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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259화 (259/609)

00259  마력 칩셋  =========================================================================

출근길.

지하철에 오르자 몇 몇 이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게 느껴진다. 자기들끼리 쑥덕대는 것도 어렴풋이 들린다.

“저 사람, ‘신효 모델’ 아니야?”

“설마. 그런 유명 모델이 왜 지하철을 타겠어. 그것도 이 시간에.”

“하지만 너무 닮았는데.”

“옷차림을 봐. 지금 회사 출근하고 있잖아. 그냥 엄청 닮은 사람이겠지.”

“화장이 수수하긴 해도 진짜 엄청 닮았다…….”

지하철에 선 채 신효진은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흘려들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일상, 거리를 나갈 때도 하나둘씩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녀는 차분히 지하철 창을 주시했다. 투명한 창 너머 어둠, 그 위로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인다.

모델 촬영을 할 때의 화려한 메이크업은 아니지만, ‘모델 신효’의 이미지가 분명히 묻어 있다.

20년을 함께 했던 주눅 대신, 모델의 당당한 기품이 은은하게 서린 눈빛. 모델로서의 자신과 일반인으로서의 자신, 그 간극은 요즘에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 위로 또 다른 이미지가 겹쳐 보인다. 신효진도, 모델 신효도 아닌 제3의 인물.

바로 광활한 레노지안의 대륙을 마음껏 누비는, 아름답고 용맹한 여전사 스칼린이다.

피식.

그녀는 작게 실소했다.

겉꾸밈은 그럴 듯해졌지만 마음가짐은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아서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그런 것도 모른 채, 도도해보일 것 같다느니, 모델 신효를 닮아서 좋겠느니, 하는 소리를 속편하게 해댄다.

지하철이 서고, 그녀는 내렸다.

역을 빠져 나와서 몇 걸음을 걷는데 불현듯 다급한 목소리가 부른다.

“저기요, 잠시만요.”

설마 나를 부르나? 그녀는 의아해서 돌아보았다.

고급 정장을 입은 훤칠하고 인상 좋은 남자가 숨을 고르고 있었다.

“초면에 실례인 거 알지만, 실은 제가 한눈에 반했습니다. 혹시 연락처를 받을 수 있을까요?”

신효진은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가 맥이 빠져서 대답했다.

“종교 안 가질 생각이구요, 다단계 안 해요.”

“저기, 그런 게 아닙니다. 그쪽이 너무 제 스타일이셔서요.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남자는 다급히 명함을 내밀었다.

그녀도 이름을 알고 있는 대기업이었고, 직급도 좋았다. 젊어 보이는데 벌써 실장이라니.

명함이 가짜가 아니라면 왜 이런 사람이 거리에서 처음 본 자신에게 이러는지, 신효진은 이해가 안 갔다. 풀 메이크업을 한 것도 아닌데?

“죄송합니다.”

그녀는 짧게 거절을 하고 돌아섰다.

출근을 해서 업무를 보는데, 옆에서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흘끔 돌아보니 박수진이 탐색하는 듯한 눈으로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효진 씨, 혹시 쌍둥이 자매 있어요? 아니면 엄청 빼닮은 친척 여자라든가.”

“……없는데요. 왜 그러세요?”

“이 사람 어때요?”

박수진은 어떤 포스터를 내밀었고, 신효진은 가볍게 숨을 흡 들이마셨다. 포스터는 바로 H백화점 홍보 모델이었다. 즉 자신이었던 것이다.

“효진 씨랑 엄청 닮지 않았어요? 심지어 이름도 신효예요.”

“…….”

“어머, 정말이야?”

“저,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지금 표정이 다 말해주고 있는데? 세상에, 정말 효진 씨가 모델 신효였어요? 어머나, 진짜 대박이네.”

언젠가는 직장에도 알려지지 않을까 어렴풋이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닥쳐오니 얼떨떨했다.

“세상에. 연예인이랑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을 줄이야. 완전히 등잔 밑이 어두웠네요. 그쵸?”

“여, 연예인이라니요. 그렇지 않아요.”

“신효 씨가 요즘 얼마나 유명한데. 모델 일은 어떻게 하게 된 거예요? 혹시 대표님이?”

그녀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송하나 씨가 소개해주셨어요.”

박수진은 의외라는 듯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나 씨가? 아니, 왜요?”

“모르겠어요. 저한테 호의가 있으시더라고요.”

“세상에나.”

“쉬는 날에 틈틈이 촬영하고, 그게 다예요. 다행히 페이가 좋아서 저도 만족하며 하고 있고요. 스튜디오 분들도 엄청 잘해주시고.”

“이러다 효진 씨 나중에 엄청 유명한 연예인 되는 거 아니에요? 솔직히 내가 봐도 효진 씨 너무 예뻐요.”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꿈같은 일일 뿐이에요.”

사무실에 소문이 쫙 나는 바람에 신효진은 얼떨떨한 하루를 보내야 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미혼 남자 직원들의 관심이 한층 커졌다.

10억이 훌쩍 넘는 연봉을 받는 사람들, 예전 같으면 꿈도 못 꿀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의 친절과 관심에도 불구하고, 신효진은 별다른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한서진과 리온,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은 그림자 때문에.

사내 분위기를 느꼈는지 오후에 한서진이 그녀를 대표실로 호출했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모델 일 하는 거, 이제 직원들이 다 알게 됐다던데.”

“……네, 죄송합니다. 그렇게 되고 말았어요.”

“죄송할 일이 아니죠. 그렇게 유명한데 지금까지 안 알려졌던 게 이상한 거죠.”

동료들이 백화점 홍보 포스터를 늦게 접한 것도 있고, 설마 동료 직원이 그런 유명 모델일 거라는 생각을 하기 어려웠다.

“괜찮겠어요? 아무래도 유명세 때문에 회사 일을 하기 곤란하거나 한 건…….”

“아니에요!”

신효진은 내지르듯이 대답했다가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그녀는 더듬더듬 변명했다.

“회사 일에는 지장 없도록 하겠습니다. 동료 분들도 처음에만 신기해하시지 하루 이틀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저는 신효진 씨를 탓하려는 게 아니라 차라리 그쪽으로 정식 진출을 하는 게 미래를 위해 더 낫지 않나 생각해서요.”

“저는 이 일이 정말 좋아요. 모델 일은 그저 돈 때문에 부업으로 하는 거고, 사실 적성에도 별로 안 맞아요. 언제 힘들어서 그만둘지 몰라요.”

신효진은 생각나는 대로 변명을 덧붙였다. 혹시라도 회사를 그만두라고 권유할까 봐 마음이 떨렸다.

“그래요, 그럼. 효진 씨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네, 고맙습니다.”

가슴의 떨림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신효진은 두근거리는 눈빛으로 한서진을 바라보았다. 사랑을 속삭이던 리온의 얼굴이 그 위로 겹쳐 보인다.

그의 꿈에서, 그에게 자신은 어떤 여자일까? 신효진은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박사님도 나와 완전히 똑같은 꿈을 꾸고 있는데 현실에서는 모른 체 하시는 거라면…….’

민망한 상상에 목덜미까지 빨개졌다.

얼마 전에는 키스도 했는데, 그가 모른 체 하고 있는 거라면? 상상만으로도 부끄러워서 죽어버릴 것 같다.

한서진이 어색해하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죠? 그때 이후로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하는 건.”

“……네.”

“꿈은 어떤가요? 지금도 꾸고 있나요?”

“네, 거의 매일 꿔요.”

“저는 안 꾼 지 좀 됐습니다. 사실, 그 전에도 그렇게 자주 꾸진 않았어요. 간헐적으로 꿈을 겪곤 했죠.”

“……그러셨군요.”

신효진은 내심 아쉬웠다. 그에게는 꿈의 비중이 자신만큼 무겁지 않은 듯해서.

“신효진 씨는 꿈에서 강한 여전사라고 하셨잖아요.”

“……네.”

그녀는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한서진은 계속 물었다.

“얼마나 강한가요?”

“어, 음……. 비교대상이 없어서 어려워요.”

“이런 건 어때요? 만약 사자와 싸운다면 몇 마리 정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신효진은 저도 모르게 풀썩 웃어버렸다.

“사자는 천 마리가 한꺼번에 덤벼도 안 무서워요.”

“그 정도인가요?”

“네, 마수 클로비라고 날아다니는 큰 괴물이 있는데, 저 혼자서 수백 마리를 쓰러뜨렸어요. 그냥 싸우는 거라면 어떤 괴물한테도 안 질 자신이 있어요.”

그녀는 신이 나서 대답했고, 한서진은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혹시 꿈속의 능력이나 기술 같은 걸 현실에서도 쓸 수 있나요? 그런 낌새가 느껴진 적은 없나요?”

“아뇨, 그런 건 전혀 없는데요. 아, 꿈에서 깨고 나면 피로가 싹 풀리면서 몸이 상쾌해지긴 해요. 근데 그게 전부죠.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세요?”

“……아닙니다.”

한서진은 조금 실망한 눈빛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신효진은 의아해서 갸웃거렸다.

“혹시 박사님은 꿈에서 가진 능력을…….”

“그렇지 않아요. 저 역시 신효진 씨와 마찬가지입니다.”

한서진은 칼같이 선을 그었다.

그녀를 속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녀를 곤란한 일에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서다. 지금 자신은 주시하는 눈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신효진 씨, 잊지 마세요. 우리가 공유하는 꿈에 관해서는 철저히 비밀로 해야 해요. 제가 지금 좀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거 알죠?”

“……알죠. 미국의 영웅이시잖아요.”

“꿈에 관해서 알려지면 신효진 씨가 곤란해지거나 위험해질 수 있어요. 그러니 절대로 비밀로 해야 합니다.”

“네, 알겠어요.”

신효진은 문득 에테르를 떠올렸다.

리온은 에테르를 잘 알고 있었고, 근원 마법은 에테르를 다루는 최고 수준의 마법이라 했다. 오로지 선택받은 소수만이 시도할 수 있는.

그리고 한서진 또한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에테르를 연구하고 있는 사람이다.

며칠째 풀리지 않는 의구심, 다음에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른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박사님, 마력 칩셋이 엄청 유명하잖아요.”

“네, 그렇긴 해요.”

“그거 혹시 근원 마법으로 만든 건가요?”

한서진의 손가락이 흠칫 굳었다.

근원 마법, 처음 듣지만 예사롭지 않은 단어다. 그는 경직된 목소리로 물었다.

“꿈에서 그런 말을 들었나요?”

“네, 일반 마법은 마력을 다루는 학문이지만, 마력이라는 것도 결국 에테르로 이뤄져 있다고요. 에테르는 모든 것의 근원이고, 근원 마법은 바로 그 에테르를 직접 다루는 거랬어요. 선택받은 극소수만이 활용할 수 있다고…….”

한서진은 본능적으로 도청 방지 장치 상태가 잘 작동 중인지를 확인했다. 그만큼 놀라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방지 장치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일반 마법은 마력을, 근원 마법은 에테르를? 그리고 마력도 결국 에테르의 조합물이다?”

“대강 그런 의미였던 것 같아요. 에테르를 직접 다루는 건 아무나 함부로 못하는 일이라고…….”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나요? 아니, 누구한테서…….”

“박사님…… 아니 박사님과 똑같이 닮은 그 사람이 그랬어요.”

“……효진 씨는 꿈에서 저와 어떤 사이죠?”

망설임 끝에 한서진은 물었다.

그녀와 자신은 꿈에서 왕과 왕비다. 즉 결혼한 사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것을 그녀에게 숨겼다.

그녀는 과연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을까. 알고 있다면 혹시 숨기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조용한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친한 동료 사이예요.”

“…….”

“아참, 얼마 전에 저한테 털어놨어요. 자기가 레노지안을 지배하는 군주, 그러니까 유일한 왕이라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안 믿을 뻔했는데 박사님이 현실에서 이야기해주신 게 있어서 믿고 있어요.”

“레노지안?”

“그 세상은 하나의 대륙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 대륙 이름이 레노지안이래요. 그리고 왕국도 하나뿐이고, 인구는 250억 명이 넘는데요. 엄청나죠?”

신효진은 신이 나서 자신이 리온에게 들은 대로 이것저것 레노지안의 사정을 설명했다.

한서진은 구체적인 설명을 통해 자신이 몰랐던 레노지안의 모습을 알 수 있었다.

과학과 마법, 그리고 이상이 존재하는 세상…….

그녀가 설명한 레노지안은 거대하고, 훌륭하면서도, 아름답고 평화가 가득한 천국이었다. 간헐적으로 들여다보며 알게 된 것 이상으로 환상적인 세상이었다.

한서진은 조금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우리가 친한 동료라고 하셨죠.”

“네, 맞아요.”

“혹시 뭐 때문에 여행하고 있나요?”

신효진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초룡을 찾고 있어요.”

============================ 작품 후기 ============================

“전설의 롤스로이스를 찾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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