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58 마력 칩셋 =========================================================================
에테르 산불을 끈 마력 칩셋 No.1과 캘리포니아 대지진을 막은 No.2와 달리, No.3는 통찰안의 도움 없이 만든 것이다. 그래서 성능 면에서 여러 모로 빈약하고, 제한도 많다.
그렇지만 한서진은 뿌듯했다.
가슴에는 통찰안의 도움 없이 마력 칩셋을 만들었다는 보람이 가득했다.
1과 2, 그리고 3은 차이점이 존재한다.
칩셋 No.1은 한계치를 넘어선 고밀도 에테르를 흩어버리는 기능만 있다. No.2는 타르타로스의 에테르 통제력을 전달하는 매개체일 뿐이다.
두 칩셋의 장점은 다른 이도 제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통찰안이 완벽에 가까운 설계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No.3도 공정 과정에 제한이 없으면 좋을 텐데.”
아쉬운 점은 있지만, 첫 작품이니 이 정도 결점은 크게 마음 쓰이지 않았다.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국민안전처에서 연락이 오고 있습니다. 칩셋 No.3를 얻을 수 있는지를 놓고 매일 성화입니다.」
「미국에 물량을 우선 배정하는지를 놓고 국내 여론이 지금 들끓고 있습니다. 조국을 먼저 배려해줘야 하지 않느냐고 몇 몇 지역에서 집단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생산 계획만이라도 먼저 알려달라고…….」
아직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지도 않은 칩셋 3를 놓고 여기저기서 난리였다.
중화학 공장의 화재 진압 영상은 사람들에게 강한 임팩트를 남겼다. 칩셋 3(쓰리)면 어떤 화재에서도 안전하다는 인식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여기에 재해 예측 전문가인 한서진의 이름값과 결합하여 추종이 끝없이 치솟았다.
한서진은 서진혁 변호사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칩셋 3는 아직 완전하지 않아요. 지금으로서는 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제조가 어렵습니다. 현재 대량 생산이 가능한 방법을 연구하는 중입니다.”
「공정과정에 Z7보다 더 뛰어난 수퍼컴퓨터가 필요하다는 것 때문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칩셋 3를 제조할 때 주변 에테르 환경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즉각 계산해서 적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원형 그대로만 찍어내면 절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런 초고속 연산이 가능한 컴퓨터는 타르타로스뿐인데, 여기에 또 문제가 있었다.
“제 개인 수퍼컴은 재해 예측 모델을 실시간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에 대량 생산은 어렵습니다. 시스템 리소스에 한계가 있어요.”
타르타로스는 놀지 않는다. 평소에는 재해 예측 모델 가동에 80% 이상의 리소스를 할당하고 있다.
한서진은 나머지 20%의 리소스를 이용해서 다른 작업을 하거나 칩셋 3를 제조한 것이다.
“칩셋 3를 만들자고 재해 예측 모델을 중지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재해 예측 모델은 평균 한 달에 두 번 이상 한국과 미국에 발생할 큰 재해를 예보한다. 지금까지 100% 정확히 일치했고, 덕분에 SJ사이트는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었다.
「잠깐 가동을 중지하는 것은…….」
“그 사이에 큰 재해가 일어나기라도 하면 곤란하죠. 사실 웬만한 재해들은 화재와는 비교도 안 되게 큰 피해를 낳습니다.”
「그럼 최대 어느 정도의 생산이 가능합니까? 국민안전처에서는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어합니다.」
“일반 반도체와는 제조 방식이 다릅니다. 한 웨이퍼에서 수백 개씩 찍어내는 방식이 아니에요. 일일이 수작업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어디 보자……. 지금으로서는 한 달에 10개 정도 생산할 수 있겠군요.”
서진혁 변호사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터무니없이 적은 수량에 놀란 것이리라.
“3는 어디까지나 시험작에 지나지 않아요. 에테르를 이런 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걸 통해서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던 거지요. 아직 개량할 부분이 무궁무진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통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진혁 변호사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그 한 달에 10개만이라도 공급을 해줄 수 없느냐고 묻습니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라며 신신당부했습니다.」
한서진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제가 지금 많이 곤란해요. 미국에서도 공급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어서요.”
「그러시군요.」
“저로서는 미국의 부탁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미국과의 사이가 돈독할 뿐만 아니라, 사업 기반 및 재산 대부분이 미국에 있다. 실익을 따진다면 한국보다 미국을 훨씬 더 챙겨줘야 하는 게 맞다.
한서진은 푸념처럼 말했다.
“집에 불나면 좋을 거 같고, 또 비교적 간단한 코딩이라서 소화용 칩셋을 개발한 건데, 겨우 시제품을 분배해달라고 이렇게 시끄러워질 줄 알았으면 차라리 다른 걸 만들 걸 그랬습니다.”
「아닙니다. 대표님은 세상에 정말 필요한 걸 만드셨습니다. 일선 소방관들과 국민들이 대표님을 무척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거 힘이 나네요. 일단 잘 조율을 해주세요.”
―레노지안, 모든 대륙의 지배자요.
리온이 그렇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 때, 스칼린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세상의 주인, 리온에게는 그런 고귀한 신분이 당연한 듯 어울렸기 때문이다.
스칼린은 담담하게 받아들였고, 그런 반응에 리온은 마음을 놓고 만족스러워 했다.
레노지안. 이 땅의 이름.
유일 대륙으로 이뤄진 이 세상은 단 한 명의 군주가 모든 생명체를 다스리고 있었다.
때문에 황제라는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왕은 오롯이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고귀한 이가 자신에게 청혼했고, 약혼을 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스칼린은 어떤 부담도 느끼지 않았다.
생생하긴 했지만, 이것은 그저 꿈일 뿐이었으니까. 신기하고 특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아닌.
일행과 헤어진 뒤 스칼린과 리온은 둘이서 오붓하게 초룡을 찾아 여행을 계속했다.
“리온. 혹시 신효진이라는 이름을 아나요?”
어느 날 스칼린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리온은 질문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이한 이름이군. 하지만 나는 알지 못하오.”
“그럼…… 한서진이라는 이름은요?”
“역시 특이하군. 모르는 이름이오.”
신효진은 그 점이 이상했다.
한서진은 꿈에 관해서 알고 있었다. 적어도 그가 본 꿈에서는 리온이자 한서진, 그리고 스칼린이자 자신, 이 둘이 서로 만났던 게 틀림없다.
그런데 리온은 한서진도, 신효진도 모른다. 이게 대관절 어떻게 된 것일까?
‘같은 꿈이지만 서로 연결된 건 아니라는 걸까?’
스칼린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참, 이게 다 뭐라고. 신기하기는 해도 그저 꿈일 뿐인데.’
꿈은 생동감 넘치고 현실에서 맛보지 못한 화려한 즐거움을 주지만, 깨고 나면 기억 외에 남는 게 없다. 그래도 매일 이어서 꿀 수 있기에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스칼린은 문득 한서진을 생각했다.
‘리온…… 아니, 박사님은 역시 대단해.’
그녀는 풉 웃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서진과 리온을 동일시해버렸다.
에테르 논문 발표로 한서진은 더욱 유명해졌다. 에테르를 활용해 만들었다는 마력 칩셋은 그녀도 뉴스에서 보고 전율을 금치 못했다.
중화학공장에 난 불이 꺼지는 동영상은 몇 십 번을 넘게 돌려봤는지 모른다.
그저 대단했고, 존경스러웠다.
‘박사님한테는 송하나 씨가 어울려. 나 같은 건 언감생심…… 감히 꿈도 못 꿀 분이야.’
조금 슬프지만, 작은 질투조차 나지 않는다.
그래도 꿈에서만큼은 그와 연인이 될 수 있다. 비록 자신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라 하여도.
“지금 누구 생각을 하고 있소?”
리온이 불현듯 물었다. 목소리에 살짝 언짢은 기색이 느껴지는 듯하다.
스칼린은 황급히 변명했다.
“아니, 그냥 다른 생각을 좀 했어요. 누구 생각을 했다니, 그런 건 아니에요.”
“다른 남자를 생각하는 눈빛이었는데.”
“아니,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에테르에 관해서…….”
무심코 말해버린 스칼린은 후회했다. 에테르는 현실에 존재하는 것, 에테르가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서 그 이름을 언급하면 이상한 오해만 살 텐데.
“에테르? 혹시 귀하는 ‘근원 마법’에 관심이 있소?”
“네? 뭐라고요?”
순간 스칼린은 화들짝 놀랐다.
리온이 에테르를 알고 있다. 이게 대관절 어떻게 된 노릇인가?
‘설마, 이 세상에도 에테르가 존재해?’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물었다.
“에테르가 뭔지 알아요?”
“이상한 말을 하는군. 에테르는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근원이자 힘이오. 레노지안에서 에테르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가 어디 있소? 아주 어린아이가 아니고서야.”
“그, 근원 마법이라는 것은 그럼 뭐예요?”
“우리는 통상 마력이나 신성력을 힘으로 삼아 마법이나 검술, 신성마법 같은 것들을 발휘하오. 그러나 그 마력이나 신성력 같은 것들도 결국 에테르로 이뤄져 있지.”
“…….”
“근원 마법은 에테르 그 자체를 직접 다루는 마법이오. 물론 선택받은 극소수만이 그 신비에 접근할 수 있소. 그만큼 어려운 진리이기 때문이오.”
스칼린은 혼란에 빠졌다.
그녀는 현실에서 에테르가 무엇인지 자세히 모른다. 기사에서 접한 소식이 전부일 뿐이다.
그 에테르가 이곳 꿈속 세상에도 존재한다. 심지어 그녀가 읽었던 설명과도 흡사하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인가? 아니면…….
칩셋 3는 최고의 소화 물질이었다. 현존하는 어떤 소화 장치도 그 성능을 따라갈 수가 없다.
물량은 적고, 원하는 이들은 많았다. 미국의 갖가지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은밀히 판매의사를 타전하는 국가들이 있었다.
화재의 위험에서 자유로운 곳은 없다. 그리고 화재는 어마어마한 인명, 재산 피해를 낸다.
그러나 칩셋 3는 그저 불속에 던져 넣기만 하면 어떤 큰 불이라도 순식간에 꺼져 버린다. 화재로 인한 피해 규모를 비약적으로 줄일 수 있는 것이다.
한 달에 생산 가능한 수량이 겨우 10개라는 말을 듣고 전 세계는 그만 멍해졌다.
“정말 그게 한계입니까?”
“입증 실험에서는 무려 50개 넘게 사용했다고 들었는데요.”
“생산 속도를 높일 방법은 없나요?”
한서진은 일반 언론에는 ‘기술적 한계로 불가능하다’는 식으로만 설명했다. 재해 예측 모델이 무지막지하게 시스템 리소스를 잡아먹어서 곤란하다느니 하는 설명을 하기도 귀찮았다.
반면 미국과 한국, 양국 관계자는 자세한 설명을 듣고 대강 납득했다.
“타르타로스의 성능을 더 높이거나 혹은 타르타로스2를 추가 제작하기 전에는 결국 생산 속도 증대가 불가능하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아니면 에테르 변수 적용 프로그램을 활용 가능한 공정라인을 따로 구축하셔도 되고요. 그래서 저도 회로원형과 프로그램을 공개한 겁니다.”
한서진을 페이 차일드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페이 차일드는 난처해했지만 상황을 이해한 눈치였다.
다행히 그는 케르베로스를 공개해줄 수 있느냐는 질문 따위는 꺼내지 않았다. 한서진에게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미국은 타르타로스의 존재는 알지만, 정확한 성능과 잠재력은 알지 못한다.
“혹시 칩셋 3를 지속적으로 개량해서 랜덤워크 변수 적용이 필요 없는 완전한 설계를 짜낸다면, 실시간 에테르 변수 적용이 없어도 칩셋 3를 찍어낼 수 있게 되겠지요?”
“……일단 그렇습니다.”
“언제쯤 개량 버전이 완성될까요?”
“장담은 못하겠지만, 지금 같아서는 최소 1년은 더 걸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어쩌면 영영 불가능할 수도 있고.”
“……아.”
“미안합니다. 제가 머리가 조금만 더 좋았다면 이런 실망을 안 끼쳐 드려도 됐을 텐데.”
페이 차일드는 마지막 그 말에 절망했다.
============================ 작품 후기 ============================
작중에서 한서진 박사는 공식적으로 세상에서 제일 두뇌가 섹시한 남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은 타르타로스의 연산회로가 섹시한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