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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253화 (253/609)

00253  판정승, 판정패  =========================================================================

H반도체 직원이라고 소개한 박우진이 주고 간 USB에는 놀라운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

현재 수사 중인 사학 비리 관련해서 세밀한 사실관계, 증언, 범죄 관계 요식도 등 비리 체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정리돼 있었다.

심지어 일부 중요한 증거의 위치, 혹은 증거를 찾을 수 있는 단서나 방향까지 첨부돼 있었다.

“이거다!”

김시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자료가 사실이라면 단숨에 그물을 들어 올릴 수 있다. 정일재단 비리에 서식 중인 붕어들을 한꺼번에 낚을 수 있으리라.

그는 부하 직원을 호출했다.

“수색 영장 청구할 겁니다.”

승자의 미소가 입 꼬리를 스쳤다.

“근데 좀 많습니다.”

김시형 검사가 이끄는 수사팀은 재단 이사와 그 가족들의 저택과 사무실에 들이닥친 후 닥치는 대로 긁어갔다.

미리 증거가 어디 있는지 알기라도 한 것처럼 속속들이 비밀 장부를 찾아냈다. 심지어 차명으로 구입한 야산의 창고에 숨겨둔 비밀장부까지도 찾아냈다.

그리고 김시형 검사는 여론을 이용했다.

“내부자가 전해준 결정적인 제보 덕분에 유력한 증거를 다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증거와 수사 자료를 정리한 후 곧바로 대대적인 기소를 할 방침입니다.”

부패에 맞선 검사, 그는 어느새 폭풍의 핵이자 스타 검사로 등극했다. 그를 지지하는 동료, 몇 년 차 선배 검사들이 적극적으로 수사를 거들었다.

직속 검사장은 어떤 압박이나 영향력도 가할 수 없었다. 이미 김시형은 단순한 평검사가 아니었다. 국민들의 기억에 단단히 이름을 각인시킨 스타였다.

이 사건이 끝난다 하더라도 좌천 등으로 인사 보복을 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한서진이 후원하고, 국민들이 그를 인식하고 있으니.

여기에 재벌들까지 가세했다.

정일재단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기업들은 김시형을 돕는 게 면죄부라도 되는 양 적극적으로 나섰다. 살점을 내주어 뼈를 지킨다는 각오로 임했다.

대중그룹 등 일부 대기업은 정일재단과 연관된 사업체를 외부에서 흔드는 등, 정일재단이 제대로 대응을 할 수 없도록 혼란에 빠뜨렸다.

진성그룹도 마찬가지, 이서나는 동생인 이용무를 직접 만나서 담판을 지었다.

“너더러 뒤집어쓰라고 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나와 정보를 공유하자.”

“그래도 동생을 감옥에 넣은 회장님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은가 봐?”

“미우나 고우나 내 동생이니까.”

이용무는 서늘한 눈으로 이서나를 주시했다.

본래 자신의 것이었던 진성그룹 회장 자리를 빼앗은 경쟁자. 이미 구도가 굳어졌다지만, 그는 언젠가 올 기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직 누나나 자신이나 젊었고, 시간은 충분했으니까. 자신 또한 엄연히 진성그룹의 계승권자다.

“조건이 있어.”

“말해 봐.”

“김성일 실장팀, 기조실로 다시 복직시켜 줘. 꼭 실장이 아니어도 상관없어.”

기획조정실. 그룹 계열사 간의 교통정리 및 사정, 회계 흐름 등을 관망하는 컨트롤 타워다.

이서나는 회장직에 오른 후 기조실에서 김성일 등 이용무 라인을 전부 정리했다. 그룹의 정보를 자신의 손에 장악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잠재적인 경쟁자인 동생이 컨트롤 타워의 한 자리를 달라고 한다.

“내가 들어줄 거라 생각하니? 네가 김시형의 칼춤에 휘말리든 말든 모른 체 하고 놔둘 수도 있어.”

“대선 자금이 드러나면 나만 무너질 거 같아? 그룹 전체가 휘청거리게 될 걸.”

“우리가 파악한 바로는 끽해야 200억 이하, 실질적으로는 120억 간당간당하겠지. 그 정도 비리로는 그룹을 어떻게 할 수 없어.”

“정확히 80억이야.”

생각보다 더 적네. 이서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미소가 뚝 끊어졌다.

“마카오에서 세탁된 걸 끌어왔지.”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용무는 묘한 미소로 그녀를 주시했다.

“몸통에서 떼 온 부스러기라는 소리지. 만약 김시형이 부스러기 건드리다가 몸통에 닿으면 어떻게 될 거 같아?”

그룹 해외 비자금?

이서나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80억 밖에 안 된다고 안심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용무가 작정하고 나가면…….

“몸통이 100조 원이 넘는 건 알고 있나?”

“말해. 정확한 액수.”

“내가 말할 거 같아?”

이서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해외 비자금, 이거였구나. 아버지가 저 녀석에게 넘긴 옥새가.

장남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부친이 어떤 식으로든 아들의 재기를 준비해뒀으리라고는 생각했다. 그런데 해외 비자금 관리라는 옥새를 넘겨줬을 줄이야.

그녀는 작게 이를 갈았다. 이제는 이용무가 싫다고 해도 자신이 나서서 어르고 달래고 보호해야 할 입장이었다.

무려 100조 원 이상이다. 그게 드러나면 그룹은 날아간다.

“지금 그룹을 놓고 나를 협박하는 거니? 그룹이 다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누님도 그룹의 큼지막한 살점을 한서진과 H그룹에 내주고 그 자리를 얻어놓고, 그런 이유로 날 비난하는 게 옳다고 봐?”

“…….”

“김성일 그 친구, 기조실장으로 복직시켜. 누님 라인을 다 빼라고는 안 할게. 그러면 나도 이번 사건에 한해서는 손을 잡고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어.”

더 이상 대화를 끌 가치가 없는 일. 이서나는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좋아. 받아들일게.”

비서실장은 눈앞이 캄캄했다.

온 사방이 정일재단의 적이었다. 김시형이 휘두른 칼은 대선자금에까지 닿았고, 이는 대통령의 입지를 뒤흔들 수 있는 대형 사건이었다.

당선무효까지 번지지는 않더라도 남은 임기 동안 대통령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 것은 뻔했다. 아니, 당장 야당에서 탄핵을 해야 한다며 부르짖고 있는 중이다.

문제는 여당조차 심각하게 대통령과의 거리를 재면서 고민하고 있다는 것. 그만큼 정일재단 비리는 컸다.

이런 것도 제대로 해결 못하냐고, 주군이 자신을 얼마나 한심하게 볼까를 생각하니 아찔했다.

“비서실장님, 대통령님 호출입니다.”

드디어 왔다.

비서실장은 도축장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섰다.

대통령은 의외로 평안한 표정이었다. 사태가 심각하게 흘러감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저런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대통령이 되기도 어려웠으리라.

“대선 자금? 지난 선거 때 그런 일이 있었나?”

비서실장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정치 자금, 대선 후보는 굳이 알 필요도 없고 알아도 모른 체 하는 게 상례다.

“박호진 의원이 주도적으로 작업을 했던 모양입니다. 원래 선거라는 게 공적 선거 자금만으로는 치를 수가 없다 보니…….”

“그 친구도 참, 왜 그런 불법 선거를 저지르지? 아무리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었다 해도……. 충심은 알지만 과했어.”

대통령은 마치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그래서 대책은?”

“아무래도 몸통에 완전히 닿기 전에 꼬리를 잘라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위험한 상황입니다.”

“재단을 포기하자고?”

대통령은 느긋하게 물었다. 자기 일에 저렇게 태연할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었다.

“재단의 가치가 얼마인데 그걸 포기하자는 건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각하, 혹시 생각해두신 게 있으십니까?”

“공격은 언제나 최선의 방어지. 우리도 치세.”

비서실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 한서진을 치자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미7함대가 한서진 보호 때문에 제주도를 모항으로 바꾸네 마네 하고 있는 이 판국에?

“진성, 그리고 H그룹 포함해서 5대 재벌 모두를 치게.”

각오했던 지시가 아니어서 비서실장은 한시름 놓았다. 그러나 그 또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각하, 그것은…….”

“원래 가만히 있으면 호구로 보는 거네. 내가 누군가? 이 나라 대통령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룹 해체를 해도 좋다는 각오로 거세게 몰아붙이게. 그럼 그놈들이 알아서 한서진이한테 매달리겠지. 한서진이도 H그룹까지 얽힌 일에 언제까지나 버틸 수도 없고, 또 이런 일에 미국을 끌어들일 수도 없을 테니.”

대통령은 조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알아서 협상 테이블이 열릴 거야.”

“명안이십니다.”

처음부터 욕심을 내지 않았으면 훨씬 좋았겠지만. 비서실장은 굳이 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대검 중앙수사부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표적은 5대 재벌 그룹 해외 비자금이었다.

뿐만 아니라 국세청에서도 나섰다. 세금 탈루 혐의 및 대대적인 세무 조사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수색 영장을 앞세워 닥치는 대로 컴퓨터와 장부 및 집기를 들고 나가는 통에 제대로 된 업무가 불가능했다. 진성그룹, H그룹이라 해서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보고를 받은 이서나는 흙빛이 되었다.

“대통령이 진짜 같이 죽자는 건가요?”

“순순히 당하고 있지는 않겠다는 거지요. 김시형 검사가 역린을 건드렸습니다.”

역린, 용의 비늘.

김시형은 대선 자금이라는 대통령의 약점을 건드렸고, 그 대가는 칼같이 되돌아왔다.

문제는 이 보복으로 피해를 보는 게 김시형이나 한서진이 아니라 5대 재벌이라는 사실이다.

‘다 같이 망하자고?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이서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다 같이 죽자는 심정으로 폭탄을 터트릴 사람이 아니다. 이것은 분명한 경고다. 대통령의 목적은 협상 테이블을 열고,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 협정을 맺으려는 것이리라.

‘협상이 늦어질수록 우리는 다 죽어.’

한서진과 김시형은 무사하겠지만, 해외 비자금이 제대로 털리면 5대 그룹은 크게 다친다. 대통령이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움직인다면 그룹 해체까지도 실행할 수 있다.

‘결국 우리더러 한서진 박사를 말려달라는 건가?’

중수부의 움직임은 결국 그런 의도를 담고 있다. H그룹까지 끼워 넣은 걸 보면 한서진에 대한 간접 경고이기도 했다.

‘어떡하지?’

한서진에게 부탁해야 하나? 하지만 그건 리스크가 크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서나는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중수부에서 5대 그룹을 쳤다고요?”

김시형의 얼굴이 굳어졌다.

왜 하필 이 시기인가, 그리고 왜 5대 그룹인가.

5대 그룹을 친다고 해서 자신의 수사에 악영향이 끼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외 비자금을 제대로 턴다면 정의도 바로잡고,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중수부 목표에 H그룹이 끼어 있다는 게 문제다. H그룹은 한서진의 동반자이지만, 한편으로는 약점이기도 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닿았는데……!’

김시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서진이 부탁한다면 자신은 멈출 수밖에 없다. 그의 후원 없이는 자신의 꿈을 이룰 수도 없으니. 장기전을 대비한다면 어느 정도 호흡을 돌려야 했다.

‘대선 자금까지는 몰라도, 정일재단 만큼은 완전히 끝내고 싶었는데.’

김시형은 쓴맛을 문 채 머릿속으로 타협안을 정리했다. 한서진이 부탁할 때를 대비해서 미리 계획을 짜두려는 것이다.

대선 자금, 장남인 김주일의 사법 처리, 재단 비리 처벌 범위……. 그 파편들을 놓고 이리저리 자를 대고 선을 그었다.

그때였다.

“김 검사, 여기 있었군.”

최철우 부장검사가 어색한 얼굴로 들어섰다. 김시형은 조금 긴장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부장님.”

“이전에는 내가 한 말 때문에 조금 서운했지? 이해하게. 검찰도 결국 조직 아닌가.”

“…….”

“내가 너무 현실에 찌들긴 했나 봐. 허허, 그래도 정의 구현을 위해 뛰어다니는 자네를 보고 반성 많이 하고 있다네. 나도 자네 같은 시절이 있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타락했는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설마 자신에게 줄을 서려는 건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김시형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중수부 수사 때문에 자네가 곤란할 것 같아서 말이야.”

“……예.”

역시 허투루 부장 자리를 딴 것은 아닌가 보다. 중수부의 5대 그룹 족치기, 그것이 한서진과 대통령 간의 이 파워 게임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자네한테 힘이 될 만한 걸 찾아왔네.”

“힘이라고요?”

“일단 전체 수사 자료는 아니고, 대강 요약한 걸 가져 왔네. 이걸 보게.”

김시형은 그가 내민 몇 장의 A4 용지를 얼른 확인했다. 그리고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부터 남몰래 4년째 만나온 내연녀……. 지금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요?”

“그렇다네.”

“24시간 철저한 경호를 받는 사람이 어떻게 지금까지? 대체 어떻게 감쪽같이 숨기고 있던 겁니까?”

“원래 나무는 숲에 숨기라고 하지 않던가.”

김시형은 바로 말뜻을 알아들었다.

“내연녀가 정일재단에 근무하고 있군요.”

============================ 작품 후기 ============================

오늘도 챌린저 한은 브실 인간들의 치열한 경쟁 다툼을 천상계에서 느긋하게 지켜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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