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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검사장, 그 친구가 지금 감히 누굴 건드렸는지 알고나 있는 거요?
“죄송합니다. 워낙 열혈에 불타는 친구라 가끔 사리분별을 못하고 날뛰는 친구입니다.”
―더 말 않겠소. 각하께서 심기가 매우 불편하시니, 박 검사장 손에서 깔끔하게 처리하시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한 시간 가깝던 통화가 드디어 끊어졌다.
박현 검사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돌아봤다.
“김시형인가 김시불인가 그놈 누가 데리고 있는 놈이야?”
“최철우 부장검사 밑에 있는 친구입니다.”
“철우 오라고 해!”
잠시 후 최철우 검사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표정을 보아 하니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을 하고 있는 듯했다. 박 검사장은 짜증이 나서 서류를 집어던졌다.
“너, 대체 뭐하는 놈이야? 네 밑의 핏덩이 하나도 제대로 관리 못하고!”
일개 부장검사 앞에서 검사장은 까마득히 높은 상관. 당연히 그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변명 한 마디 제대로 꺼내지 못한 채 실컷 깨져야 했다.
한참 화풀이를 하고 난 뒤에야 겨우 화가 풀린 검사장은 조용하지만 분명히 말했다.
“정일재단 이사장은 대통령 아들이다. 알지?”
“…….”
“이거 잘못 들쑤시면 줄줄이 나와. 자칫…….”
대선 자금을 비롯한 대통령 비리까지 닿아 있을 수도 있다. 아니, 닿아 있는 게 정상이리라.
임기 2년, 한창 서슬 퍼런 권력을 자랑하는 대통령을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 화약통을 지고 불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다.
“싸대기를 후려치든, 사탕을 주고 어르든, 수사 중지 시켜. 알아들었나?”
“예, 검사장님.”
“가 봐.”
검사장이 턱짓을 했고, 최철우 부장검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집무실을 빠져 나왔다.
수사1부로 향하는 그의 얼굴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김시형이 그놈 어딨어!”
평검사들이 화들짝 놀라 급히 대답했다.
“김시형이는 지금 용의자 심문 중입니다.”
“당장 전화 때려서 내 사무실로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한 명이 후다닥 일어나서 구석으로 가서 전화를 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최철우가 못마땅해서 물었다.
“그놈, 뭐래?”
“용의자 심문 중이라서 곤란하다고…… 심문 마치고 나서 오겠다고 합니다.”
“그놈, 뭐 잘못 먹었나?”
최철우는 황당했다. 지금 하늘같은 직속상관의 명령에 대놓고 항명해?
“심문실 어디야? 안내해!”
“예!”
검사 한 명이 급히 달라붙어 그를 안내했다.
김시형은 취조실에서 김주일 이사장을 한창 심문하고 있는 중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니 다행히 윽박지르거나 강압적인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최철우는 그나마 천만다행이라 생각하고 김시형을 불렀다. 그를 확인한 김시형은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고는 일어났다.
“너, 미쳤냐?”
“사학 비리 수사 중입니다.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십니까? 너, 안에 있는 저 분이 누군지나 알고 지금 체포한 거냐?”
“정일재단 이사장이죠.”
“현 대통령 장남이야.”
“대통령 가족이면 면책권이라도 주어진답니까? 잘못이 있으면 벌을 받아야죠.”
김시형의 눈빛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다.
‘뭐야, 이놈?’
최철우도 바보는 아니다. 그는 김시형을 잡아끌다시피 해서 구석으로 데려갔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너, 왜 이래?”
“…….”
“이런 놈 아니었잖아? 대통령 아들이야. 그것도 임기 2년차 밖에 안 된 대통령 아들이라고! 정일재단 들쑤시면 큰 넝쿨 줄줄이 엮여 나오는 거 몰라서 이러는 거 아니잖아?”
“그럼 나오는 대로 수사하면 되겠죠.”
“수사가 될 거 같아? 너, 진짜 올해 안에 옷 벗고 싶어?”
“부장님이야말로 이상하시네요. 검사가 비리 포착해서 수사하겠다는데 용의자 가족 관계 사정을 왜 봐줍니까? 비리가 나오면 기소할 거고, 없으면 수사 종료할 겁니다.”
“…….”
법리적으로는 당연한 원칙. 그러나 세상 일이 반드시 그렇게 돌아가지만은 않는다.
김시형이 남달리 정의감이 불타긴 했어도 젊은 검사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래도 최소한 세상 무서운 줄은 알면서 칼을 휘두르던 놈이다.
그랬던 놈이 대통령 아들이라는 말에도 눈 하나 꿈쩍 하지 않고 있다. 최철우는 왠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뭔가 있어. 분명히.’
“저는 마저 취조하러 가겠습니다.”
예의는 차리지만 그뿐, 직속상관인 자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치 오늘 당장 옷을 벗어도 상관없다는 식이다.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서둘러 부장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직원들을 닦달했다.
“김시형이한테 정일재단 누가 고발했는지 가져와!”
진성전자 부회장 이용무는 절차부심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패는 이미 오래 전 누나인 이서나에게 기울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후계자 다툼에서 패배한 비운의 경쟁자.
그럼에도 진성전자에 남아 있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치욕을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측근들은 차라리 다른 계열사로 옮겨서 때를 옮기기를 권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결국 전자산업이 핵심이다.’
반도체를 포함한 전자산업이 진성전자뿐만 아니라 그룹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것이다. 진성전자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그룹의 미래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뜻했다.
한서진과 인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계열사로 옮길 수는 없었다. 보험이나 유통을 다루면서 그와 사업을 논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미래를 대비하고 있던 그는 놀라운 정보를 입수했다.
“정일재단 사학비리?”
“예, 그렇습니다. 김시형이라는 평검사가 수사 중인데, 고발인이 한서진 박사 재무팀장입니다.”
전 그룹 기조실장 김성일이 공손히 보고했다. 그는 기조실장에서 물러나 정보분석팀으로 보직을 옮겼지만, 여전히 이용무를 섬기고 있었다.
이용무는 손가락을 딱딱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정일재단이라.”
방계 중 한 명이 혼맥으로 그쪽 재단과 이어져 있는 것으로 기억한다. 엄밀히 따지면 남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정일재단은 5위 안에 드는 명문대인 정일대학교를 비롯하여 고등학교, 중학교, 사립 연구소 등을 보유한 부자 사학재단이다.
대통령의 장남이 이사장이지만 실질적인 주인은 현 대통령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서진의 재무팀장이 그 재단의 비리를 고발했다?
“혹시 한국대학교 압박 감사에 반발해서 생긴 일인가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서진 박사가 청와대 오찬을 거절한 것 때문에 대통령이 단단히 화가 났었지요?”
“여의도에서는 유명합니다. 대중에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대통령은 한서진과 친교를 쌓고 싶어 여러 번 구애를 했으나 한서진은 번번이 거절했다. 결국 대통령은 한서진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한국대 전면 감사라는 칼을 빼들었다.
진성그룹은 안다.
대통령이 칼을 빼든 진정한 목적은 ‘화합’을 위해서지, 상대를 거꾸러뜨리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한서진은 이에 대항해 정일재단 사학비리라는 칼을 빼들었다.
“한서진 박사가 어디까지 갈 것 같은가요?”
“평검사의 수사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마도 화가 났다는 제스처를 보여주고자 함이 아닐까……. 사실 끝까지 갈 수도 없거니와 간다고 하면 대통령이 결국 손해입니다.”
“한서진 박사는 별로 잃을 게 없지요.”
“누군가는 양보를 해야 하고, 그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적당히 돌려서 사과하면 사태는 멈추게 되겠지요.”
김성일은 확신을 가지고 덧붙였다.
“그리 되면 최종적으로는 대통령의 뜻대로 되는 셈이군요. 다만 불쾌함이 남긴 하겠습니다만.”
김성일의 의견은 일반 상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용무는 다른 쪽으로 생각에 잠겼다.
권력자는 합리적으로만 행동하지 않는다. 위신, 감정, 체면을 더욱 중요시하기도 하고, 그것은 세간의 방향과는 다른 결정을 낳기도 한다.
한서진은 이미 대한민국을 뒤흔들 수 있는 한 명의 권력자다. 누가 뭐래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만약 한서진 박사가 멈추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서나는 굳은 얼굴로 나서며 빠르게 지시했다.
“정일재단과 얽힌 그룹의 모든 것을 빠른 시일 내에 정리해요. 은밀하고 조용하게, 알았죠?”
“예, 회장님.”
“어떤 친구였죠? 김씨 집안에 시집간 방계.”
“이현진 과장입니다. 지금 정일재단에서 일하고 있고, 진성물산 이석재 상무의 딸입니다.”
“아, 현진이.”
그제야 이서나는 이현진이 누군지 기억해냈다. 6촌이었던가, 7촌이었던가.
“현진이한테 말해서 당장 오늘이라도 해외 출국하라고 하세요. 가족끼리 여행가면 더 좋겠군요.”
“예.”
“상황 안정될 때까지는 들어오지 말라 해요. 불똥이 어디까지 튈 지 알 수 없으니까.”
이서나는 확신에 차서 지시를 내렸다.
임원들은 자신이 지나치게 상황을 비약하는 것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서나는 그들과 다른 수평선을 보고 있었다.
‘이건 파워 게임이야. 대통령과 한서진 사이의.’
대통령은 한서진을 자신의 지지율에 이용하려고 했고, 한서진은 그것을 거부했다.
이것은 그로 인해 불거진 서열 싸움이다. 한국대와 정일대, 어느 쪽의 비리가 더 큰가를 놓고 겨루는 시시한 다툼이 아니다.
만약 한서진이 이기면?
‘새로운 권력의 탄생이지.’
정치권력, 자본권력, 언론권력을 벗어난 완전히 새로운 권력의 축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정확히는 미국 명예시민이 된 순간 탄생했던 권력을 이제야 세상에 반포하는 것이다.
‘어리석었어.’
이서나는 끌끌 혀를 찼다.
대통령은 지지율과 권위의식에 눈이 멀어 한서진을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정치권력을 위협하는 적을 만들고 말았다.
그대로 놔두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을, 괜한 욕심에 눈이 멀어 세 수 앞을 내다보지 못한 것이다.
“이 김시형이라는 검사……. 성향이 예사롭지 않군요. 싱겁게 사태가 끝나지는 않겠는데요.”
그룹 기조실에서는 김시형에 관해서 개인적인 커피 취향까지 남김없이 자세히 털어왔다. 조사 기록을 꼼꼼히 읽은 이서나는 서늘한 눈으로 임원진을 돌아봤다.
“우리 그룹도 준비합니다.”
“준비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싸움이 끝나면 꽤 많은 살점이 떨어질 것 같은데, 남김없이 주워 먹어야지요. 어차피 승자는 그 살점에 신경도 안 쓸 거 같은데.”
“망할, 정의감에 눈이 먼 평검사놈 하나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잖아.”
고발인을 확인한 최철우 부장검사는 이를 악물었다.
“청와대와 한서진 간의 파워게임이었어.”
임시로 선출된 왕과 스스로 일어선 왕의 다툼. 그리고 김시형은 스스로 일어선 왕이 내세운 대리인이었다.
최철우는 이제야 김시형의 눈빛이 왜 그렇게 단단했는지 이해했다.
아마 충분한 후원을 약속받았으리라. 검사 옷 따위야 언제든 미련없이 벗어버릴 수 있을 만큼.
한서진의 후원과 지지를 받는다면 뭐든지 가능하다. 사업을 하든, 정치를 하든.
대형 로펌의 주인이 될 수도 있고, 여의도에 입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먼 훗날에는 대권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제라도 김 검사 쪽에 줄을 서야 하나?’
어느덧 그의 머릿속에서는 김시형놈에서 김 검사로 호칭이 변했다.
‘검사장님은?’
최철우는 빠르게 생각했다. 어떻게 행동하는 게 자신에게 유리할 것인가? 단독으로 김시형의 편에 붙는 것? 검사장을 함께 끌어들이는 것? 아니면 그 밖의 다른 선택?
그는 선택을 내렸다.
“윤승우 검사 들어오라고 해.”
“예.”
잠시 후 젊은 검사 한 명이 머뭇거리며 들어왔다. 최철우는 가벼운 업무적인 대화로 운을 뗀 후, 은근한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김두박 대통령이 여의도에 있던 시절 말이야. 그때 자네가 그 사건 수사했지?”
“네, 그렇습니다. 부장님 지시대로 일단 캐비넷에 묻어놨습니다.”
“그거 나한테 가져오게.”
“네? 정말이요?”
윤승우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고, 최철우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이제 와서 들쑤시자는 게 아니고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다시 묻어둘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물론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이왕 참전하려면 무기는 많을수록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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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방아쇠를 당긴 주인공은 무관심...(...)