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256화 (256/609)

00256  마력 칩셋  =========================================================================

“직접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진행 요원들이 나서서 참관자들을 무작위로 선별해 마력 칩셋을 나눠 주었다. 마력 칩셋을 받아든 참관자들은 얼떨떨해 하면서도 일단 자세히 살폈다.

“생긴 건 그냥 평범한 메모리칩인데.”

“여기에 에테르 명령어가 코딩돼 있다고?”

기름을 끼얹은 거대한 장작더미에 붙은 불을 단숨에 꺼버린 걸 보고서도 그들은 반신반의 했다. 어떤 속임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지우기 힘들었다.

‘이게 무슨 마술 쇼도 아니고…….’

‘한서진 박사가 뭐 때문에?’

그러는 사이, 진행 요원들이 장작을 가져다가 곳곳에 조금씩 쌓고 그 위에 기름을 뿌렸다.

참관자들은 나무를 쌓는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속임수는 없었다.

그렇게 만든 모닥불은 약 50개 정도.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며 마력 칩셋을 쥔 참관자들은 주저하다가 던졌다.

“지, 진짜 꺼진다!”

“말도 안 돼!”

기름먹은 나무에 붙어 잘만 타오르던 불이 단숨에 꺼졌다. 마치 한순간에 모든 산소가 차단된 것처럼.

일절 예외가 없었다. 마력 칩셋을 던져 넣자 언제 타올랐냐는 듯이 불꽃이 한순간에 수그러들었다. 아주 작은 불씨조차 남지 않았다.

“얼마든지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마력 칩셋은 아직 수량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손을 들었다. 진행 요원들은 곧장 그곳으로 이용해 불을 피워주고, 마력 칩셋을 건넸다.

아직도 불신을 걷어내지 못한 이들이 혹시 속임수가 있지 않을까 꼼꼼히 살폈다. 불을 피울 때 어떤 소화 장치를 숨겨둔 것은 아닌가 하고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았다.

그러나 속임수는 없었고, 마력 칩셋은 예외 없이 훌륭하게 소화 작용을 해냈다.

잔뜩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서, 한서진이 설명을 시작했다.

“에테르는 어느 곳에서나 존재합니다. 심해나 밀폐된 공간이라 해도 예외는 없습니다.”

설명 내용을 따라 영상이 변했다. 에테르의 존재 장소를 도식화해서 한눈에 알게 쉽게 만든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에테르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마력 칩셋은 극미세공정을 통해 에테르를 조절하는 코딩을 새겨 만듭니다. 소화 명령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변수와 환경을 가정해서 코딩을 짭니다. 예를 들어서 자동차 엔진의 연소 반응 같은 것까지도 화재로 인식해버리면 큰일이 날 테니까요.”

이번 마력 칩셋은 통상적인 인식으로 위험한 화재, 진압해야 할 화재만 골라서 꺼뜨릴 수 있도록 복잡한 코딩이 되어 있다.

산불을 날리고 지진 피해를 막은 마렵 칩셋과 달리, 통찰안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한서진의 설계 및 코딩 능력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물론 타르타로스가 없으면 불가능했다.

설명이 길어졌고, 참관자들은 쥐 죽은 듯이 한서진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한서진은 최대한 기존 개념에 빗대어 쉽게 설명했지만, 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프로그램 코딩을 새겨 넣었다는 것만으로 현실에 물리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개념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질문했고, 한서진은 흡족해서 인정했다. 제대로 개념을 이해한 것이다.

질문을 한 인물이 다시 말했다.

“이건 마치 마법 같군요.”

“마법이라.”

한서진은 옅은 미소를 띠며 덧붙였다.

“고대인들이 지금 우리 사는 것을 보면,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세계 물리학계가 뒤집어졌다.

한서진은 에테르의 존재를 가설로 주장한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적인 실험으로 그 존재를 입증했다.

실험에 참관한 저명한 물리학자들이 몇날 며칠을 머무르며 실체적인 검증에 나섰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손톱만한 마력 칩셋은 순수한 실리콘 반도체였다. 방사선 투시 등으로 몇 번이나 꼼꼼히 확인했다.

그 안에 전자회로 대신 에테르 회로를 코딩했다는 이유만으로, 단숨에 불을 진압하는 소화기가 된 것이다.

“말도 안 되오. 이렇게 조그만 칩을 던져 넣는다고 불이 꺼지다니, 어떻게 이런…….”

“에테르를 직접 검출할 수는 없는 건가?”

“어쨌든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힘이 작용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고작 메모리칩 하나 던진다고 불이 꺼지는 게 말이 됩니까?”

알려지지 않은 에너지, 에테르의 존재 자체는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력 칩셋의 소화 작용을 설명할 수가 없다.

한서진은 한국대 대강당을 빌려 강연을 가졌다. 급히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들어온 석학들, 국내외 방송관계자들, 심지어 글로벌 기업인들도 강연을 듣기 위해 앞을 다투어 몰려들었다.

―돈이 된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세상은 강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에테르는 돈이 된다고.

수천 명이 빼곡히 모인 강연장은 선전포고를 앞둔 국가원수의 기자회견장을 방불케 했다.

아니,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선전포고가 맞다. 석유 및 전기 등 고전 문명에 대한 에테르 문명의 출범을 알리는 선전포고.

“며칠 전 입증 실험에서 설명을 했지만, 저는 미시적인 영역에서 이미 에테르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슈나우저, 코카 스패니얼이 바로 대표적인 예죠.”

강연 무대 뒤쪽의 거대한 화면에 두 반도체를 제작하는 공정라인이 역동적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마력 칩셋 No.3는 거시적인 영역에서 에테르를 다루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코딩 작업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간신히 불을 끌 수 있는 기능만 구현했죠. 첫 걸음만 겨우 뗀 셈입니다.”

설명은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이어졌고, 수천 명의 청중들은 쥐 죽은 듯이 정숙을 지키며 귀 기울였다.

한서진은 다시 한 번 에테르의 개요와 며칠 전의 실험에 관해서 자세한 브리핑을 마쳤다.

“저는 에테르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컴퓨터, 의학, 연료, 산업소재 등 모든 영역에서 큰 역할을 담당할 겁니다. 일단 질문을 받겠습니다.”

사방에서 손이 올라갔다. 한서진은 가장 열정적으로 손을 들어 올리는 인물을 가리켰다.

“CNN의 애던 기자입니다. 마력 칩셋 No.3는 훌륭한 소방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화재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혹시 마력 칩셋 No.3의 라이센스 비용을 얼마나 생각하고 계신가요?”

민감한 지적에 일부 청중의 안색이 굳었다.

그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No.3는 화재 진압을 위한 훌륭한 도구다. 지금쯤 전 세계 소방부서에서 간절히 탐을 내고 있을 것이다.

소방은 인명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공익 시스템. 그런데 터무니없는 폭리를 취한다면 비난의 여지가 나올 수 있다. 어떤 과격한 이들은 No.3를 무료로 공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특허를 내도 저 외의 사람들에게는 소용이 없을 겁니다.”

“……!”

청중은 순간 술렁였다. 캘리포니아의 영웅이 설마 소방 작업이라는 공익사업을 가지고 폭리를 취하겠다는 것인가?

자본주의 시장에서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실망하고 비난할 텐데?

“왜냐하면 원본 설계도가 있다 해도 저 외에는 누구도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여드리죠.”

영상이 다시 바뀌었다.

수백 개의 마력 칩셋 각각의 동일 부위를 크게 확대해서 비교를 해놓은 모습이었다.

눈썰미가 좋은 이들이 자세히 보다가 탄성을 냈다.

“아!”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달라!”

“설마 모든 마력 칩셋이 동일한 설계가 아니란 말인가?”

한순간에 바뀐 분위기가 만족스러웠던 한서진은 미소를 지우고 말을 이었다.

“소화 기능 설계도의 기본 원형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찍어내는 과정에서, 조금씩 변수가 적용됩니다. 일종의 랜덤 워크 현상입니다.”

“…….”

“에테르의 밀집도는 쉬지 않고 끊임없이 변합니다. 그것들을 실시간으로 고려해서 적용하지 않으면 에테르 회로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슈나우저 같은 미시적 반도체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에테르 반도체는 설계도만 있으면 누구나 동일한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거시적인 힘을 발휘하는 마력 칩셋은 다르다. 그날그날 달라진 에테르 환경을 고려해서, 설계 원형의 전체에 걸쳐 미세한 변화를 적용해야 한다.

어마어마한 계산이 필요하며, 레이저 조사 장치에 실시간으로 적용해야 한다.

이는 Z7이라 해도 늦다. 계산을 마친 후에는 이미 다른 변수 값이 활성화된 상태, 즉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 계산이 가능한 것은 오로지 타르타로스뿐, 하지만 타르타로스는 세상에 공표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닥터 한은 그럼 어떻게 마력 칩셋을 만든 겁니까? 그 방법을 다른 제조업체도 똑같이 사용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저도 기본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쓰긴 하지만 그걸 다루는 사용자의 능력이 중요해서요. 아마 저 말고는 소용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잘난 체로 보이지 않아야 할 텐데. 한서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일단 설계 원형과 변수를 적용하는 프로그램은 무료로 공개하겠습니다.”

마력 칩셋은 설계 원형을 그때그때의 에테르 환경 변화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수를 적용하여 찍어낸다. 변수 적용 프로그램은 레이저 조사 장치를 통제하여 그 변환값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한서진은 그 두 가지를 무료로 공개했고, 반도체 제조업체와 연구소는 앞을 다투어 설계 제작에 들어갔다.

그들은 하나같이 절망했다.

“원형대로 찍어냈는데 작동을 하지 않습니다!”

“변수 적용 프로그램을 돌리자마자 컴퓨터가 CPU 과부하로 다운되었어요. 이거 돌리려면 수퍼컴퓨터는 가져와야겠는데요.”

“수퍼컴퓨터로도 소용없습니다. Z7로 해봤는데 엄청 버벅거리더라고요.”

“버벅거려도 어쨌든 공정은 가능하다는 거 아닌가요?”

“닥터 한이 말했잖습니까. 에테르 환경은 쉴 새 없이 변한다고. 실시간 공정 변경에 조금이라도 늦게 적용되면 쓸모가 없어요. 고작 몇 초 사이에도 변수 결과가 달라지는데.”

에테르 환경은 끊임없이 변하고, 마력 칩셋은 그 순간적인 변화를 설계 원형에 적용해서 찍어내야 한다.

그런 계산이 가능한 컴퓨터는 타르타로스뿐이다.

“혹시 한서진 박사가 뭘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숨기긴 뭘 숨겨, 그럴 바에는 차라리 당당하게 특허 공개해서 라이센스 챙기는 게 낫지. 그럴 사람 아냐.”

“그럼 대체 그 사람과 우리의 차이가 뭔데?”

“음……. 두뇌?”

이상한 소문이 조금씩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설득력이 있었다.

“생각해 봐. 장인과 아마추어가 똑같은 장비를 쓴다고 결과물이 다 똑같나? 아니잖아.”

“대량 공정라인에서 그런 게 어디 있어. 설계도, 프로그램, 공정시설이 똑같으면 똑같은 결과물이 나와야지.”

“그럼 똑같은 공정라인에서 찍혀 나온 총기가 성능 차이가 있는 건 뭔데?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미세한 차이가 있듯이, 반도체도 마찬가지라고.”

“그, 그럼?”

“내 생각에는 이거 차이야, 이거.”

어느 반도체 기술자는 자기 머리를 툭툭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너무 차이 나니까 같은 조건에서 찍어내도 누구는 불량품이 나오고 누구는 우량품이 나오는 거지. 한서진 박사도 그래서 특허 내도 소용없을 거라 한 거고.”

오해로 인한 쪽팔림은 순간이지만, 기밀 유지는 영원하다.

============================ 작품 후기 ============================

한서진의 속마음 :

“No.1도 No.2도 아니고 No.3부터 시작하는지 왜 아무도 안 물어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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