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62 그 커플의 일상 =========================================================================
“콜센터?”
상상도 못한 대답에 한서진은 살짝 놀랐다. 송하나가 콜센터에서 일하는 모습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미지가 매치되지 않았다.
“네, 콜센터요.”
“왜 하필 콜센터야? 다른 부서도 많을 텐데.”
“미국 유명 경영자들이 쓴 자서전이나 어록을 여럿 찾아봤는데, 저 같은 사람은 최하층 업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지켜봐야 한대요.”
“너 같은 사람이라니?”
“아버지가 일군 기업을 물려받는 사람이요. 이렇게 바닥부터 일을 배워야 나중에 망할 가능성이 낮대서요.”
송하나는 태블릿에 자신이 정리한 미국 경영자들의 조언이나 어록을 보여 주었다. 하나같이 포브스 100위 안에 드는 대형 기업을 일군 사람들이었다.
열심히 수집하고 정리한 흔적이 엿보인다. 한서진은 떨떠름했던 것도 잠시, 왠지 그녀가 기특해졌다.
“그래서 맨 아래에서부터 일을 배우려는 거구나.”
“사실 배운다는 건 너무 거창하고,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봐두려고 거예요. 일주일에 겨우 이틀 출근하는 걸요.”
“근데 그럼 직원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아무리 알바생이라도 회사가 주 2일 출근을 인정하지 않을 텐데. 혹시 들키기라도 하면…….”
“워낙 사람들이 못 버티고 나가다 보니 상관없대요.”
“하긴 콜센터 일이 많이 힘들다고 들었어. 원래 사람 상대하는 서비스업이 가장 힘들어.”
한서진은 문득 걱정이 되었다. 여린 마음을 가진 아이가 매일같이 이어지는 클레임에 상처받지는 않을까?
“너무 무리하지는 마.”
“걱정 마세요.”
송하나는 배시시 웃었다.
“생각보다 재밌어요.”
SJ설계사무소의 두 번째 수퍼컴퓨터, S1B의 기본 프레임이 완성되었다.
S1B는 S1과 달리 2만 개의 빈 슬롯이 빼곡히 존재한다. 칩셋형 컴퓨터인 케르베로스가 장착될 장소다.
2만 개 슬롯 각각에는 칼라 칩이 개별 부착되어 통합 네트워크망을 구축하고 있다. 모든 케르베로스가 초고속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네트워크를 강화한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타르타로스 1과는 결정적인 차이였다.
케르베로스의 숫자도 1만 개에서 2만 개로 증가했지만, 그보다는 개별 칼라 칩을 통한 모든 케르베로스의 완벽한 동시 연산을 가능케 만든 점이 컸다.
‘케르베로스 2만 개와 칼라 칩 2만 개면, 이거 대체 얼마를 받고 팔아야 하는 거지?’
조립에 한창이던 한서진은 엉뚱한 생각을 했다. 어차피 팔지도 않고, 공개도 하지 않을 모델인데.
S1B의 프레임은 케르베로스를 제외하고는 완성된 상태였다. 그러나 2만 개의 케르베로스는 한서진이 집에서 일일이 장착해야 했다. 남에게 맡길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죽겠다. 이거 언제 끝나.”
칼라 칩까지 직접 장착해야 했으면 벌써 뻗었을지도 모른다.
일주일 넘게 작업한 끝에 한서진은 겨우 케르베로스 장착을 완료했다.
힘들고 지루한 작업을 끝냈다는 후련함은 잠시, 한서진은 곧장 타르타로스 2를 가동했다.
기본 OS 구축 작업은 타르타로스 1을 이용했다. 덕분에 1을 설치할 때보다 훨씬 빠르고 편리했다.
미리 짜둔 프로그램을 구동시키기만 하면, 1이 알아서 2에 OS를 설치하고, 최적화 작업을 하고, 시스템 검토까지 끝냈으니까.
한서진은 며칠 동안 제대로 못 잔 잠을 몰아서 잤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타르타로스 2는 OS 설치를 마치고 대기 모드로 가동 중이었다.
한서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주모니터 앞에 앉았다.
“어디, 얼마나 성능이 뛰어난지 한 번 볼까?”
그는 1에서 구동 중인 재해 예보 모델과 똑같은 프로그램을 2에 설치했다.
재해 예보 모델은 지구 전반의 에테르 파동을 수집하고, 분석하여, 한국과 미국의 날씨에 유의미한 변화를 계산하는 방대한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은 간단하지만 시스템 자원을 잡아먹는 양이 워낙 무겁다. 제아무리 타르타로스 1이라 해도 90%에 가까운 시스템 자원을 차지한다.
‘케르베로스를 2만 개나 때려 박았어. 칼라 칩 역시 2만 개나 장착해서 네트워크 성능까지 높였으니까, 적어도 40% 이하까지는 떨어져야…….’
한서진은 재해 예보 모델을 구동시켰다. 잠시 후 시스템 사용률을 확인한 그는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시스템 자원 사용률은 겨우 20%, 똑같은 프로그램인데도 1에 비해 70%나 여유가 생긴 것이다.
한서진은 의자에 몸을 깊이 기대며 기지개를 켰다.
“이제야 뭐 좀 할 수 있겠네.”
그는 피식 웃으며 타르타로스 1을 돌아봤다.
“타르타로스 1, 이제부터 재해 예측은 네 전속이다.”
앞으로 타르타로스 2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또 어떤 것들을 할까?
즐거운 상상이 넘쳐 난다. 한서진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상상의 나라에 빠졌다.
“이런 놈을 가지고 날씨 예보 따위나 하기에는 너무 아까운데.”
“안녕하세요.”
유니폼을 입은 송하나는 상냥하게 인사하며 휴게실에 들어섰다. 먼저 와서 쉬고 있던 여직원들이 가볍게 반겼다.
“이리 와서 앉아. 일 많이 힘들지?”
“우리 조카뻘 같은데, 한창 학교 다닐 나이에 이런 일 하고 있으니 내가 다 안쓰럽네.”
“학교는 다니고 있어요. 이건 돈 벌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말이. 공부에만 전념해도 모자랄 판에 공부할 시간 쪼개서 이런 일하는 게 안타까워서 그래.”
30대 중반의 여자는 가볍게 혀를 끌끌 찼다.
조용히 구석에 앉은 송하나는 휴식을 취하는 척 하면서 휴게실 여직원들의 잡담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거 들었어? 부소장이 예린이 점수 깎은 거?”
“아니, 또? 거기서 더 깎으면 예린이는 대체 이번 달에 얼마나 감봉되는 거야?”
“예린이가 울며불며 매달렸는데 안 된대. 칼도 그런 칼이 없어. 아주 단호하다니까, 그 인간.”
“참 이 짓도 오래 할 일 아니라니까.”
“누군 하고 싶어서 하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는 거지, 뭐.”
20대 중반의 여직원이 푸념처럼 말했다.
“언니들, 저도 저번에 점수 깎인 거 때문에 부소장한테 매달렸지만 소용없었잖아요.”
“그 인간이 술 먹자고 안 하든?”
“왜 안 해요. 술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해보자고 하는데, 그 속이 뻔하죠. 그냥 점수 깎으라고 하고 넘어갔어요.”
“진짜 어이 없다니까. 소리는 고객이 질렀는데 왜 점수는 우리가 깎여야 해?”
“그만둘 때 부소장 콱 찌르고 그만둘까요? 사내 성희롱에 직권 남용에 부비 횡령에, 맘먹으면 못할 거 없는데.”
“그러면 남아 있는 우리만 피 봐. 참아 줘.”
“알아요. 말만 이렇게 하는 거예요.”
송하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조용히 메모했다. 아무도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보지 못했다.
“휴식 끝났다. 들어가자.”
“네.”
여직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송하나도 그들을 따라서 휴게실을 나섰다.
콜 대기실에 들어온 이들은 각자 할당된 자리에 앉거나 교대를 마쳤다. 그 순간에도 콜은 쉴 새 없이 울리고 있었다.
송하나도 자리에 앉자마자 콜이 울렸다.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응대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H통신 상담사…….”
「전화가 안 돼요.」
“네, 고객님. 전화가 안 되신다고요. 혹시 구체적인 상태를 들을 수 있을까요?”
이 일도 벌써 며칠 하다 보니, 이제 목소리톤이나 응대가 제법 익숙해졌다.
「몰라요. 전화가 그냥 안 돼요.」
“잠시 확인 좀 하겠습니다. 고객님의 전화번호와 성함을 들을 수 있을까요?”
「010-XXXX-YYYY구요, 이름은 남성기예요.」
“네, 010…….”
문득 송하나는 모니터를 힐끔 보고 말을 멈췄다. 발신번호가 010-XXXX-YYYY으로 뜨고 있었던 것이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전화가 안 된다고 하신 번호가 혹시 지금 전화 주신 이 번호가 맞습니까?”
「네, 맞아요. 전화가 안 돼요.」
“전화가 안 되는데 어떻게…….”
「너, 목소리 이쁜데? 이름이 뭐야? 시간 있어?」
송하나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태연히 응답했다.
“고객님, 통화 내용은 모두 녹음됩니다. 지금 고객님께서 하신 말씀은 명백히 희롱…….”
「목소리 이쁘다는 게 왜 희롱이야? 이 언니, 목소리만큼 되게 깐깐하게 생겼을 것 같네. 번호 불러 봐. 오늘 일 끝나고 오빠가 데리러 간다. 나, 남성기라니까.」
제품이나 서비스 품질에 분노한 고객의 클레임은 차라리 낫다. 하지만 심심풀이 삼아 상담사를 희롱하고 놀리기 위한 이런 전화는 콜센터 여직원들 모두의 고통이었다.
송하나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응대했다.
“고객님, 지금 고객님의 행동은 통신 및 성범죄 관련 법률에 따라 형사 조치될 수 있음을…….”
「미친년. 엿같이 재미 없네.」
뚝.
전화가 끊어졌고, 송하나는 그제야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울리는 콜을 받으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누가 어깨를 작게 툭툭 쳤다. 뒤를 돌아보니 콜센터 부소장이었다.
그는 따라 나오라는 듯 엄지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고, 송하나는 헤드셋을 벗어놓고 일어섰다.
부소장은 앞장서서 복도로 나갔고, 송하나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윽고 그가 멈추더니 훽 하고 돌아봤다.
“송현진 씨, 지금 뭐 하자는 거죠?”
송현진, 위장 잠입을 위해 그녀가 사용하는 가명이다.
“네? 뭐가요?”
“고객 응대를 그렇게 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직원 교육 시간에 제대로 못 들었어요? 아무리 진상을 부리는 고객이라 해도 상담사는 무조건 낮춰야 합니다. 나중에 형사 조치를 하든 블랙을 걸든 그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에요.”
“…….”
“콜센터는 회사를 대신해서 고객의 스트레스와 장난, 폭언 같은 것을 모두 받아주는 방파제 같은 겁니다. 이 점을 아직도 몰라요?”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해요.”
부소장은 의외로 빨리 끝내고 송하나를 돌려보냈다. 송하나도 갸웃거리면서 콜 대기실로 돌아왔다.
콜 대기실은 하루 종일 전쟁터였고, 일과가 끝나고 교대하는 직원들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아마 두개골을 열어보면 두뇌 대신 걸레가 된 멘탈이 들어있지 않을까.
헤어지기 전 저녁 식사를 하는데 여기저기서 푸념이 들렸다.
“예린이 결국 그만둔대.”
“진짜?”
“부소장이고 진상 고객들이고 거지같아서 더는 못 해먹겠대.”
“그러고 보니 부소장이 현진이한테 눈독 들이는 것 같던데. 조심해.”
송하나는 자기 가명이 나오자 젓가락질을 하다 말고 멈췄다.
“저를요?”
“오늘 혼내려고 끌고 나갔는데 별로 안 혼내고 빨리 끝냈지?”
“……네.”
“그게 찍었다는 뜻이야. 관심 없는 여직원들은 건수 하나 물었다 하면 30분이고 1시간이고 그 자리에서 갈궈. 그 인간한테 절대 빌미 주지 마. 안 그럼 현진 씨만 피곤해져.”
“네.”
송하나는 그들이 다시 잡담에 빠진 틈을 타서 스마트폰을 꺼내 뭔가를 적었다.
동료 직원들하고 헤어진 송하나는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검은 세단이 조용히 다가와서 그녀의 옆에 섰고, 그녀는 뒷좌석에 타며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오빠, 전화하셨어요?”
「오늘 회사 갔었니?」
“네, 지금 퇴근했어요.”
「고생이 많구나. 힘들진 않고?」
송하나는 차분히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보람 있어요.”
============================ 작품 후기 ============================
오너가 감정노동자의 처우에 안타까움을 가지게 되는 것보다, 진상을 박멸하는 재미에 눈을 뜨는 게 직원들에게 더 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