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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252화 (252/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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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깅을 마친 존 캐롤 상원의원은 땀에 젖은 조깅복을 입고 들어서며 이온 음료를 찾았다.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고 선베드에 걸터앉은 그는 태블릿으로 해외 기사를 확인했다.

얼마 전부터 그는 동북아시아, 특히 한국 관련 기사를 꼼꼼히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닥터 한과 대통령 간의 파워 게임이라.”

요즘 그가 흥미를 갖고 지켜보는 사건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워싱턴의 정치가들은 한국에서 벌어지는 주도권 다툼을, 당을 가리지 않고 같은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대통령의 욕심에서 시작된 한서진과의 갈등. 그것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내심 흥미로웠다.

그는 보좌관을 흘끗 보며 농담처럼 말했다.

“닥터 한이 한국에 질려서 미국으로 이사 올 가능성은?”

이주나 이민이 아닌, ‘이사’라는 표현. 미국이 한서진의 행보에 관해 얼마나 느긋한 여유를 품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단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겨우 이 정도 일로 닥터 한이 한국에서 타격을 입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먼저 H그룹과 진성그룹이 닥터 한의 심기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일 겁니다. 그 두 그룹이 움직이면 재계가 움직이고, 정계가 움직이며, 온 나라가 움직이게 되죠.”

한서진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서진의 심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움직인다. 한서진의 신변에 타격을 줄 만한 일도 못 된다는 소리다.

“결국 대통령이 먼저 사과를 해야 사태가 봉합될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말이죠.”

“참 재미있는 구도로군.”

존 캐롤 의원은 유쾌한 미소를 띠며 다시 기사로 눈을 향했다.

문득 궁금해진다.

백악관은 지금쯤 어떤 계획을 갖고 있을까.

대선 자금.

평검사가 휘두른 칼은 마침내 대통령의 심장 근처에까지 닿았다.

대통령의 사재나 다름없는 정일재단의 총 비리 규모가 1,100억 원대였다. 그 중 230억 원이 대선 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고 의심되는 상황이다.

대선에 한 발 걸치고 있는 재단 하나의 규모가 이 정도인데, 무수히 얽혀 있는 다른 다리들을 다 합치면 어떻겠는가.

―사학 재단 하나가 연관된 금액만 230억이라면, 저번 대선 자금의 총 규모는 800억 원대까지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저거 순수하게 재단 비자금만 있는 게 아니다. 분명 여기저기서 세탁된 비자금이 섞여 있을 것이다. 제대로 파헤치면 줄줄이 딸려 나온다.

재벌들이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소문이 여의도를 떠돌아다녔다. 대선 자금으로 의심되는 재단의 230억 원 가운데에는 그들의 돈도 분명히 있다는 소문이 진실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돌았다.

대통령과 한서진의 싸움이 끝나면 하이에나처럼 수확할 준비를 하고 있던 진성그룹도 화들짝 놀랐다.

이서나는 급히 주요 임원들을 불러 모아 비밀회의를 열었다.

“우리는 얼마나 관여돼 있나요?”

“…….”

그녀는 ‘우리도 관여됐느냐’라고 묻지 않았다. 이미 관여를 기정사실화한 채 묻고 있는 것이다.

전무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당시 이용무 부회장님의 주도 하에 자금 작업이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얼마죠?”

“규모까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최소 80억에서 최대 200억 사이에 이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정확한 건 이용무 부회장님의 밑에서 실행한 팀이 알고 있을 겁니다.”

당시 그룹 실권자는 이서나가 아니라 후계 준비를 하고 있던 이용무였다.

한 시간 가까이 대책을 의논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서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결국 이용무 부회장과 이야기를 해봐야겠군요.”

대중그룹.

H그룹과 진성그룹의 빛에 가려져 있으나, 당당히 재계 3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기업이다. 두 대기업과 사업 부문이 상당히 겹침에도 불구하고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것은, 그만큼 경영진의 수완이 뛰어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우리가 선수를 쳐야 합니다.”

조현국 상무가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했다. 30대 중반임에도 상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그가 조기태 회장의 장남이자 장차 대중그룹을 물려받을 후계자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는 능력 없는 왕세자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주변에서 인정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왕재였다.

“김시형 검사는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는 한서진 박사가 풀어놓은 사냥개입니다. 주인이 부르기 전까지는 날뛰는 걸 멈추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작업한 금액은 얼마나 되지?”

“50억입니다.”

“50억…….”

“그중 초기 자금 10억은 정일재단 쪽 비자금으로 세탁돼서 흘러들어갔습니다. 김시형 검사가 그것을 계속 파헤치면 우리 쪽 꼬리도 드러나게 됩니다. 남은 40억이 발각되는 것도…….”

승자는 모든 허물이 허용된다.

현 대통령에게 흘러들어간 대선 자금은 크게 문제될 게 없었다. 대권 확보에 성공했으니까.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2년 만에 비수에 찔리게 생겼다.

그러나 아들의 열변에도 불구하고 조기태 회장은 주저했다.

“한서진이 그 친구를 택해도 과연 후회하지 않을까?”

“회장님, 아니 아버지.”

조현국은 회사에서 그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다. 있다면 부자지간으로서 진솔한 대화를 열고 싶을 때뿐이다.

“한서진 박사가 비록 권력에 몸을 담고 있지 않지만, 이미 그는 한국 최고의 권력자입니다. 그 어느 독재자도 그보다 무섭지는 않을 겁니다.”

“허나…….”

“시대가 변했습니다. 그의 사재만 털어 넣어도 대한민국 경제는 거덜 낼 수 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반도체 기술은 첨단 하이테크 산업에서 없어선 안 될 핵심입니다. 우리 그룹에서 개발 중인 차세대 가전과 자동차에는 모두 SJ인더스트리의 반도체가 들어갑니다.”

“…….”

아들의 열을 띤 설명에 조기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미국은 또 어떻습니까? 한서진 박사를 위해서라면 전면전도 불사하지 않을 겁니다. 이미 7함대 전체가 제주도를 모항으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건 말도 안 된다. 아무리 한서진이가 대단하다고 해도 한 명의 개인일 뿐이다. 고작 한 명을 위해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렇게 움직인다는 건…….”

“움직입니다. 틀림없어요.”

조현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미리 준비한 자료를 보여주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변화 흐름과 한서진이 그 안에서 어떤 키를 담당하고 있는지를 분석한 내용이었다.

세 개의 해외 전문 기관에서 내놓은 연구 분석은 전체적으로 대동소이했다.

“한서진 박사를 건드린다는 것은 미국의 51번째 주를 선제타격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조기태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아무리 천재고 돈이 많아도, 한 명의 개인을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게 가능한가? 그 미국이?

조기태는 그런 세상의 변화가 이해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세상을 따라가지 못할 만큼 너무 늙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선수를 쳐야 우리 그룹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미국에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다. 네 뜻대로 해봐라.”

조현국의 얼굴이 밝아졌다.

대중그룹을 필두로 재벌 그룹들도 속속들이 적극적인 참전을 개시했다.

그들은 대리인을 보내 김시형 검사와 접촉을 가지고, 최대한 수사에 협조해줄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증언과 협조를 대가로 자신들을 보호해줄 것을 부탁했다.

김시형은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토는 해보겠습니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또 한 명의 재벌 대리인이 물러갔다. 그는 어떤 봉투나 선물도 놓지 않았다. 서슬 퍼런 칼을 휘두르는 김시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다.

자리에서 일어난 김시형은 창문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복잡한 감정이 가슴에 고였다.

‘협조, 그리고 타협이라…….’

법 그대로 칼을 휘두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모든 건 한서진의 후원 덕분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심장 근처까지 칼을 찔러 넣은 지금, 그는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도 사람, 두려움이 엄습하기 시작한 것이다.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내색을 않을 뿐이지, 요즘 들어서는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다. 얼마 전 한서진과 독대해서 저녁식사를 가지지 않았으면, 하루아침에 자신감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재벌들이 모두 협조하면 정일재단은 쉽게 처리할 수 있다. 어쩌면 현직 대통령의 비리까지도…….’

살아 있는 권력, 현 대통령의 비리를 들쑤신다는 것. 이보다 짜릿한 정의 구현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협조에는 대가가 따른다. 휘두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 칼에 타협을 묻혀야 할까?

‘협조하지 않으면, 언제 끝을 볼지 모르는 지루한 장기전이 되고.’

현실은 타협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무겁게 와 닿는지.

작은 타협을 통해 큰 비리 하나를 거덜 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작은 타협일까?

칼에 작은 타협을 하나둘씩 묻히는데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지는 것이야말로 큰 손실은 아닐까?

“검사님, H그룹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노크를 하고 들어온 수사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또인가, 하고 김시형 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말쑥하게 생긴 30대 초반의 남자가 들어섰다. 이지적인 느낌이 가득한 얼굴이지만 특출하게 잘생긴 건 아니다. 적당한 기품에 사람을 끌어들이는 편안한 인상이다.

‘H그룹까지 관련되어 있나?’

재계 1, 2위를 다투는 기업이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김시형은 한서진이 마음에 걸렸다.

한서진은 H반도체의 사실상 오너이자, H통신의 지분 과반을 가진 대주주이기도 하다. 또한 사적으로 회장 일가와 매우 친하다고 알고 있다.

그런 H그룹이 정일재단 비리에 연루되어 있고, 또 청탁을 한다면 자신은 어떡해야 하는가? 김시형은 마치 하늘이 끊임없이 자신의 양심을 시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검사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H반도체 전략기획팀에서 근무 중인 박우진이라고 합니다.”

“아, 네. 김시형 검사입니다.”

“요즘 매우 큰일을 하시느라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 비리 타도를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에 괜히 저까지 뿌듯해집니다. 그래서 한 손 거들 수 없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김시형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재벌들이 보낸 대리인과 서두가 크게 다르지 않다.

“저는 H반도체 전략기획팀 박우진이라고 합니다.”

“……?”

왜 자기 소개를 두 번 반복하지? 김시형은 의아해서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불현듯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묘한 여유가 맺힌 저 미소는, 어딘가…….

“공식적으로는 그렇습니다.”

“……!”

그렇게 말하면서 박우진은 지갑을 슬쩍 열어 안에 숨겨진 배지를 보여 주었다. 어떤 신분도, 소속도, 이름도 표시되지 않은 배지는 그저 성조기만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설마…….”

“물론 저희 H그룹은 정일재단의 비리에 전혀 연루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큰 수사를 하시는 과정에서 검사님이 여러 모로 고충이 많으실 거라 믿고, 국민 된 차원에서 검사님께 지지와 협조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찾아온 것이니 저의 방문을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대기업에서 보낸 이들과 여전히 크게 다르지 않은 멘트. 그러나 그 말을 하면서 그는 슬쩍 USB 하나를 내밀어 쥐어주고 있었다. 김시형 검사는 귀신처럼 그것을 낚아채서 숨겼다.

“만약 저희 H그룹에 도움을 요청하실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여기로 연락 주십시오.”

그는 아까 내민 명함을 가리키며 정중히 허리를 숙인 뒤 사무실을 나갔다.

김시형은 홀린 듯이 그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미국?’

============================ 작품 후기 ============================

저는 딱지닦이 실탄이라고 합니다.

공식적으로는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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