분한 조치를 취할 테니 안심하고 기다려주세요.”
정희연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저, 전화하는 거 언뜻 들었는데…… 정말 송하나 사장님이 맞아요? 배, 백철중 회장님 막내따님…….”
“네, 제가 송하나예요.”
“세상에…….”
다시 한 번 충격에 빠진 이들을 차분히 바라보던 송하나는 다시 최혁준 고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상당히 길게 울린 후에야 상대는 전화를 받았다.
「…….」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숨결이 거친 게 들린다. 송하나는 스피커 모드를 켰다. 어느새 모든 직원들이 주변에 몰려들었다.
“진성물산 영업3부에 재직 중이신 최혁준 고객님.”
「저, 저기요.」
“이서나 회장님하고는 통화 마치셨나요?”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미쳤었나 봅니다. 여, 영업일 하면서 쌓인 업무 스트레스를 딱히 풀 곳도 없다 보니…….」
“역지사지를 겪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송하나는 피식 웃고는, 직원들을 돌아보았다.
“이분한테 쌓인 게 많으신 분? 하고 싶은 말 얼마든지 하셔도 돼요.”
하얀 손가락이 흔드는 마이크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유혹처럼 보였다.
“누가 먼저 시작하실래요?”
============================ 작품 후기 ============================
“이것도 깽판쳐 보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