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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255화 (255/609)

00255  마력 칩셋  =========================================================================

정일재단이 무너지고, 김시형은 폭풍의 핵으로 우뚝 섰다.

처음에는 좌천 등의 보복 조치도 각오하고 뛰어들었다. 옷을 벗어도 좋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나 일을 마친 후 상황은 오히려 정반대가 되었다. 대외적으로 부패를 처벌하는 정의검사 이미지를 쌓았고, 검찰 내부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직급은 여전히 평검사이지만 검사장조차 눈치를 본다. 지지하고 따르는 동료, 선배 검사들도 상당수 생겼다.

그러나 이목을 받을수록 김시형은 묵묵히 자기 할 일에만 충실했다. 그런 모습이 겸손하다며 긍정적인 평가까지 끌어냈다.

“김 검사, 오늘 퇴근하고 한 잔 어때?”

최철우 부장검사가 친한 척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김시형은 속으로 쓴웃음이 나왔다.

처음 정일재단을 들쑤실 때만 해도 검사장한테 한소리 듣고 자신에게 화풀이를 하던 사람이다. 어쩌다가 이런 사이가 되었는지, 참 세상 일은 모를 일이었다.

“오늘은 좀 곤란합니다.”

“급한 거 아니면 시간 좀 내는 게 어떤가? 모처럼 회식인데 자네가 빠지면 다들 서운해 할 거야.”

“새연동에서 저녁 초대를 받아서요.”

그 말에 최철우 부장의 안색이 변했다. 새연동, 한서진의 저택을 돌려 가리키는 말이다.

“새연동에서? 그럼 당연히 가야지.”

“네, 죄송합니다.”

“아니야. 마음 쓰지 말고 다녀오게.”

김시형은 퇴근 준비를 했다. 검찰청 복도를 걷는데 주변에서 동료와 선배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새연동 초청을 받은 게 그새 소문이 난 건지, 부러움과 선망이 가득한 눈길이다.

주차장에서 차에 오른 그는 곧바로 새연동으로 향했다.

속도를 줄이며 정문으로 다가가자 좌우로 열린다. 경호원이 얼굴을 확인하고 통과시켰다.

도심의 공원을 사서 꾸민 개인 저택. 차는 넓은 잔디밭과 공원 사이로 조성된 길을 따라 달렸다.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곳이지만 그때보다 더욱 두근거린다. 이렇게 근사한 곳에서 매일 잠들고 눈뜨는 건 어떤 기분일까.

“어서 오십시오.”

저번에도 봤던 최수한 집사가 공손히 안내했다. 오늘은 처음 왔을 때 실내 홀이 아니었다. 최수한은 그를 야외로 안내했다.

푸른 잔디 위에는 잘 가꿔진 정원수를 배경으로 둥근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에는 이미 한서진이 앉아 있었다.

“대표님, 김시형 검사님이 오셨습니다.”

“아, 어서 오세요. 검사님.”

한서진이 일어나서 반갑게 맞이했다. 김시형은 긴장해서 악수를 나누었다. 대선 자금을 겨냥할 때도 떨리지 않았던 심장이 쿵쾅거린다.

“공사다망하신 분을 이렇게 오시라 해서 미안합니다. 다른 뜻은 없고 같이 식사나 할까 해서요.”

“아닙니다. 영광입니다.”

“청와대 비서실장님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앞으로 현 정권이 저를 귀찮게 할 일은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전부 검사님 덕분입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재단에서 그쳐야 했던 게 많이 아쉽지만.”

김시형은 한 호흡을 쉬고 말을 이었다.

“박사님의 지지가 아니었으면 그 1/10도 이루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부디 세상이 과학자와 검찰이 유착했다고 오해하지 않으면 좋겠군요.”

“누가 그런 오해를 합니까. 그럴 일은 없습니다.”

어느새 최수한이 다가와서 샴페인을 땄다.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는 잔을 부딪치며, 한서진이 입을 떼었다.

“저는 그저 제 연구와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당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검사님께 후원을 약속드렸지만, 그걸 빌미로 불법적인 부탁이나 청탁을 할 일은 없을 겁니다.”

“박사님의 높은 뜻은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술을 마시면서 한서진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재단은 어떻게 됐나요?”

김시형은 순간 멈칫했다가 대답했다.

“이사장은 해외로 쫓겨나듯이 출국했고, 재단 전체를 국고로 귀속하기로 했습니다. 총 자산이 8조 원은 될 겁니다.”

“아, 그렇게 됐군요.”

“……아직 모르시는군요.”

“제가 근래 좀 바빴어요.”

김시형은 보이지 않게 실소했다.

정재계를 비롯하여 온 나라를 긴장과 경악 속에 빠뜨린 사건인데, 정작 파워 게임의 한 당사자는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니.

여유가 드높으면 나태함으로 보일 수도 있구나. 김시형은 왠지 긴장이 탁 풀렸다.

요리를 곁들이며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어느새 김시형은 적당히 취했다.

“이 나라에는 도둑이 너무 많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도둑들을 때려잡을 생각입니다.”

“원래 그게 검사가 할 일이죠. 뜻대로 성취하시도록 응원하겠습니다.”

“대선 자금까지 못 건드린 게 너무 원통하지만, 무작정 장거리 질주만 할 수가 없어서…….”

김시형은 생각만 해도 안타까운지 짙은 신음을 흘렸다.

문득 그는 취한 와중에도 눈빛과 몸가짐을 똑바로 하고 말했다.

“그래도 박사님은 세상의 귀범이자, 이 나라의 큰 보물이십니다. 박사님과 연을 맺은 것을 제 검사 일생에서 천운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

“박사님처럼 모든 것을 다 가진 분이 정의감까지 드높다는 것은 이 나라에 있어 참 행운입니다.”

한서진은 조용히 쓴웃음을 지었다.

‘정의감이라.’

내가 정의로운가? 하고 생각해보던 한서진은 속으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꿈속의 왕이라면 모를까, 자신은 아니다. 통찰안 덕에 많은 것을 가졌지만, 속내는 평범하다.

크게 악하지도, 크게 선하지도 않다. 사익을 추구하면서 공익과 도덕을 가능한 침범하지 않으려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사람일 뿐이다.

“아까부터 노트북을 계속 주시하시는군요.”

김시형은 테이블 한쪽에 올려둔 노트북을 문득 쳐다보며 말했다.

“아, 미안합니다. 사실 몹시 기다리고 있는 게 있어서요.”

“제가 알면 결례가 될까요?”

“별 건 아니고, 얼마 전에 학회지에 논문을 보냈는데 아직 결과가 나오질 않아서요. 이제 슬슬 게재 여부가 결정 날 때가 됐는데…….”

그때였다.

무심코 새로 고침을 실행한 한서진은 「제5의 힘, 에테르」라는 타이틀이 큼지막하게 나타난 것을 확인했다.

“아, 드디어 게재됐네요.”

“정말입니까? 축하드립니다.”

김시형은 가볍게 박수를 치다가 물었다.

“그런데 어디에 게재하셨는지요?”

“원래 모교에서 발표하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뜯어 말려서 사이언스지에 투고했습니다. 심사가 생각보다 꽤 오래 걸렸네요.”

“사이언스면 3대 과학 저널 아닌가요? 명망 높은 곳에 게재하셨군요. 하긴, 박사님이라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나중에 꼭 읽어보겠습니다.”

논문의 반응을 대강 살펴본 한서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끄덕거렸다.

“역시 이렇구나.”

“왜 그러십니까? 반응이 혹시…….”

“썩 좋진 않군요. 예상한 반응입니다.”

한서진은 의미심장한 조소를 지었다.

원래 한서진은 모교 발표회에서 논문을 공표하려 했다. 그러나 니트론, 박효산이 뜯어말려서 3대 과학 저널인 사이언스에 투고한 것이다.

제5의 힘을 다룬 주제라는 것을 들은 3대 과학 저널은 경쟁적으로 논문을 게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한서진은 그중 사이언스를 택했고, 생각했던 것보다 다소 늦게 논문이 게재되었다.

반도체계의 신성이자 캘리포니아 대지진을 예고한 재난 예측 모델로 유명한 한서진. 그의 학술적 성과를 손꼽아 기다리던 구독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그러나 논문을 읽은 구독자들의 반응은 썩 호의적이지 않았다.

―닥터 한의 첫 논문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이게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 문장 뜻은 알겠는데 내용 파악이 안 되네. 내가 난독증이 있는 건가?

―우주에는 에테르라는 미지의 힘이 있고, 자연계 4대 힘은 그 힘의 응용일 거라고?

―아무리 닥터 한이 대단한 인물이라지만, 이미 오랫동안 정립된 법칙을 이렇게 뒤집어버리는 건 너무 무모한 거 아냐?

―에테르가 존재하면, 그건 어떻게 증명할 건데?

―솔직히 사이언스에 게재하기에는 내용이 너무 부실한 거 같은데. 닥터 한 이름값 때문에 심사위원회가 게재를 결정한 거라면 실망이다.

논문은 길지 않았다.

5대 힘인 에테르의 존재를 규정하고, 그 힘이 가진 성질을 전자적, 화학적, 운동적인 측면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서술했으며, 자연계 4대 힘은 에테르의 여러 작용 중 일부일 수 있다고 견해를 밝혀놓기만 했다.

체계적으로 설명을 해놓았지만 구체적인 증거나 입증은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구독자들의 반발이 터져 나온 것이다.

조심스럽게 한서진의 편을 드는 의견도 있었다.

―5번째 힘의 존재는 이미 니트론 박사가 여러 번 간접적으로 증명한 바 있어. 한서진 박사가 말하는 에테르도 그것과 동일하고 이름만 다른 거 아니야?

―지금 니트론 박사가 한서진 박사와 같은 연구소에서 공동 연구 중이라던데. 그럼 니트론 박사도 한서진 박사 가설에 동의한다는 건가?

에테르 가설을 놓고 과학계가 시끌시끌해졌다. 과학에 관심 없는 대중에게는 남의 잔치겠지만, 한국 여론은 이 일을 크게 다루었다. 한서진의 첫 논문 발표이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대로 시끄럽군요.”

니트론은 학계 여론을 훑어보며 내심 만족했다. 고대한 장난을 앞둔 악동 같은 미소를 품은 채.

박효산은 다소 우려를 나타냈다.

“서진이 널 못 믿는 건 아닌데 이걸 어떻게 수습할지 걱정이다. 부실 논문이라고 반응이 장난 아니구나.”

“입증을 하고 나면 저 목소리들이 쏙 들어갈 겁니다.”

“그래, 한 박사. 어떤 식으로 입증할 겁니까?”

한서진은 씩 웃었다.

“준비는 다 됐습니다.”

도시 외곽, 황량한 벌판.

본래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곳에 수백 대가 넘는 차량과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국적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방송사들이 촬영 장비를 설치했고, 국제 과학계의 권위자들이 속속들이 실험 장소에 도착했다.

그들은 벌판 한쪽에 쌓인 거대한 나무더미를 주시했다.

“캠프파이어라도 하려는 건가?”

“어떤 식으로 에테르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설마 에테르를 이용해서 나무에 불을 붙인다, 뭐 그런 건가?”

“그런 식으로 했다가는 아무리 한서진 박사라 해도 사기성 논란에서 벗어나기 힘들걸요. 무슨 마술쇼도 아니고…….”

전 세계가 지켜보는 공개 입증 실험이다.

어지간한 자신감이 없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 참관자들과 시청자들은 어떤 식으로 입증 실험이 진행될지 무척 궁금했다.

드디어 한서진이 경호원을 거느리고 현장에 나타났다. 그는 대형 디스플레이 패널을 실은 트럭을 대동했다.

“한서진입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짧게 인사를 마친 한서진은 덤덤히 설명을 시작했고, 그의 설명을 따라 디스플레이에 영상이 재생되었다.

“에테르는 만물을 움직이는 근원이자 힘입니다. 정확히 에테르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저는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응용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은 약간 터득하고 있습니다.”

화면에는 반도체 공정라인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반도체를 찍어내는 과정을 숨죽여 지켜봤다.

“비글, 슈나우저, 코카 스패니얼, 반도체 전문가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설계한 반도체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성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더미라고 부르는, 반도체의 성능에 아무 관여하지 않는 회로가 빽빽하게 그려져 있지요.”

의외의 설명에 반도체 전문가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전자 회로로 전자를 통제할 수 있는 것처럼, 에테르 회로로 에테르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전기의 존재를 모르는 중세인들에게 컴퓨터 반도체는 이해할 수 없는 마법이듯이, 에테르 또한 그렇게 느껴질 수 있을 겁니다.”

반도체 공정 영상은 마침내 후반으로 치달으며, 웨이퍼에서 찍혀 나온 조그만 반도체를 확대해서 보여주었다. 생긴 것 자체는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반도체였다.

그때 한서진은 한 손을 들어서 펼쳐 보였다. 그의 손에는 화면에 나온 것과 똑같은 반도체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전자 회로 대신 100% 에테르 회로만을 새겨 넣어 제작한 에테르 반도체입니다. 저는 임시로 재미삼아 마력 칩셋이라고 부릅니다.”

진행요원이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고, 기름을 머금은 장작더미는 순식간에 활활 타올랐다.

상당히 큰 불길, 먼 거리에도 후끈한 열기가 모두에게 전해질 정도였다.

“여기 새겨진 에테르 회로는 아주 간단한 명령 코드만을 담고 있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로 가까이 다가간 한서진은 그대로 힘껏 던졌다.

마력 칩셋을 던져 넣은 순간, 장작더미를 감싸고 있던 거대한 불꽃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한서진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참관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불을 꺼라, 이런 명령어죠.”

============================ 작품 후기 ============================

글을 써라, 이런 명령어는 다행히 없습니다.(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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